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54(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2. 20:15

서배 할배54(작성자; 손진길)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자 오문자는 쌀가게로 나간다. 그날은 동경에서의 일정을 끝내면서 덕천 사랑방모임의 방문단이 마지막 총평을 하고 귀국하면 장차 어떠한 일을 추진할 것인지를 각자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시간으로 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 일에 흥미를 보이고 있는 그 저택의 주인 박철은 쌀가게로 나가지 아니하고 그냥 남아 있다. 그 집 딸 박미자는 오늘도 변함없이 동경시내의 조그마한 회사로 출근을 한다.

오늘 아침에 박미자는 출근하기 전에 방문단 일행을 위해서 과일을 깎아 놓고 일본사람들이 ‘고히’라고 부르는 커피까지 끓여 놓았다. 모두들 고히를 마시면서 동경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오경덕 선생이 말문을 연다; “그동안 동경에서 보내신 일정을 제가 간략하게 한번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첫날은 오사카에서 이곳 도쿄에 밤열차로 도착하신 관계로 이 집에서 하루 푹 쉬셨습니다. 그 다음날은 도심에 있는 황궁과 우에노 공원을 관광했습니다. 3일날은 군대의 점호를 멀리서 살펴보고 학교와 신문사를 방문했지요”.

잠시 숨을 돌린 다음에 오경덕 선생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제4일에는 손병희 선생을 만나시고 제5일에는 권동진 선생을 만나서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6일에는 하루동안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토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7일에는 일본의 문화를 체험했지요. 가부끼와 인형극을 본 것입니다. 제8일에는 아사쿠사로 가서 절과 신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오경덕 선생이 말을 끊고 좌중을 한번 돌아본 다음에 마무리를 한다; “제9일에는 선물을 마련하고자 일본의 도심을 걸어 다니면서 거리의 풍경과 시설 등을 살피고 빵 문화까지 체험했고요. 제10일인 어제는 각자 조선에 돌아가서 무엇을 할지 찾아보느라고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11일에 드디어 이렇게 각자 발표를 하고 마지막 토론을 하는 날로 모인 것입니다”.

방문단 일행은 모두들 오경덕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짧은 동경 방문 일정 동안에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각자 조선으로 돌아가서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발표하는 시간이다. 먼저 연장자인 최사권 선비가 발표를 한다; “저는 어제 이 집에 남아서 여러 선비들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를 제가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최사권 선비는 잠시 좌중의 3사람을 돌아보고서 구체적인 설명을 한다; “저와 김춘엽 선비 그리고 장인식 선생과 안성기 선생이 조선에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은 신식 소학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내남의 학생들이 신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이조에 소학교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리고 김춘엽 선비는 외동에 그러한 소학교를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이미 오랜 세월 두 지역의 서당에서 신학문을 가르치고 계시는 장인식 선생과 안성기 선생께서 전적으로 그 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그들 4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8사람이 모두 박수를 친다. 신식학교를 만들자면 교실을 짓고 칠판과 책상 그리고 의자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사용할 난로도 들여 놓고 장작도 사두어야 한다. 더구나 선생을 모집하고 월급을 주어야 한다.

그 일을 시작하고자 하는 용기가 대단하다. 물론 필요한 재원은 지방 유지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주창한 인사가 가장 큰 부담을 지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다. 그 점을 생각하여서 그런지 좌중의 박수소리가 크고도 오래 계속이 된다.

그 다음에는 이채령이 나선다.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발표를 한다; “저희 5사람의 부인들은 이번 일본방문을 통하여 일본여인들의 옷차림새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장이 조선의 여인네의 복색과 상당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본여성들이 일을 할 때 어떠한 차림새를 하는지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이채령이 조금 뜸을 들인 다음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 결과 저희들은 그녀들이 앞치마를 즐겨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방에서 뿐만 아니라 바깥일을 할 때에도 큰 앞가리개를 사용하여 옷이 더럽혀지지 아니하도록 보호하면서 동시에 앞가리개의 긴 끈으로 옷을 간편하게 동여매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성들이 안심을 하고 작업을 할 수가 있더군요”.

이채령이 잠시 말을 끊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한다; “물론 조선에서도 옛날부터 앞치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300년 전 임진왜란 때도 행주산성에서 여인네들이 그 앞치마로 돌을 날랐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행주치마’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그 앞치마가 여기 일본여인들의 것과 비교할 때 치마만을 가리고 있는 작은 것입니다”.

이채령이 다시 설명을 한다; “일본에서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하의인 치마 뿐만 아니라 윗도리인 브라우스까지 전부 가릴 수 있는 큰 앞치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것을 동경에 있는 서양의 그림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러한 큰 앞치마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마치 겉옷처럼 보이는 서양의 앞치마 그림입니다)

이채령이 결론삼아 말한다; “더구나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일을 할 때에는 넓은 모자를 사용하더군요. 따라서 저희들은 귀국을 하면 큰 앞치마와 햇빛 가리개용 모자를  만들어서 실생활에 사용하고 또한 보급하는 일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성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박수를 친다. 여자분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며 이제는 조선의 여성들의 차림새도 달라질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서배 아재 손상훈이 일행 앞에 나서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저는 내남 너븐들의 농삿꾼입니다. 그러므로 농사를 잘 지어서 많은 소출을 내고 이웃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싶습니다. 이곳 일본에서 저는 벼농사에 있어서도 종자를 개량하여 큰 수확을 얻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그 볍씨를 좀 얻어 가지고 가서 조선에서 시험적으로 재배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 일이 성공을 하면 분명히 소출이 증대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산업보국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그렇다. 조선은 95퍼센트 이상이 농민이다. 그야말로 ‘농자천하지대본’인 나라이다. 그러므로 우량품종을 보급하여 소출만 증대시킨다면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국력이 커지면 자연히 조선의 근대화와 산업화에도 박차를 가할 수가 있다.

그렇게 발표를 하고나서 일행은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서로 지난 열흘 동안 동경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다시 토론을 한다.

대충 토론이 끝나는 것을 보고서 오경덕 선생이 한마디를 한다; “이제 일본에서의 일정이 전부 끝났으므로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근 두달이나 부모님과 처자식이 있는 고향을 떠나 있었더니 무지하게 보고 싶군요. 오늘 짐을 잘 꾸리시고 내일 아침에 열차편으로 후쿠오카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편히들 쉬십시오”.

드디어 일본에서의 3주에 걸친 긴 방문일정이 끝나고 있다. 모두들 자신들이 대단한 여행을 했다고 생각한다. 평생을 살면서 조선사람 가운데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말 조선의 고향에서만 살아오면서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다가 이번 기회에 넓은 세상을 보고 또한 선진문물을 직접 체험했다. 그것이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엄청난 자양분이 될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렇게 자신들의 일본방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서 모두들 부부끼리 잠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있다. 1901년 여름이 끝나가는 계절에 동경에서 마지막 밤을 그렇게 의미있게 보내고 있는 덕천 사랑방모임의 5선비와 그들의 부인들인 것이다.

그들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일들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 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그날 밤은 모두들 단잠을 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