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52(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2. 09:48

서배 할배52(작성자; 손진길)

 

다음날은 동경시내를 관광하면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날로 삼았다. 그러므로 크게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고 가급적 걸어서 시내를 이동했다. 물론 오문자 부부의 저택이 도쿄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도심까지 전차를 타고 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동경시내를 관찰하다가 보니까 그동안 일정이 바빠서 눈여겨보지 아니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인도를 걸어가면서 덕천에서 온 사랑방모임의 5선비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5부인들이 마치 동경시내의 모습을 처음 본 듯이 다음과 같은 대화들을 나누고 있다;

먼저 방문단 가운데 연장자이며 60대 중반의 연세인 덕천의 선비 최사권이 말한다; “동경시내에는 길거리의 집들이 단층이 아니라 거의가 이층집이군요. 조선에서는 이층집을 보기가 쉽지가 않는데요…”. 그러자 오경덕 선생이 말한다; “도시엔 인구가 많아서 이층집이 많은데 특히 일본의 수도인 동경이 그러하지요”.

서배 아재 손상훈이 말한다; “동경시내는 길거리가 넓고 차들이 제법 다니고 있군요. 그리고 전차도 자주 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부인인 이채령이 말한다; “조선에서는 서울에 전차가 운행이 되고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소도시인 경주 읍내에서는 전차나 자동차를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을 들은 일행 가운데 김춘엽의 부인인 이가연이 자신의 일가이며 친구인 이채령에게 다정하게 말한다; “채령아, 나는 오사카에서 오경자의 집에서나 이곳 동경에서 오문자 언니의 집에서나 상수도에서 물이 콸콸 나오고 있는 것이 제일 신기하더라. 우리가 살고 있는 조선에서도 그렇게 수도가 설치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 매번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수고를 덜게 말이다…”.

이가연이와 이채령이는 1856년생 동갑이다. 그리고 오경자도 동갑이므로 이가연이가 그냥 오경자라고 편하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오문자는 3살이나 위이므로 자연스럽게 ‘오문자 언니’라고 말한다. 일주일 이상 함께 지내다 보니까 여자들은 저절로 그렇게 편하게 부르면서 서로 친해지는가 보다. 사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는 적응력이 빠르고 친해지는 속도가 빠르다. 따라서 만약 타향이나 타국에 와서 살게 된다면 조선의 선비들보다는 그 부인들이 훨씬 빠르게 정착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배 아재 손상훈과 동갑이며 친구인 서배 마을의 김춘엽이 그에게 말을 건다; “여보게 서배 아재, 저 길가의 전봇대를 한번 보게나. 엄청 높구만. 그리고 사발 같은 것이 많이 달려 있지 않나? 저게 무엇하는 것인지 자네는 알고 있나?”. 그의 말을 듣고서 손상훈이 길가의 전봇대를 쳐다보니 정말로 사발 같은 것이 그 위에 많이 달려 있다. 처음 보는 것이다. 그래서 “글세..”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경덕 선생이 설명을 한다; “저것이 높은 전봇대에 매달려 있는 이유는 전기가 바깥으로 흐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름하여 ‘애자’라고 부릅니다. 일종의 절연체이지요. 전기의 압력이 높은 때에는 저러한 사발로 된 ‘애자’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전깃줄의 피복이 벗겨지는 경우 번개처럼 참으로 위험하지요”.

모두들 친절한 오경덕 선생의 설명을 듣고서 ‘아하’라고 말한다. 그때 역시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적이 있는 장인식 선생과 안성기 선생이 다같이 말한다; “그래, 그러고 보니 중학교 수업시간에 그렇게 배운 것이 기억이 나네 그려…”. 그들이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닌 시절은 1870년대이다. 그때 벌써 서양의 편리한 문물에 대하여 일찍 중학생들에게 가르친 모양이다. 참으로 일본의 서양문물 흡수의 속도가 빠른 것이다.

그들 가운데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최근에 방문한 경험이 있는 자가 오경덕 선생과 안성기 선생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양의 남대문에서 전차와 우마차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광경을 그들의 머리속에서 그려보며 그것을 일본의 시내의 풍경과 비교를 해보고 있다. 참고로, 그들의 머리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1900년 당시의 한양의 모습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동경시내를 걸어 다니다 보니까 어느 사이에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모두들 시장기를 느끼고 있다. 그때 길가의 빵집을 우연히 들여다보던 장인식의 부인 최순옥과 안성기의 부인 이다연이 함께 소리를 친다; “어머 저게 뭐에요? 떡도 아닌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생겼네요. 그런데 먹는 것인가 봐요…”.

그 소리를 듣고 방문단들이 빵집을 들여다보면서 그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여 고개들을 갸웃거린다. 그러자 일본에 누나와 여동생이 살고 있어서 미리 방문을 하여 시내를 돌아본 경험이 있는 오경덕 선생이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둥근 모양의 것이 밀가루와 팥으로 만든 ‘팥빵’입니다. 그리고 길다란 것은 밀가루로 구운 ‘바케트’라고 하는 불란서식 식빵입니다. 일본은 일찍 300년전에 포르투갈 선원들로부터 총과 같은 무기류 뿐만 아니라 빵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지요….”.

놀라운 이야기이다. 300년 전이면 임진왜란 때이다. 그때 일본군사들이 총을 사용한 것은 알지만 빵이라고 하는 서양의 떡까지 만들어 먹은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조선에는 전해지지 아니한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방문단 일행을 보면서 오경덕 선생이 추가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일본에서도 밀가루 값이 비싸서 함부로 빵을 만들지는 못했지요. 그래서 한동안 빵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경덕 선생과 함께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는 장인식 선생과 안성기 선생도 빵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그러자 오경덕 선생이 독보적으로 빵에 대한 설명을 계속한다; “일본이 산업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이제는 서양에서 밀가루를 수입하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일본에서 생산하는 쌀값보다 서양에서 수입하는 밀가루 값이 더 쌉니다. 따라서 일본사람들이 요즘은 빵집에서 서양의 빵을 많이 사먹고 있지요”.

지식욕이 대단한 오경덕 선생이다. 따라서 좀더 전문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참고로, 일본은 일찍 포르투갈 선원들로부터 빵 제조법을 배웠기에 떡과 같은 그것을 포르투갈 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사람들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여러가지 빵을 개발했지요.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여기 빵집에 진열이 되어 있는 바로 이 ‘팥빵’입니다. 굉장히 일본사람이나 조선사람의 입맛에 맞는 빵입니다”.

오경덕 선생이 설명을 이어간다; “그리고 길쭉한 빵은 최근에 불란서의 특이한 식빵인 ‘바케트’를 보고서 일본에서 개발한 것입니다. 그 제조법이 불란서와 같기에 여기서도 ‘바케트 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것이 맛이 독특하지요…”.

오경덕 선생의 설명을 듣자 모두들 그 맛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을 이끌고 오경덕 선생이 빵집 안으로 들어선다. 그날은 내남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이 그들의 부인과 더불어 그 빵집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팥빵’과 독특한 불란서의 ‘바케트 빵’ 맛을 보았다. 평생 처음 맛보는 것인지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반면에 그날 점심식사로 일본 음식점에서 별도로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선물가게에서 무엇들을 샀는지는 정확하게 오래 기억이 잘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