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50(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0. 13:20

서배 할배50(작성자; 손진길)

 

다음날은 도쿄에서 문화체험을 하기로 한다. 관람가격이 만만치 아니하지만 오경덕 선생이 일단 일본의 수도에 들렀으니 비용이 들더라도 가부끼를 한번 보고 가시라고 권한다. 오전에는 가부끼를 보고 오후에는 인형극을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에서 온 덕천 사랑방모임의 5인사들은 오경덕 선생의 안내를 받아 부부동반으로 도쿄 중심지에 있는 가부끼 극장을 찾았다.

가부끼의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그 분장이 특이하다. 어째서 얼굴의 표정을 완벽하게 감추는 분칠을 하는 것인가?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 모두들 궁금해 한다.

그것을 보고서 서배 아지매 이채령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일본에서는 수백 년 동안 칼을 찬 사무라이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을 하였다고 하더니 평민들이 그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 되면 큰 불이익을 당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일체 자신의 표정을 감추고 있는 것일 거예요”.

그럴 듯한 해석이다. 그 말을 듣고서 일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적이 있는 신학문 선생 안성기가 맞장구를 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무라이들은 전국적으로 몇 만명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천만명이 넘는 백성들 위에 군림을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무라이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거나 불순한 얼굴 표정을 보이면 그 자리에서 칼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러니 피지배자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내심을 숨기고 표정관리를 해야만 합니다. 자연히 가부끼처럼 분장에 능한 자가 살아남게 되는 것이지요”.

모두들 고개를 끄떡인다. 참으로 불쌍한 백성들이다. 그들은 사무라이 계급이 정복자들이고 자신들은 다수이지만 피정복민인 것이다. 하기야 한반도에서 기마민족이 왜인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원주민을 지배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원주민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스스로 가부끼의 배우처럼 처신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 하나, 가부끼는 하얗게 분칠을 하기 때문에 목소리만 바꾸면 남자가 능히 여자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신기하다. 어째서 여자의 역할을 남자에게 맡길까? 그것은 남자가 여자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남자까지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한 그들의 역사는 아무래도 퇴폐 향락의 게이샤 시대가 오래 계속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600년경부터 에도의 막부시대가 시작이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들의 가신들을 가까운 번의 다이묘로 임명하고 나중에 자신에게 항복을 한 신하들을 에도에서 먼 지방의 영주로 발령을 한다. 그리고 에도의 막부를 통하여 그들을 끊임없이 감시를 한다. 은밀하게 감시하는 자들이 소위 ‘닌자’들이다.

닌자들은 필요에 따라 역심을 품은 다이묘들을 암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지방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안이 된 것이 두가지 제도이다; 하나는, 다이묘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에도에서 생활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다이묘들 자신도 영지에 거하는 햇수만큼 에도에서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때문에 지방의 영지인 번에서 곡식과 조공품 그리고 생활용품이 끊임없이 에도로 향하게 된다. 그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일본의 상인들인 ‘조오닝’이다. 그들은 지방에서 물건을 받고 환을 발행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에도로 수송하여 상점에서 판매한다. 환이 화폐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조오닝들은 부자들이 된다. 하지만 신분의 상승이 안된다. 사무라이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부를 사용하여 한세상 사치와 향락을 누리고 끝내는 퇴폐적인 게이샤 문화의 시대를 창출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허무하게만 살 수는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조오닝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일을 시작한다. 그것이 명인의 제도이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일본에서 최고가 되면 그 가문이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직업의 분화를 가지고 오며 기술 일본의 모체가 된다. 그와 같은 일본의 역사를 참조하면 가부끼의 공연이 볼만한 것이며 그것이 가장 일본적인 연극인 것이다.  

조선에서 온 덕천 사랑방모임의 방문단이 오후에 도쿄에서 관람한 인형극은 본섬인 혼슈의 것이 아니라 시코쿠 지방에서 원정을 와서 공연한 작품이다. 그 내용 역시 잘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인형극의 묘미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세 사람의 닌자가 배후에서 하나의 인형을 조종하는데 그 기술이 놀라왔기 때문이다.

어째서 일본사람들은 스스로 연극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지를 아니하고 인형을 대신 내세우고 그것을 막후에서 조종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책임을 지는 자와 권리를 행사하는 자를 분리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보인다. 왕이 정승을 내세워서 조정에서 정치를 하다가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정승에게 책임을 대신 묻고 자신은 면피를 하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일본에서 수백 년간 쇼군이 막부를 내세워 전국을 통제하게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막부의 책임자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자신은 한없는 면책특권을 행사한 역사와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쇼군이나 조선의 왕이나 그 점에서는 똑 같은 인형의 조종자라고 하겠다.

그것이 정치의 묘미인지는 몰라도 순수한 조선의 시골 양반이며 지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히 비겁한 지도자들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이 태평성대이면 몰라도 지금과 같이 외세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한 생각을 일본의 전통적인 인형극을 보면서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자들이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이다.

멀리 선진국 일본에 시찰을 와서도 전통적인 문화체험을 하면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다. 그래서 연극을 보고 오문자의 집으로 돌아와서 모두들 조용하게 식사만 하고 있다. 오문자 부부는 좋은 구경을 하고 와서 어째서 모두들 말수가 적고 침울한지 그 이유를 잘 짐작하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게 동경에서의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