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47(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0. 07:16

서배 할배47(작성자; 손진길)

 

다음날 오전 10시경 오문자 부부의 저택으로 손병희 교주가 찾아온다. 오경덕 선생이 아침 일찍 집을 나가더니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리고 손병희 선생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 또 한사람 있다. 그는 누구일까?

덕천 사랑방모임의 5선비들은 손병희 교주와 구면이라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1889년말에 내남 덕천에서 그를 만나고 헤어진 후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이니 1년 8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그것도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동경에서 그를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가운 것이다.

그렇지만 5선비의 부인들은 손병희 교주가 초면이다. 따라서 연장자인 최사권이 일일이 손병희 교주에게 그들을 소개하면서 인사를 시킨다. 부인들은 그 유명한 인물 동학의 제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그 가운데 서배 아재 손상훈의 부인인 이채령이 더욱 친근하게 손병희 교주에게 인사를 한다. 그 이유는 친정 아버지인 훈장 이덕화로부터 평소 동학과 친정 조부모와의 관계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조부모는 최제우를 통하여 동학사상을 받아 들였는데 그러한 부모의 영향을 젊은 시절에 선비 이덕화가 상당히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동학의 시천주의 가르침이란 사람이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와 기운을 바로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몸에 받아 들이고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높낮이가 없고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이 기득권을 한없이 누리고 살아가는 전근대 왕조와 귀족의 사회에서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꿈과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러한 시천주의 사상에 자신도 모르게 심취하여 살아간 사람이 훈장 이덕화이다. 그리고 그 외동딸인 이채령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채령도 손병희 교주가 남과 같지 아니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 손상훈보다 10살이나 연하인 손병희 선생을 눈 여겨 보고 있다.

손병희 선생은 자신을 따라온 인물을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를 한다; “제 친동생인 손병흠입니다. 저와 동생은 같은 해 1882년에 장조카인 손천민의 인도로 동학에 입교를 하였지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와중에서 그만 조카 손천민이 순교를 하고 저와 동생은 관에 쫓겨서 이곳 일본에 피신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단 소개를 받은 손병흠이 방문단 인사들에게 고개를 숙여 절하며 말한다; “손병흠입니다. 교주이신 형님의 안전을 여기서 책임지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들 그 인사에 절을 하면서 답을 한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잘 오셨습니다”.

대충 인사가 끝난 것을 보고서 손병희 선생이 말을 잇는다; “저는 동생을 이곳 도쿄에 연락책으로 두고서 당분간 오사카와 나가사키 쪽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동경에서 제가 가명을 쓰면서 조심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의 용모를 파악하고 있는 인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신변이 위험하므로 일본의 남서부로 내려가서 가능하면 청국 상해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그곳에 피신하고 있는 동학교도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방문단은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그래서 김춘엽이 대표로 질문을 한다; “교주가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되면 조선에서의 동학의 일은 어떻게 처리를 하고 있습니까? 아무래도 교단의 일에 감독이 소홀해지고 교주가 원하지 아니하는 빈틈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요?”.

대범한 성격의 손병희 선생이 빙긋이 웃으며 답변을 한다; “몇달 전에 저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던 전임 최시형 교주의 제자인 이용구가 지금은 조선으로 돌아가서 망명생활 중인 저를 대신하여 동학의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안심을 하고 외국을 떠돌고 있지요”.

손병희 교주는 같은 스승 최시형 문하에서 공부한 이용구를 크게 신임하고 있다. 손병희보다 7살이나 연하인 이용구는 동학의 입교가 더 늦다. 손병희 선생보다 무려 8년이나 늦는 것이다. 그럼에도 머리가 총명하여 제2대 교주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으며 지금은 제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다. 훗날 그가 손병희 교주를 배신하여 친일파 중의 친일파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을 지금은 아무도 알지를 못하고 있다.

손병희 선생은 그의 말 그대로 워낙 유명한 인물이며 조선의 조정이 체포하고자 하고 있기에 여기 동경에서도 그 신변이 위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곳의 일은 그의 계획대로 손병흠이 대신하는 것이다. 조선의 동학간부들이 중요한 일을 동경으로 손병흠에게 연락하면 그가 일본의 지방을 떠돌고 있는 형에게 결재를 받아서 한양에 알려줄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서 선비 최사권이 먼저 입을 연다; “손병희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되면 저는 한가지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청국과 일본까지 둘러보고 계시니 장차 조선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하여 지금은 어떠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까?”.

단도직입적이며 핵심적인 질문이다. 손병희 선생이 간략하게 답을 한다; “저의 생각으로는 두가지를 동시에 추진했으면 합니다; 하나는 조선의 조정에 청원을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선례를 참고하여 조기에 근대화 및 산업화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라고 요청하면서 일종의 압력을 가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조선에 민간인 학교와 신문사를 세우고 유학생을 많이 모집하여 일본에 파견하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는 저희들이 스스로 능히 할 수가 있는 일들이지요”.

그 말을 들은 선비 최사권이 맞장구를 친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것이 기본방향이지요. 저희들도 시골 선비들이지만 그 일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앞으로 많이 지도편달을 해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손병희 선생이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재작년에 제가 오히려 여러모로 최 선비님의 도움을 크게 받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계원들을 모두 이끌고 일본시찰까지 나서시니 저보다 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제가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선비 최사권이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손병희 선생에게 묻는다; “아 참, 그리고 재작년에 제가 선생님을 도와 달라고 교리 최부자의 가주를 만났더니 두말 없이 거금을 내놓았습니다. 평소에 그 집하고 왕래가 있었던 것입니까?”. 손병희 선생이 답을 한다; “저는 아직 그 집에 들린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학을 시작하신 최제우 교주님이 교리 최부자의 파시조 최진립 장군의 후손입니다. 그러니 같은 집안이지요. 그리고 제2대 최시형 교주님이 또한 경주 사람이고 최제우 초대교주님의 일가 조카가 되지요”.

그 말을 들은 방문단이 모두 ‘아’ 하고 탄성을 지른다. 그 모습을 보고서 이번에는 서배 아재 손상훈이 손병희 교주에게 묻는다; “그러면 손병희 선생께서는 최시형 교주와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손병희 선생이 간략하게 답을 한다; “최시형 교주님은 조강지처가 돌아가시자 재혼을 하셨는데 그 부인이 밀양 손씨입니다. 저와 일가이지요. 제가 입교를 하고서 최시형 교주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데 그만 그 부인마저 돌아가시고 맙니다. 따라서 제가 누이동생에게 교주님을 잘 모시라고 혼사를 주선했지요”.

어려운 신상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참으로 꾸밈이 없고 대범하며 솔직한 성품의 손병희 선생이다. 그 솔직하고 대범한 성격이 사람들을 끄는 힘이 있다. 모두들 그 말을 들으면서 역시 손병희 선생이 인물이라고 느낀다. 그날 10명의 방문단은 참으로 손병희 선생을 만나는 귀한 자리이므로 평소에 궁금한 것들을 많이 질문한다. 일일이 자신이 아는 한 진실되게 답변을 하는 손병희 선생이다.  

그날 손병희 선생은 점심식사와 저녁식사를 방문단과 함께하면서 오래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이곳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조선의 지사들과 인물들을 만나서 사귀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신분을 숨기고 충청도에서 온 지주 이상헌이라고 그들에게 소개를 했습니다. 끝까지 저의 신분을 그들에게 속일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그들도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손병희 선생은 한번 숨을 돌린 다음에 말한다; “그 가운데 저와 나이가 같은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 성함이 권동진입니다.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신지 여러 해가 되시지요. 자세한 것은 나중에 오경덕 선생께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과 내일 말씀을 나누시면 조선의 앞날을 짐작하시는데 크게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여기서 작별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많이 보시고 느끼시고 무사히 귀국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나게 될까? 훗날을 기약하기 힘든 이별이다. 모두들 손을 흔들면서 정치적 망명객이 쓸쓸하게 떠나는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때 방문단과 그렇게 헤어지기가 섭섭한지 그 아우인 손병흠이 뒤를 돌아보면서 또 한번 인사를 한다; “형님 대신 저는 당분간 도쿄에 머물 계획입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당부의 말을 한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오경덕 선생을 통하여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제가 힘이 자라는 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조선의 동학과 계속 연락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 형님에 그 아우인 모양이다. 조선에서 온 동포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그도 가득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