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46(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0. 07:13

서배 할배46(작성자; 손진길)

 

오문자 부부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방문단 일행은 내일 일정에 대하여 의견을 조율한다. 그 결과 자신들은 관광에 해당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내일은 당장 조선의 근대화와 관련하여 언론과 교육 그리고 군대의 양성에 관한 시찰이 가능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은다.

그러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다분히 우에노 공원에서 본 정한론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신정부에 반대를 하여 난을 일으킨 자의 동상을 어째서 그곳 동경의 중심지 공원에 세워놓은 것일까? 그것은 일본이 산업근대화에 성공을 하게 되면 그때는 명치원로들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주장 곧 조선정복이라고 하는 이상을 자신들이 버리지 아니하고 반드시 현실화하겠다는 다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정치인들의 포부와 정책노선이 그렇게 일본의 신민들에게 은연중에 교육이 되고 있는 형편이므로 이제는 내남 덕천에서 온 방문단인 자신들도 더 이상 시골 무지랭이로 지낼 수는 없다고 하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면 그들이 이미 선진화된 일본처럼 조국의 근대화를 나름대로 이루어 갈 수가 있는지 그것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관광이나 하고 있다가는 시간이 지나면 조선이란 자연히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이끄는 개가 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조선백성들의 의식을 근대화 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학교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언론의 힘을 이용하여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그들 5선비와 오경덕 선생이 수십년간 덕천 사랑방모임에서 정기적인 토론을 한 것이 그와 같은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당장 내일 일정이 그렇게 합의가 되자 오경덕 선생이 결론을 내린다; “내일 오전에 동경 시내에 있는 신문사를 방문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습니다. 제가 미리 전화로 내일 방문할 예정이라고 연락을 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옛날 후쿠오카에서 함께 공부한 일본인 친구가 간부로 근무를 하고 있기에 그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들 ‘아,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떡인다.

오경덕 선생이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소학교나 중학교의 수업을 참관하는 일은 내일 제가 인근에 있는 학교의 교무실을 방문하여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아마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저희들이 멀리 조선에서 온 방문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군부대의 시찰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민간인의 출입을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서배 아재 손상훈이 의견을 낸다; “그렇다면, 멀리서 그들 군인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 정도로 보아도 좋을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듣자 오경덕 선생이 즉시 답을 한다; “아, 그렇다면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방문했던 황궁 근처에 사실은 일본의 군부대가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멀리서 그들의 훈련모습을 구경할 수는 있습니다. 한번 내일 그렇게 시도를 해보지요”.

그렇게 내일의 일정이 대충 결정이 되었다; 아침식사를 한 다음에 다시 황궁으로 가서 그 주변에 있는 군부대의 군인들이 오전에 훈련을 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문사를 방문하여 어떻게 신문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 다음에는 점심식사를 하고 쉬고 있는 사이에 오경덕 선생이 일본말이 가능한 장인식 선생과 안성기 선생과 함께 인근의 학교를 방문하여 잠시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조선에서 온 방문단이 시찰할 수가 있는지를 학교측에 알아보면 된다.

다음날의 일정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제는 생각보다 일찍 귀가를 하였기에 푹 쉴 수가 있었다. 따라서 모두들 일찍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경의 중심부로 이동한다. 황궁의 주변에 대규모의 병영이 설치가 되어 있는 것을 멀리서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아침 시간이므로 군인들이 단체로 점호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한참을 지켜 보았더니 인상에 남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무엇보다 먼저 ‘군인칙어’를 단체로 낭독한다는 것이다. 오경덕 선생의 설명을 참조하면 그것은 천황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만들기 위하여 유신정부가 작성한 일종의 군인들의 충성서약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단체로 군인들이 체조를 한다. 아침에 단체로 체조를 하는 것이 보기에 좋다. 군복을 입고 모두가 구령에 맞추어서 체조를 하고 있으니 신체단련에도 좋고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일체감과 소속감이 강화가 될 것이다. 그것 참 쉽고도 좋은 방법이다. 

그 다음에는 모두들 오경덕 선생이 미리 연락을 해 놓은 신문사를 찾아갔다. 황궁에서 별로 멀지 아니하여 걸어서 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이 역시 대규모로 신문을 인쇄하고 있는 윤전기이다. 기계가 원통으로 돌아가는데 그곳에 감겨 있는 종이가 순식간에 신문으로 인쇄가 되고 있다. 활자에 먹물이 묻어서 한꺼번에 신문을 쩍쩍 대규모로 찍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고서 방문단은 기계의 힘이 무섭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수천부의 신문을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 내자면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필사를 해야만 할까? 아니면 대규모 발간을 위해서는 나무판에 일일이 글자를 조각도로 새겨야만 하는데 그것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인가? 그런데 여기 신문사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금속으로 된 활자를 꼽아 놓은 판에 계속 잉크를 묻혀서 그냥 윤전기에 감겨서 돌아가고 있는 종이에 순서대로 계속 퍽퍽 찍어내고 있는 것이다.

금속활자를 조선이 먼저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일일이 그 금속활자의 판에 먹물을 묻히고 한 장씩 찍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곳 신문사는 그것이 아니다. 기계의 힘으로 종이를 돌리고 그것에 순식간에 활자판이 찍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인쇄의 속도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지주 김춘엽이 말한다; “기계를 이용하면 이렇게 생산의 속도가 빨라지는 군요. 그러니 시골에서 물레를 돌려가면서 실을 뽑고 베틀에 앉아서 실로 베를 짜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를 않아요. 그러니 그 인건비의 절약으로 생산가가 싸질 수 밖에 없겠네요. 조선도 빨리 기계의 힘을 이용하는 산업화를 하지 아니하면 외국제품에 밀려서 살아남지를 못하겠습니다”.

올바른 통찰이다. 모두들 그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그 윤전기를 보고서 물레를 손으로 돌리던 시대가 이제는 끝났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한 생산의 속도의 차이가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의 차이를 말하고 있음을 일동은 확연하게 알게 된다. 앞으로 조선에 돌아가게 되면 그들은 무슨 일부터 시작하려고 할 것인가?

신문사 방문을 마치자 오경덕 선생은 자신의 중학교 친구인 일본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일본인 간부가 오경덕 선생을 따라 나와서 방문단에게 인사를 한다. 일본말로 인사하는 것을 오경덕 선생이 통역을 한다; “오늘 저희 신문사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의 한양에도 이러한 신문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차 여러분들이 살고 계신다고 하는 지방에도 그러한 신문사가 생길 것입니다. 저희 신문사에서 만든 신문을 한부씩 기념으로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그 일본인 간부의 말을 들으면서 일행은 일본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으면 참으로 친절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집단적으로 모이면 사무라이 정신으로 조선을 정복하자고 떠드는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인정스럽고 인간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1868년이후 일본의 백성들이 근대화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방문단은 멀리 가지 아니하고 신문사 인근에 있는 우동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 집에서 팔고 있는 가께 우동의 맛이 오사카에서 오경자가 만들어 준 우동 맛과 비슷하다. 조선에서 그들이 만들어 먹는 칼국수와는 면의 모양도 다르고 상당히 다른 맛이지만 먹기에 좋은 것이다. 먼저 식사를 마친 오경덕 선생은 일본의 스시와 초밥을 주문하여 일행에게 한번 맛보시고 천천히 드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장인식 선생 및 안성기 선생과 더불어 인근의 소학교와 중학교를 찾아 보겠다고 나선다.

경주 월성 사람들인 방문단은 간장 또는 고추장에 졸인 쇠고기와 야채 그리고 참기름이 들어간 경상도의 김밥 맛에 익숙하다. 그리고 생선회는 초장에 찍어 먹거나 아예 비빔밥에 넣어서 먹는다. 그런데 일본의 김밥인 스시는 그들이 ‘다꾸앙’이라고 부르는 단무지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생선을 회로 만들어 그것을 식초 섞은 밥에 얹어서 먹는다. 더구나 일본사람들은 ‘와사비’라고 부르는 겨자를 듬뿍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스시와 초밥 맛이 괜찮은 편이다. 그러한 음식문화는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방문단들이 천천히 스시와 초밥 맛을 음미하고 있자 어느 사이에 오경덕 선생과 두 사람이 식당에 들어선다. 마침 인근에 있는 두 학교에 들렀더니 학교측으로부터 쉽게 방문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에서 방문단이 왔다고 했더니 그들이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방문단이 동경시내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본 것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한번씩 ‘신민교육칙어’를 단체로 낭독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전에 군인들이 부대에서 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서배 아재 손상훈이 오경덕 선생의 통역을 통하여 일본선생에게 물어본다; “학생들도 학교에서 체조를 단체로 하나요?”.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일본 신민들은 누구나 명치 천황이 내려준 칙어를 함께 낭독하면서 조국근대화에 앞장을 서도록 정신개조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체로 체조를 하여 건강한 몸으로 천황이 맡긴 일본 열도의 발전에 이바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무서운 동조의식을 말한다. 가뜩이나 섬나라 일본은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동조성향이 강한데 이제는 천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고 있으니 그 칼끝이 장차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러한 섬뜩한 생각이 들자 조선의 방문단은 말문을 닫는다. 그리고 학교의 시설과 학생들의 눈망울을 살펴본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영특하게 보인다. 그리고 시설은 나무로 만든 교실과 책상과 걸상 등이다. 운동장에는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높은 단이 하나 설치가 되어 있다. 전교생이 조회를 할 때에 교장이 그곳에 서서 훈시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일본인 선생이 친절하게도 강당을 보여준다. 전교생이 참석하여 실내에서 행사를 할 수가 있는 규모라고 한다.

조선은 언제 그러한 시설을 갖춘 소학교와 중학교를 지방에서도 볼 수가 있을까? 한양에서는 황실에서 신식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몇 군데 설치를 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수가 일본처럼 많지 않다. 그러므로 지방에 이르기까지 젊은 세대에게 근대화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일행은 동경 시찰 둘째날의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