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45(작성자; 손진길)
다음날 아침식사가 끝나자 오경덕은 내남 덕천 사랑방모임의 5부부를 인도하여 동경시내 관광에 나선다. 그가 가장 먼저 방문단을 이끌고 간 곳이 천황이 살고 있는 황궁이다. 그 안까지는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황궁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해자를 보면서 그 바깥길을 다 함께 걷는다.
길을 걸으면서 오경덕 선생이 방문단에게 설명을 한다; “역사적으로 동경은 본래 에도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쇼군이 되면서 그의 영지인 에도는 1600년대부터 막부정치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1868년 명치유신으로 막부시대가 끝나자 교토의 천황이 일본의 상징이 되면서 1869년에 이사를 하여 에도 성의 주인이 되지요. 따라서 에도는 동경으로 그 이름이 바뀌고 맙니다”.
오경덕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방문단은 다 함께 황궁의 성밖 주위를 절반쯤 걷는다. 대략 십리쯤 걸은 것 같다. 그로 짐작해보면 일본의 천황이 살고 있다는 황궁은 완전히 한바퀴를 걸으면 20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훗날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일본제국은 천황이 1946년 1월초에 소위 ‘인간선언’을 하면서 스스로 황궁의 규모를 3분의 1로 줄인다. 황실정원을 국민들에게 내어놓고 축소가 된 황궁을 그때부터 ‘황거’라고 부르고 있다.
전후의 일본내각은 1949년에 황실정원을 국민공원으로 조성한다. 그리고 나중에 일반인들에게 개방을 한다. 그러나 완전히 자유스러운 개방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황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있어 공원을 출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가방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황거공원’을 산책하면 옛날 황궁의 일부를 볼 수 있지만 1901년에 일본 황궁의 주위를 바깥으로 돌고 있는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은 그러한 특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황궁의 주위를 반쯤 돌고 나자 오경덕 선생이 일행을 데리고 1873년에 개원한 시바 공원으로 간다.
그 공원을 관람하면서 일행은 일본식 정원이 경주에 있는 신라의 정원과 상당히 다르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규모가 작지는 않는데 일본의 정원은 오밀조밀한 것이 한마디로 여성스럽다고들 말한다. 어째서 사무라이라는 수만명의 무인이 백성들을 칼로서 오래 다스린 일본의 정원이 그토록 섬세하고 아담한 것일까? 모두들 그 점을 궁금해한다.
그들의 질문을 받고서 오경덕 선생이 설명을 한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정신수양을 위해서 불교의 선종의 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절제와 극기를 수도의 기본으로 삼고 있지요. 그리고 작은 정원에 자신들의 우주적인 정신세계를 일종의 소우주로 압축하여 담기를 좋아합니다. 그 결과 그들의 정원은 섬세하고 상당히 오묘하지요…”.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황궁주위는 물론 시바 공원까지 계속 걸어 다녔더니 일행은 다리가 아프다. 따라서 오경덕 선생이 그들을 시바 공원 주변의 도로변에 있는 식당으로 인도한다. 그곳에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오경덕 선생이 일행에게 다음 일정에 대하여 말한다; “전철을 타고 좀 이동을 하면 그 유명한 동경의 우에노 지역에 있는 공원이 나타납니다. 그곳에 동물원이 있으니 도쿄에 오신 김에 한번 구경을 하시지요”.
일행이 훗날 다이쇼 천황의 시대부터 정식으로 ‘우에노 공원’이라고 불리는 그 장소에 도착하여 동물원으로 가고자 걷고 있는데 갑자기 공원의 남쪽에 개를 끌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 하나 나타난다. 그 동상에 전신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 사람의 키가 보통이 아니다. 18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인이다. 모두들 일본사람을 왜인이라고 부르는 조상들의 말이 틀린 것인가 하여 깜짝 놀라고 있다.
그때 오경덕 선생이 설명을 한다; “이것은 1868년 명치유신을 가능하게 한 3인의 전쟁영웅 중 하나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기념하는 동상입니다. 다카모리는 사쯔마 번의 군대를 지휘하여 에도의 막부를 쓰러뜨리는 데에는 큰 공을 세웠으나 끝까지 무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오경덕이 잠깐 숨을 쉰다.
(사진은 1898년에 우에노 동물원 옆 공원에 세워진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임)
그리고 설명을 계속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에 정한론을 주장하며 온건한 명치원로들과 정면으로 의견충돌을 하고 말지요. 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1877년에 다시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를 하고 자결을 하고 맙니다”. 그 말을 듣자 모두들 섬뜩한 전율을 느낀다. 300년 전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으로 조선을 정복하자고 주장한 인물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임을 알아챈 것이다.
일본이 근대화의 첫걸음을 떼면서 벌써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인물이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으로 조선을 정복하자고 주장하였으니 반드시 그 꿈을 이루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조선을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일종의 개처럼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의 장래가 참으로 걱정이다. 일본의 수도인 동경을 여행하면서 내남 덕천 사랑방모임의 선비들과 그 부인들은 조국의 앞날을 다시 걱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 충격 때문인지 그들은 우에노 동물원을 구경하였으나 크게 인상에 남지가 않는다. 알록달록한 여러가지 새와 생전 보지 못한 짐승들이 우리에 가득 차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진기한 볼거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조선에서 온 10명의 시찰단이 느끼고 있는 것은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열강들이 모두 짐승과 같은데 그 중에서도 조선의 백성을 개처럼 끌고 다니고자 하는 자들이 먼저 개화를 한 일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진기한 구경거리가 그때부터 그들의 눈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다.
그러한 일행의 눈치를 알아챘는지 오경덕 선생이 한마디 한다; “오늘은 본래 동경시내에 있는 신문사를 한 군데 찾아가서 신문의 발행과정을 한번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그것이 어렵겠습니다. 내일 동경시내를 다시 구경할 때에 시찰하도록 하지요. 일찍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떡인다.
일본은 어째서 1882년에 벌써 우에노 지역의 공원 내에 신민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그러한 동물원을 만들어 두고 있을까? 좋게 생각을 하면 식물원과 같이 그것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백성들에게 교육차원에서 가르쳐주고자 하는 근대화 교육의 일환이다. 그러나 유독 맹수류를 우리에 가두어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있는 것은 은연중에 야성에 대한 본능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일본은 훗날 조선을 합병한 후에 왕이 살던 궁궐에 식물원과 더불어 동물원을 만들어 그곳을 짐승의 터전으로 만들고 만다. 그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것이다. 조선의 왕을 자신들의 천황의 개로 전락시키고 그 점을 은근히 즐기고자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그래서 훗날 한국정부가 창경원을 없애고 창경궁을 복원하는데 돈을 많이 쓰게 된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한국민들의 책무라고 한다면 그 조상인 덕천 사랑방 모임의 선비들과 그 부인들은 짐승과 같은 일본제국의 야욕을 미리 알아채고서 그에 대한 대비를 나름대로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일 것이다.
먼 훗날의 그러한 역사적인 책무를 미리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는지 그날 오문자 부부의 집에 도착한 10명의 방문단은 몸이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생각을 미리 파악을 해서 그런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이 결코 녹록하지 아니하리라는 사실을 단번에 직감하여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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