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42(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9. 03:59

서배 할배42(작성자; 손진길)

 

오경자와 배설의 집에서 묵게 된 덕천 사랑방모임의 선비 5명은 자신들이 들고 온 여행용 짐을 이층의 다다미 방에서 풀고 난 다음에 아래층 응접실에 모인다. 얼마 후에 그들의 부인들이 각자 조그마한 선물보따리를 하나씩 들고서 역시 응접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 집의 안방 마님인 오경자에게 한사람 씩 자신들이 들고 온 선물들을 전한다.

조선에서 멀리 일본의 오사카까지 들고 온 그 선물들을 풀어보고서 오경자가 남편 배설과 함께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모른다. 그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일본에서 구할 수가 없었던 좋은 품질의 김과 미역과 멸치 그리고 조선의 고약과 버선과 노리개 등이 잔뜩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안성기가 갑자기 오경자의 남편인 배설을 보고서 말한다; “다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직 후쿠오카에 살고 있을 때 1874년경 당시 저와 동갑이던 소꿉친구 오경자가 19살의 나이로 오사카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때 저는 그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 성씨가 경주 배씨라고 하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제 오랜 동무의 남편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참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저의 이름이 안성기입니다. 조선의 월성 외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요”.   

배설은 지난 달부터 아내 오경자가 한 살 많은 친정오빠 오경덕의 말을 듣고서 자신에게 안성기와 장인식의 이야기를 자주했다. 그 두사람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집에 들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충청도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의 후쿠오카에서도 이웃하여 한 동네에서 자라난 참으로 친한 사이라고 자랑을 한다. 특히 안성기는 자신의 동갑내기 소꿉친구이고 장인식은  두 살 위이며 인정이 많은 동네 오빠였다고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그렇게 사전에 자세한 정보를 얻은 바가 있기에 배설이 웃으며 안성기의 손을 잡고 말한다; “제가 그때 후쿠오카에 살고 있던 오경자를 이곳 오사카로 시집오게 한 장본인 배설입니다. 당시 집안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여 결혼식을 이곳 오사카에서 가까운 친지들만 모시고 간소하게 했기 때문에 그때 제가 후쿠오카를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로부터 진작에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서야 제대로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배설이고 그때의 그 경주 배씨가 맞습니다. 허허…”.

안성기가 보기에 배설은 참으로 인상도 좋고 사람이 좋아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금년에 56살인 배설은 10살이나 연하인 안성기의 손을 잡고서 마치 오래간만에 막냇동생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기뻐한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 장인식이 한마디를 한다; “마치 오래 떨어져 지낸 형제가 다시 만난 것 같아 보입니다. 참으로 보기에 좋습니다. 배설 형님, 제가 장인식입니다. 부인되시는 오경자와는 조선에서도 그리고 일본에서도 모두 같은 동네에서 살았지요”.

배설이 안성기의 손을 놓고 이제는 장인식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말한다; “집사람으로부터 벌써 여러 번 설명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오경자의 동네오빠가 되는 장인식씨가 어떠한 분인지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자 장인식이 자신의 아내인 최순옥을 배설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시키면서 말한다; “제 집사람입니다. 경주 최씨이지요. 저희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아들은 작년에 결혼을 시켰고 딸은 20살인데 아직 미혼이지요…”.

그 말을 옆에서 남편 배설과 함께 들은 오경자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한마디를 한다; “인식이 오빠 그러면 그 따님을 우리집에 며느리로 주면 되겠네요. 호호호…”. 오경자는 그 성격이 어릴 때부터 인정이 많으면서도 시원하고 남자처럼 호탕하다. 그러한 여장부이므로 오랜 세월 남편과 함께 우동집을 그렇게 잘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은 장인식이 역시 통쾌하게 대답을 한다; “나도 그렇게 하고야 싶지만 조선과 일본 오사카가 너무나 멀어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하하하..”.

그 말을 들은 오경자가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수이겠느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가 매일같이 운행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게 인식이 오빠는 귀하신 따님의 사진을 몇 장 보내주면 됩니다. 우리 내외가 먼저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면 아들 종성이에게 보여주지요. 그리고 아들이 좋다고 하면 그를 조선으로 보내어 정식으로 선을 보도록 하면 됩니다. 그런데 뭐가 어렵습니까?”.

오경자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는 조선에서 온 10명의 사람들은 신기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든다. 조선과 일본이 그렇게 먼 거리로 느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가고 오는 여객선이 없던 시절에는 까마득히 먼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내왕을 하고 우편으로 사진도 보내고 혼사도 가능한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참으로 엄청나게 변화한 세상에 그들이 살고 있다.

오경자의 말이 씨가 되어서일까? 한달 동안 오사카와 도쿄를 방문하고 돌아간 장인식 부부가 딸 장화옥의 사진을 여러 장 우편으로 일본 오사카로 보냈더니 정말로 배종성이가 선을 보겠다고 내남 덕천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20살의 장화옥이 22살의 배종성과 부부의 인연을 맺어 그해 12월에 오사카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놀라운 역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훗날의 젊은이들의 인연을 모르는 채 그들은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오사카 일대의 관광에 나서게 된다. 그 일에 전적으로 안내를 맡아 나선 이가 바로 오경자와 배설의 하나뿐인 아들 배종성이다. 그는 10명이나 되는 조선사람들을 인도하여 3일간 오사카 시내를 구석구석 구경을 시킨다. 그리고 2일간은 교토를 방문하고 또 2일간은 나라시를 방문하여 일일이 구경을 시킨다.

경주 월성에서 온 10명의 사람들이 나라시까지 방문한 이유는 그곳이 경주의 고적지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곳 나라시를 이틀 동안 방문한 소감을 선비 최사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시의 고적들이 경주 읍내의 고적지와 매우 흡사하네요. 그런데 신라의 것들보다는 유적의 규모가 더 크군요. 하지만 나라시 사찰의 탑이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에 비하여 정교하지가 못하고 부처나 기타 조각들도 섬세한 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네요. 그 점을 보니 역시 조선의 옛날 삼국에서 일본으로 문화와 문명이 전수가 된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역시 경주와 월성의 고적과 유적을 잘 알고 있는 그들 모두가 선비 최사권의 말에 고개를 끄떡인다.

교토를 방문한 소감을 안성기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가 가장 감명을 받은 곳은 교토 대학입니다. 그 규모도 상당하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그것을 능가하고 있는 그 과학과 학문의 수준이 눈부신 것 같습니다. 우리 조선도 그러한 대학을 세우고 젊은 인재를 키워내어 학문과 과학의 수준이 국제적으로 경쟁을 할 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미래를 열어가자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그 말을 듣고서 장인식이 가장 크게 공감하고 있다. 신학문 선생의 입장에서 그도 그것이 정말 부러운 모양이다.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는 지주 최사권과 김춘엽 그리고 서배 아재 손상훈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어떻게 자신들의 농업자본을 장차 산업자본으로 바꾸고 대학까지 설립하여 운영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또한 그것이 가능한 일일지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훗날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조선 제일 갑부인 호남의 10만석지기 김씨 가문의 후손들이 또한 경주의 만석꾼 교리 최부자의 마지막 가주가 그 실천에 나서게 된다.

오사카를 3일 동안 구석구석 관광하면서 그들은 오사카 성채의 특이한 점에 놀라게 된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국내에서 얼마나 전쟁을 자주했으면 그 성채에 해자가 그렇게 넓고 크며 다리를 통과하여야 겨우 성문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건축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벽의 성루가 상당히 높다. 그곳은 마치 탑과 같은 망루이다. 그리고 성의 중심에 있는 높은 성곽도 일종의 전쟁지휘소와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전쟁을 대비하여 지어져 있다. 그에 비하여 조선의 성들은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고 전투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그와 같은 역사의 차이를 오사카 성을 관람하고서 확실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오경자 부부의 저택과 비슷한 이웃집들을 보면서 일본식 집의 특징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난방에 있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지은 집들이다. 지금은 계절이 아직 여름이라 크게 춥지가 않지만 겨울이 되면 분명히 상당히 추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붕의 경사가 제법 심한 것으로 보아 일본 열도에는 비가 많이 오는가 보다.  

아직 조선의 경주와 월성에는 일본식 집이 없던 시절이라 그들은 그 주택의 차이에 자꾸만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집의 구조와 건축양식에 있어서는 일본에서 배워올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것이 그들이 느끼고 있는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굉장히 적은 양의 식사 곧 소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산천이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서 그런가 보다. 평지가 적다가 보니 먹을 거리가 부족하여 일본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적게 먹고 사는 것으로 그들이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돼지고기와 닭고기도 귀하고 그 대신에 생선을 많이 먹는 민족이다. 일본의 무신시대가 1868년 명치유신 이전까지 수백 년 동안 오래 계속이 되었다고 하더니 사무라이들이 백성들의 먹고 사는 식단까지 엄격하게 역사적으로 통제를 한 모양이다.

그와 같은 현격한 조선과 일본과의 차이를 오사카 일원에서 발견하며 크게 느끼고 있는 자들이 자기돈으로 조선에서 온 10명의 손님들이다. 그들이 열흘 정도 체류한 오사카를 떠나서 도쿄를 방문하게 되면 또 어떠한 차이를 발견하게 될까?

일단 지금까지 그들이 오사카 일대를 시찰하면서 모두 인정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 조선과 비교할 때 굉장한 선진국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지난 30년 동안 그 정도로 발전하고 있을 때에 조선의 왕실과 조정은 과연 무엇을 한 것일까? 그리고 조선의 백성들은 어떻게 그렇게 일본의 변화에 대하여 까맣게 모르고 살아간 것일까?

한마디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그리고 청국만을 대국으로 섬긴 조선이 참으로 어리석고도 한심한 나라라고 하는 생각을 그들은 결코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대주의 정책이 정치적으로 편리한지는 몰라도 종주국인 대국이 몰락을 할 때에는 함께 무너진다고 하는 사실을 조선사람인 그들이 개화와 근대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제서야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