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40(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8. 08:39

서배 할배40(작성자; 손진길)

 

1898년 말부터 1901년 사이에 대한제국이 실시한 주요한 정책은 세가지이다; 첫째, 고종은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1899년 12월에는 만민공동회를 불법이라고 선포한다. 그 이유는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열어 그동안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자고 계속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이 그러한 민주적인 개혁을 싫어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고종에게 입헌군주제가 아니고 전제군주제를 하는 것이 낫다고 그 편을 들어준다. 그러한 일본의 깊은 속셈을 모르고 고종이 그만 독립협회를 해산하면서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한다.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모임을 불법화하고 만다. 그것으로 대한제국이 망하지 아니하는 한 조선에서 백성들이 민주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물 건너가게 된 것이다.

둘째, 1899년에 경인선 철도가 개통이 되고 1900년에 한강철교가 완공이 된다. 그리고 1902년에는 경인간에 전화가 개통이 된다. 그것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근대화가 무엇인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상징들이다.

참고로, 대한제국은 청국으로부터 조선이 완전히 독립을 하였다는 표시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1897년 11월 20일에 독립문을 세운 바가 있는데 이제는 고종이 조선의 독립과 자주적인 근대화에 앞장을 서고 있다는 인상을 백성들에게 강하게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독립문을 세우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단체는 서재필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이다.

셋째, 고종은 전제군주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1899년에 원수부를 신설하여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을 완전 장악한다. 대원수가 고종 황제이고 원수가 황태자이다. 대원수인 고종이 군사적 실권을 갖고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1899622일부터는 서양식으로 만든 대원수의 군복을 고종이 아예 평상복으로 입고 있다. 참고로, 그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아래와 같다;  

여기에 더하여 사실은 고종이 1900년부터 단발령을 다시 강력하게 실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내적으로 저항이 만만하지가 않다. 그래서 대신들부터 그리고 해외시찰을 다녀오는 신하들부터 단발을 하도록 조치를 하고 있다. 더구나 신식학교에 입학을 하자면 단발을 해야만 한다고 규정한다. 그에 따라 보수적인 가문에서는 아예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아니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하게 된다.

그와 같은 시행착오가 나타나는 가운데 무정한 세월은 자꾸만 쉬지않고 흘러간다. 그래서 1900110일에는 손상훈의 양자인 손영주의 생부 손찬이 그만 48세의 아까운 나이로 별세를 하고 만다. 손상훈은 17살인 손영주를 데리고 문상을 다녀온다. 삼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산소는 가까운 선산에 섰다.

문득 1901년 여름이 되자 갑자기 충청도에 살고 있는 신학문 선생 오경덕이 다시 내남 덕천 사랑방모임을 방문한다. 1898년 말에 방문을 하고 돌아간 지 꼭 1년 반이 지난 시점이다.

오경덕이 사랑방모임을 다시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여전히 두 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사랑방에 모이고 있는 서배 아재 손상훈과 선비 최사권 및 장인식 그리고 서배 마을에서 온 김춘엽과 안성기는 그 점이 상당히 궁금하다. 그래서 모두들 오경덕의 입을 쳐다본다.

오경덕이 입을 뗀다; “제가 오늘 찾아 뵌 것은 인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1년 반 전에 손병희 선생을 모시고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에 참으로 큰 신세를 졌습니다. 그 덕택에 손병희 선생은 무사히 청국으로 건너가서 그 신분을 숨기고 그곳의 문물을 자세하게 살필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안경장수처럼 변장을 하고 가명을 사용하면서 은밀하게 행동을 했는데 그만 조선정부에 그의 청국활동이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국에 그의 망명을 허락하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손병희 선생은 청국에서 어떻게 된 것일까? 모두들 궁금하여 오경덕 선생의 입을 계속 쳐다보자 그는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손병희 선생은 청국을 떠나서 이제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계십니다. 마침 일본에는 저의 누님과 누이동생이 각각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도움을 받아 대판과 동경에서 활동을 하고 계시지요”.

서배 아재 손상훈과 선비 최사권 그리고 김춘엽은 오경덕 선생의 누나와 여동생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처음 듣는다. 그래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신학문선생인 장인식과 안성기는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이다. 그들은 동향인이며 일본에서 함께 10년간 살다가 돌아온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인식이 먼저 묻는다; “그래 경덕이, 오문자 누나와 오경자 누이는 일본에서 잘 살고 계시는가?”. 오경덕이 즉시 답을 한다; “모두들 잘 살고 계십니다. 문자 누나는 동경에 사시고, 경자 동생은 대판에 살고 있지요. 그들이 손병희 선생의 활동을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안성기가 말한다; “거참 잘 됐네요. 저도 문자 누나와 제 동무 경자가 갑자기 보고 싶군요”.

오경덕이 안성기의 말을 듣자 빙그레 웃으면서 답을 한다; “내가 이번에 일본에 들어가면 문자 누나와 경자 누이에게 자네의 그 말을 반드시 전해 주겠네. 염려 말게나”. 그 말을 듣자 좌중의 5사람이 깜짝 놀란다; “오경덕 선생도 일본에 들어가고자 하는 겁니까?”.

오경덕은 주저함이 없이 단호하게 답변을 한다; “, 지난 번에 손병희 선생을 모시고 왔을 때에 일주일 이상 여기서 토론을 하면서 모두들 선진문물을 시찰하기 위하여 일본을 다녀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손병희 선생이 먼저 출발을 했으니 이제는 제가 다녀올 차례이지요. 그 다음은 여러 선비님들의 차례가 아닙니까?”.

어려운 해외시찰에 대하여 오경덕은 심히 당연하다는 듯이 참으로 쉽게 말을 한다. 하기야 쇠뿔도 단김에 뽑는다고 그렇게 일을 저질러야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할 것이다. 매일같이 노심초사만 하고 이것저것 저울질을 하다가 보면 무심한 세월만 축을 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크게 고개를 끄떡이면서 구체적인 일본방문 계획을 차제에 한번 짜보고자 한다.

언제쯤 준비를 하여 출발을 하는 것이 좋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오경덕 선생이 확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제가 일본을 방문하고 있는 시기에 맞추어 오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제가 여행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저도 일본에 그리 오래 체류할 수는 없습니다. 한 두서너 달 머물다가 다시 고향 충청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처자식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경덕 선생은 내일 부산으로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달쯤 후에는 모두들 자신이 머물고 있는 누나와 여동생 집으로 방문을 하면 된다고 알기 쉽게 말한다. 특히 일본에 자신과 함께 십년이나 살아본 경험이 있는 장인식과 안성기가 있으므로 찾아오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첨언을 한다.

그렇게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덕천 사랑방모임의 식구들에게 일본을 방문하는 길이 열리고 있다. 그들이 그 말을 다음날 안식구들에게 전했더니 남편들보다 먼저 일본을 방문하고 싶다고 나선다. 모두들 일본의 선진문물이 어떠한지 한번 꼭 보고 싶은 것이다. 개화의 시대 근대화의 걸음을 처음으로 떼고 있는 조선의 백성들은 그것이 엄청 궁금한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모두들 매 주말에 덕천 사랑방에 모여서 일본방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짜느라고 바쁘다. 그 결과 1901년 여름이 끝나기 전에 그들이 일본땅을 밟게 되는 것이다. 처음 도착한 곳이 조선에서 가까운 후쿠오카 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