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37(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8. 08:26

서배 할배37(작성자; 손진길)

 

10. 대한제국 시대와 너븐들 사람들

 

1896년 2월 11일부터 고종이 조선의 궁궐을 버리고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공관에 가서 공사 베베르가 지휘하는 러시아 군대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기거를 하고 있자 국내외에서 크게 보아 두가지의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얼마나 일본의 강압과 위협이 심했으면 조선의 왕이 견디지를 못하고 러시아군대가 지키고 있는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하여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겠느냐?는 동정론이다. 그것은 1895년 10월에 일본의 낭인들이 조선의 궁궐을 침입하여 민비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기에 단번에 이해가 될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로, 아무리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국의 왕이라고 하면 그렇게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비판이다. 그것은 나라를 지켜야만 하는 군주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염치와 체면도 없이 버젓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선의 왕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너무 오래 청국의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청국이 일본에게 패하고 일시에 조선을 떠나게 되자 그만 공황상태가 되어 그러한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러시아공관에 피신하고 있는 고종의 운명과 조선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주제를 가지고 1896년 말에 덕천 최사권의 사랑방에 모인 5사람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일본에서 십대 시절 신학문을 공부한 바가 있는 장인식과 안성기의 견해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다. 그 두사람의 분석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에 의하여 청국이 완전히 패전을 하고 조선의 땅을 일시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방패막이 사라진 조선의 고종이 이제는 러시아의 황제인 ‘짜르’를 의지하고자 한양에 있는 러시아공관으로 피신을 한 것으로 본다.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일본의 정치인들도 그렇게 판단을 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정치적인 흐름을 잘 읽고 그 정세판단이 상당히 예리한  서배의 신학문 선생 안성기의 의견이 탁월하다. 그는 조선을 집어삼키고자 하는 일본의 전략에 대하여 그가 예견하고 있는 수순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러자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떡인다.

일본이 장차 조선을 합법적으로 합병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안성기가 벌써 예언을 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살을 붙여 보면 실제로 향후 15년간의 조선의 역사가 그러한 것이다;

첫째, 일본은 조선의 왕이 다른 나라 공관에 도망을 가서 지내고 있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수치라고 하는 공론을 한양에 주재하고 있는 여러 공관의 외교관들에게서 나오도록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조선의 왕을 자신들의 공관에 숨기고 있는 러시아의 행위를 비겁하고도 이기적인 것으로 규탄해야 한다. 그것이 일본의 첫번째 책략이다.

둘째, 조선의 국왕이 청국의 황제나 러시아의 ‘짜르’ 또는 일본의 천황과 동등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국내외에 천명하게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일본이 재정을 지원해서라도 조선의 왕을 황제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황제의 나라가 되면 국제적으로 자주독립국의 지위를 보장받게 되는 것으로 고종이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일본에게 유리하다.

셋째, 조선의 황제인 고종이 일본과 협정을 맺고 조선의 통치를 위임한다고 하면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되도록 앞으로 정치적인 공작을 해야 한다. 먼저는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일본의 군대가 조선의 국방을 대신해야 한다. 그리고 국제적인 교섭을 조선의 조정을 대신하여 일본의 관리가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넷째, 그 일을 방해하는 나라는 전쟁을 통해서 무찔러야만 한다. 특히 ‘3국간섭’의 주동자인 러시아의 세력을 조선반도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서구의 열강 및 미국과는 서로 식민지를 나누는 협약을 추진해야 한다. 그것은 구미 열강과 러시아를 분리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조선과 만주를 차지하는 대신에 일본은 다른 열강들이 가지고 있는 식민지나 앞으로 가지려고 하는 식민지를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당장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고종과 왕세자가 단 일년만 러시아공관에 머물고 다시 궁궐로 돌아온 것이다. 그동안 조선의 조정대신들이 고종의 결재를 받기 위하여 러시아공관으로 매번 들어서는 것이 자신들의 눈에도 또한 다른 나라 외교관들의 눈에도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대신들이 고종에게 다시 궁궐로 환궁하시라고 적극 권하게 된다.

더구나 조선의 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기 위하여 러시아공관을 들어서게 되는 타국의 신임공사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일국의 왕이 궁궐이 아니라 외국의 공관에서 지내고 있느냐고 하는 지적이다. 세계의 역사에 있어서 그러한 선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국제적인 망신을 고종이 조선의 백성들에게 톡톡히 안기고 있는 것이다.

고종은 뒤늦게야 자신의 판단이 매우 소인배의 것이며 국제적인 상식에 크게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본이 조선의 궁궐을 침입하고 민비를 살해하였기에 왕인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외국공관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 국내외적으로 널리 인식이 되었을 것이니 그것으로 만족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판단을 한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일년만인 1897년 2월 25일에 환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공관에 신세를 지는 동안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엄청난 이권을 챙기고 있다. 첫째는 조선의 자원을 차지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압록강 유역의 산림을 채벌하는 권리는 물론 함경도 경원과 종성의 광산을 채굴하는 권리 등이다. 둘째는 장차 조선을 지배하기 위하여 러시아는 극동과 조선을 연결하고자 한다. 우선 전신망부텨 연결하고 나중에는 철도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이권획득을 바라보고서 서구 열강들이 자신들도 이권을 챙기겠다고 야단들이다. 고종이 나약하게 보이고 조선이 힘이 없기에 조선의 자원을 그들이 함부로 탐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국제사회는 냉정하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몰염치한 일도 서슴지 아니하고 저지른다. 한마디로, 약하게 보이면 그때부터 약소국은 산업선진국의 식민지가 되거나 착취와 약탈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현실을 세월이 지날 수록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자들이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인 고종과 조정대신들은 그러한 데까지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극소수 그러한 의식이 있는 신하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힘의 한계를 느끼고 일찍 사직을 하고 만다. 그러니 조선의 자원이 계속 남의 나라에 넘어가고 있다.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은 조선의 산림이 훼손이 되고 광물자원이 외국인들에 의하여 채굴이 되고 마는 것을 참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자신들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누려야만 하는 자원을 외국 강대국들에게 빼앗기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항변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떻게 백성들의 안위와 재산을 지킨다고 하는 국왕과 조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고 왕실과 조정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내남의 시골 양반들도 시국을 그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고종은 그러한 의식이 없는 것만 같다. 그는 조선의 산천과 자원이 모두 왕의 개인 재산인 줄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것을 조금 외국에 주고 그 대가를 받아서 왕실이 잘 살고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조선의 강토와 자원이 모두 백성들과 그 후손들의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고종은 아관파천 일년 동안에 개인적으로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일단 친일파의 인사 가운데 5명을 역적이라고 발표를 하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서 그들을 살해한 것이다. 김홍집과 정병하 그리고 어윤중 등이 역적으로 몰려서 살해가 되고 만다. 다행히 유길준과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피신하여 죽임을 면한다.

김홍집이 살해가 되자 고종은 아관파천의 공을 세운 친러파 이범진과 이완용은 크게 중용하면서 동시에 친미파인 박정양을 신임하여 내각을 꾸미도록 한다. 그것은 일종의 탕평책이다. 그리고 새로운 조정에게 민심을 수습하라고 지시한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비로소 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는 의병들의 항쟁에 대하여 그 죄를 묻지 아니하고 대대적으로 죄인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책을 실시하게 된다.  

환궁을 한 고종은 그해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의 황제로 취임을 한다. 청국의 황제나 러시아의  ‘짜르’ 그리고 일본의 ‘덴노’처럼 자신의 위를 높이고 조선이 제국이 되면 국제사회에서 자주독립국이 되고 그 지위를 당당하게 보장받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다. 국력과 군사력이 뒷받침이 되지 아니하면 황제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청국처럼 침탈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현실을 청나라의 사례에서 전혀 배우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종은 그러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인가? 두가지의 요인을 손꼽을 수가 있다; 하나는, 러시아의 영향이다. 아관파천의 영향으로 고종은 러시아 고문의 견해를 신임하고 조선의 군대도 러시아의 무기를 사용하며 그 편제마저 러시아처럼 바꾸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고종을 황제로 승격시키고 조선의 자원을 쉽게 황제사이의 협정을 통하여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도 러시아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노리고 있는 그것이 바로 일본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고 있다. 어리숙한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대등한 조약이라고 말하면서 아주 합법적으로 조선의 자원과 권리를 집어삼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과연 어느 범에게 삼켜지는 사슴이 될 것인가? 그것은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난 다음에 노골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한 조짐을 진작에 예견한 인물이 바로 덕천 사랑방 모임의 기재인 안성기이다. 그의 예언이 거의 맞아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서배 아재 손상훈과 김춘엽 그리고 선비 최사권과 장인식은 참으로 깊은 고뇌 가운데 대한제국의 앞날을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고종이 스스로 황제가 되고 조선을 ‘대한제국’이라고 부르며 연호를 ‘광무’라고 선포하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것으로 자동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신장이 되고 군사력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데 열국들 앞에서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으니 그것이 심히 딱한 노릇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