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38(작성자; 손진길)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조선의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한다. 그날은 민비가 일본의 낭인들의 손에 살해가 된 1895년 10월 8일로부터 따지면 꼭 2년 5일째가 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고종은 차제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민비를 ‘명성황후’로 부르도록 추존의 황명을 내리게 된다.
고종이 ‘칭제건원’을 한 시기는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는 국제적인 여론이 발생을 하고 또한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미묘한 때이다. 그러므로 고종은 나름대로 점진적 성격의 개혁을 일부 추진하게 된다.
예를 들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세수를 확대하고 근대적인 토지소유의 관계를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훗날 1908년에 설립이 되는 일본의 동양척식회사가 조선에서 개인등기가 안되어 있는 토지를 전부 차지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만다. 그렇다고 보면 그것은 일본에게 어떻게 조선의 토지를 빼앗고 일본인을 조선 땅에 심을 수 있는지 그에 대한 일종의 영감을 주고 있는 잘못된 정책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고종과 새로운 내각이 근대적 공장과 회사의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완전히 조선의 황실이 중심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산업근대화가 제대로 추진된 것이 아니다. 다만 백성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교를 일부 설립한 것과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좋은 정책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를 양성하고 간도와 연해주에 있는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간도관리사를 파견하였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내용의 ‘광무개혁’은 어디까지나 전제적인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근대적인 주권국가를 만들고자 시도한 정책들이다.
따라서 서재필의 독립협회나 최시형의 동학운동이 요구하고 있는 근대적인 민권의 확립과 민주주의 개혁의 내용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그에 따라 고종은 자신의 정책을 사사건건 비판하고 있는 서재필과 최시형을 제거하고자 한다.
더구나 조선의 보수적인 사대부들이 그 정도의 ‘광무개혁’의 내용도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있으며 일본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도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화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종의 그 정도의 최소한의 개혁도 서구열강들의 비협조로 그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시기 1898년 말에 내남 덕천 최사권의 사랑방모임에 귀한 손님이 두 사람 찾아온다. 한 사람은 1893년에 충청도로 이사를 간 바가 있는 신학문 선생 오경덕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오경덕이 외가 쪽으로 자신의 동생뻘이 되는 ‘손필’이라고 소개를 한다.
모두들 오랜 세월 자신들의 사랑방모임의 동지였던 오경덕이 그렇게 소개를 하므로 일체 의심을 하지 아니한다. 그 대신에 오경덕의 그동안의 소식이 궁금하여 그의 입만 쳐다본다. 오경덕이 조용하게 입을 뗀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5년전에 저희 가족이 내남 양삼마을에서 충청도 보은에 사시는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참으로 다사다난한 일들을 그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경덕이 지나간 세월을 잠시 회상하는지 말을 못하고 숨을 고르고 있다. 이윽고 그는 매우 간략하게 요점만 전하고 있다; “먼저 보은에서 동학교도들이 총궐기를 하지요. 처음에는 1864년에 억울하게 처형을 당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해 달라고 조정에 요구하는 궐기대회였지만 나중에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일본 등 외세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물리치라고 하는 외침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다음해부터 동학농민운동이 호남과 충청권에서 대대적으로 발생하고 말지요”.
거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오경덕이 자신의 신상이야기를 한다; “저의 모친이 밀양 손씨입니다. 그런데 충청도 청주 일원에는 외가의 친척들이 상당히 자리를 잡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 손병희의 집안과 교류를 하게 되었지요…”. 그 교류의 결과가 어쨌다는 말인가? 모두들 궁금하여 오경덕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손병희는 저보다 6살이 연하인데 그의 조카와 함께 동학에 가입하여 동학농민전쟁에 관여를 하게 되지요. 그는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어 1897년 말에는 제3대 교주가 됩니다. 그런데 고종이 광무개혁을 한다고 하면서 조정의 정책에 사사건건 비판을 하고 있는 동학의 지도자들은 물론 독립신문의 발행자인 서재필을 탄압합니다. 그 때문에 현상금이 두둑한 최시형 교주는 밀고로 잡혀서 1898년에 그만 한양으로 압송이 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지요. 서재필은 1898년 5월 13일에 미국으로 추방이 된 것으로 전해 듣고 있습니다”.
참고로, 서재필은 만 18세에 과거에 급제를 한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만 20세의 나이로 조선의 신식군대를 이끌고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하였으나 그것이 ‘3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피신한 후에 미국으로 망명하고 만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의 실시로 신원이 회복이 되자 미국에서 10년간 살던 생활을 정리하고 1895년말에 귀국하여 조선의 백성들에게 민족독립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서양의 형편과 국제정세를 널리 전파하고자 진력하게 된다.
예를 들어 1896년 4월 7일에 창건한 독립신문, 그해 7월 2일에 창설한 독립협회, 1897년에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면서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고자 한 것이 그러한 노력들이다. 그러나 그는 고종의 아관파천을 반대하고 관이 주도하고 있는 개혁정책이 기본적으로 백성들의 의식의 근대화와 민족의식의 고취에 실패하고 있다고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따라서 고종의 미움을 받아 기어코 1898년 5월 13일에 미국으로 추방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한 한양에서의 서재필의 활동에 대해서 사랑방모임의 동지들인 서배 아재 손상훈과 선비 최사권 그리고 김춘엽과 장인식과 안성기가 벌써 어느 정도는 듣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경덕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가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모두들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오경덕의 입을 쳐다보면서 동시에 ‘손필’이라는 그 선비를 살펴본다. 오경덕보다 몇 살 젊어 보이는 그 사내의 모습이 아무래도 보통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태파악이 빠르고 판단이 예리한 안성기가 먼저 한마디를 한다; “경덕이 형, 아직 형 본인의 이야기는 하나도 안하고 계시네요…도대체 그래서 형님과 가족은 어떻게 됐다는 말씀입니까? 아예 그곳 충청도에서 동학교도가 된 겁니까? 아니면 다른 일로 지금 쫓기고 있는 겁니까? 여기 먼 경주 내남 땅까지 비범한 풍채의 동행과 함께 갑자기 5년만에 찾아오시니 그 이유가 저는 궁금하군요…”.
그 말을 들은 오경덕은 내심을 감출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후유’ 한숨을 한번 쉬고서 눈을 감은 채 좌중에게 말을 던지고 만다; “어쩔 수가 없군요. 저는 동학교도는 아니지만 그 사상에는 동조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모시고 온 이 분은 사실 ‘손필’이 가명이고 지금 관가에 쫓기고 있는 동학 제3대 교주 손병희 선생입니다”.
덕천 사랑방모임의 5사람은 지금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젊은 손병희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가 얼마나 비범한 사람이면 1872년에 22살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여 12년 후에는 10만명에 달하는 충청도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지휘하여 그 큰 전쟁을 치루었을까? 그리고 스승인 최시형과 함께 쫓기는 도중에도 관군에게 결코 잡히지 않고 1897년에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제3대 교주가 된 것일까?...
그러한 좌중의 궁금증을 알고 있는 듯이 손병희가 조용하지만 힘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설명을 한다; “제 본명을 속여서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별로 유명하지도 그리고 학식이 풍부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동학의 가르침을 젊은 나이에 그대로 실천하다가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한창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 이름에 비하면 참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이고 있는 그들에게 손병희가 말을 이어간다; “저는 지금 이대로는 우리 조선이 일본은 물론 구미의 열강들을 상대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운신의 폭이 별로 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저는 청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들이 수입한 선진문물을 한번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조선을 산업화하고 근대화하여 적들과 싸우는 것이 좋을지 그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잠시 말을 쉬면서 좌중을 신중하게 돌아본 다음 손병희가 말을 잇는다; “그래서 저는 비록 쫓기는 몸이지만 그 일에 도움을 받을 수가 있을까 생각하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제가 신뢰하고 있는 오경덕 형님으로부터 진작에 여러 선비님들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랑방모임의 연장자 선비 최사권이 먼저 입을 연다; “잘 오셨습니다. 저희들은 밤새도록 그리고 며칠이라도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그 근대화 경륜에 대하여 여러가지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선비 최사권은 좌중에 앉아 있는 장인식과 안성기의 얼굴을 한번 본 다음에 말을 이어간다; “비록 저희들은 고리타분한 시골 선비에 지나지 않지만 이 가운데에는 벌써 일본에서 십년이나 살아본 경험이 있는 선생이 두 분이나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경덕 선생처럼 서로 이야기가 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은밀하게 요청하신 그 일에 대해서는 제게 맡겨 주시면 제가 한번 소문이 나지 아니하게 잘 알아보아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젊은 교주 손병희가 안심을 하는 눈치이다. 그래서 답을 한다; “고맙습니다. 단번에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시니 도량이 넓으신 선비로 보입니다. 아무쪼록 며칠간 제가 염치 불구하고 이곳에서 신세를 질 테니 잘 돌보아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선비 최사권이 빙긋이 웃는다. 좌중의 인사들도 그 깔끔한 대화를 보고 들으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미소를 띤다.
모처럼 의기가 서로 통하는 조선의 사내와 선비들이 만났으니 어찌 반갑고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낙이 본래 그런 것인가보다. 구한말 토끼와 같이 연약한 조선이 어느 범의 아가리에 들어가게 될지 모르는 그러한 난세이지만 1898년말 시골 내남에서는 그렇게 뜨거운 선비들의 의기투합의 장이 훈훈하게 마련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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