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36(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8. 08:24

서배 할배36(작성자; 손진길)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간에 종전협정이 체결이 됨으로써 청일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난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의 해상에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불란서 및 독일과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해 오자 일본이 이른바 ‘3국간섭’에 굴복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일본은 그해 5월에 청국과의 강화협정으로 얻게 된 요동반도를 도로 청나라에게 반환하고 전쟁배상금을 7분의 1에 가까운 수준으로 감액하고 마는 것이다.

그 사건이 조선의 왕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에게 국제정세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한다. 청나라보다는 일본이 강하지만 일본보다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연합세력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역학관계를 잘 활용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압력을 물리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종과 민비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자주 왕궁으로 부르자 자연히 조정에서는 이범진, 이완용과 같은 친러파가 등장하게 된다. 위기를 느낀 친일파의 수장 박영효가 1895년 7월에 정치적으로 민비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가 사전에 탄로가 나서 일본으로 도피하고 만다. 그러자 고종은 어윤중을 비롯한 친일파 대신들을 내쫓고 친러파 신하들을 중용한다.

일본공사는 조선의 조정을 다시 장악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1895년10월8일 , 음력으로는 8월 20일에 한양에 들어와 있는 일본의 낭인들을 동원하여 궁궐을 침범하고 민비를 살해한 것이다. 이름하여 ‘을미사변’이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일본은 친일내각을 다시 꾸미고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고자 한다. 그해 11월에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하며 전국적으로 단발을 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그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난다.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단발의 모범을 먼저 보였지만 소용이 없다. 친일 김홍집 내각과 고종에게 실망한 조선 백성들의 마음은 돌아서지를 않는다. 일본이 자행한 민비 시해와 단발령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많은 선비와 민초들이 의병들의 활동에 가세를 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그해 4월에 처형을 당한 전봉준의 원수를 갚자는 주장도 나타나고 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대부분의 의병들이 동학농민군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백성들의 움직임을 보고서 고종이 이상한 결단을 내린다. 일본의 군대와 친위대가 지방의 의병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기회를 노려서 1896년 2월 11일에 친러파 대신들 및 러시아공사와 그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궁궐을 버리고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버린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아관파천’이라고 불리고 있는 특이한 사건이다.

일국의 국왕이 궁궐을 버리는 경우는 진실로 전쟁의 위험이 당장 코앞에 닥친 때이다. 그런데 고종은 지레 겁을 먹고 있다. 일본인들이 다시 궁궐을 침입하면 민비처럼 자신도 살해를 당할 수가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그렇게 국가의 위신을 송두리째 버리고 개인적인 보신책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백성들은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 소식을 전해 듣고서 내남 덕천 최사권의 사랑방에 모여 있는 5사람은 기가 막힌다. 자신의 신변조차 스스로 지킬 수가 없는 고종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공관으로 피신을 하고 있는 그 용렬함이 일국의 왕으로서는 벌써 자격미달인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사대주의 모습이다. 조선은 국왕마저 그와 같이 항상 대국의 힘을 의지하여 자신의 안전을 구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백성들은 어찌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힘없는 왕과 조정을 믿지 말고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과 가족과 문중과 강토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만 한다. 그 힘이 없으면 남의 종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깨달음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서배 아재 손상훈과 그의 친구 김춘엽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선비 최사권은 물론 두 사람의 신학문 선생인 장인식과 안성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시기에 김춘엽의 집안에서 초상이 난다. 80평생을 경주 웃시장에서 돼지국밥 장사를 하던 그의 조모께서 별세를 하신 것이다. 김춘엽의 부친인 김종민은 일주일 동안 식당 문을 닫았다. 그리고 경주 읍내에 있는 그의 집에서 모친의 장례를 3일장으로 치르고자 한다. 산소는 서배 마을 선산으로 정하고 있다. 그의 초상집에는 진작부터 고인의 사위인 훈장 이덕화가 부인 김옥심과 함께 와서 일을 거들고 있다. 부산 동래에 살고 있는 손녀딸 김경화도 남편 정진평과 함께 조문객들에게 재바르게 상을 나르고 있다.

김종민과 김춘엽 부자는 상주가 되어 하루 종일 조문을 받느라고 바쁘다. 그 소식을 듣고서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 4명이 한꺼번에 초상집에 도착을 한다. 그들은 함께 상주들에게 절을 하면서 조의를 표한다. 연장자인 선비 최사권이 대표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갑작스러운 모친의 별세소식을 듣게 되어 저희들도 마음이 아픕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상주가 모두 그들에게 마주 절을 할 때에 큰 상주 김종민이 인사를 한다; “이렇게 바쁘신 중에도 문상을 오시고 위로의 말씀을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저쪽에 가셔서 요기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중에 손상훈과 안성기는 남이 아니다. 손상훈의 장모인 김옥심이 상주인 김종민의 누이동생이므로 개인적으로 김종민은 손상훈의 처외숙이 된다. 더구나 손상훈의 절친이 상주인 김춘엽이 아닌가! 그리고 안성기의 입장에서는 김춘엽이 그의 손위 동서이다. 따라서 손상훈과 안성기는 조문객들이 자리에 앉아서 상을 받고 있는 그 자리에 가지를 아니하고 상가에서 바쁘게 상을 차리고 있는 곳으로 먼저 간다. 초상을 치르는 일손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 상주 김종민의 아내인 정해옥이 인사를 하면서 먼저 손상훈에게 말한다; “50을 바라보는 서배 아재는 여기에 오지 말고 편하게 자리에 앉아서 한상을 받으시는 것이 우리를 도와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하세요”. 뒤를 이어 상주 김춘엽의 아내인 이가연이 매제인 안성기를 보고서 말을 한다; “안서방도 여기에 올 생각을 말고 내남에서 오신 지주분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접대를 잘해주세요“. 마흔이 된 안성기도 일손을 돕지를 못하고 퇴짜를 맞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안성기는 손상훈의 팔을 끌고 조문객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선비 최사권 및 지주 손상훈과 자리를 함께하여 한상을 받고 마는 것이다. 그날 손상훈과 안성기는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평소 인심이 좋은 집이라 초상집에 돕는 일손이 많구나. 나도 세월이 흘러 벌써 장년이 되고 나니 이제는 초상집에서 일꾼으로 써주지도 않는구나!...”.   

초상을 치르고 반년이 지나 1896년 12월이 되자 덕천 사랑방모임에 참석을 한 김춘엽이 자기 집안의 소식을 하나 전해준다; “60이 넘으신 저의 부모님은 이제 경주 웃시장의 식당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셨습니다. 그동안 조모께서 워낙 식당일에 애착을 가지고 계셔서 꼼짝 없이 60이 넘도록 그 일을 계속하셨는데 이제는 그만두신 겁니다”. 모두들 김춘엽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 식당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가? 라고 눈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김춘엽이 이어서 설명을 한다; “저희 내외는 나이도 들었고 또한 고향의 전답을 관리하느라고 바빠서 그 식당일을 맡을 수가 없지요… 따라서 부산 동래에 살고 있던 제 누이동생 내외가 몇달 전에 경주 읍내로 이사를 왔습니다. 지금은 부모님으로부터 그 식당일을 배워서 잘 경영하고 있지요”. 모두들 ‘아하’라고 반응을 한다. 잘 처리를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춘엽의 누이동생 김경화는 1851년생인 오빠보다 6살이나 연하이다. 그녀는 동래 정씨인 정진평의 아내이다. 그들은 1876년 가을에 결혼을 하였지만 계속 자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얻고 있다. 딸 정애라가 1891년생이고 아들 정한욱이 1894년생이다. 훗날 정진평의 딸 정애라가 지주 손상훈의 양자인 손영주와 혼인을 하게 된다. 그녀가 먼 훗날 ‘봉천 할매’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김경화 내외는 경주 읍내의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면서 그 돼지국밥 집을 도맡아서 운영을 하고 있다. 모친이 돌아 가시자 김종민 내외가 국밥 집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그 식당은 딸 내외가 비법을 배워서 계속 운영하게 됨으로써 3대째 이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1897년초부터 경주 오일장에 들르게 되면 훈장 이덕화 내외와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은 정진평 내외가 팔고 있는 그 한결같은 돼지국밥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