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33(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7. 22:56

서배 할배33(작성자; 손진길)

 

9. 외세 배격의 민란을 외세의 힘으로 막다.

 

1893년 봄부터 충청도 보은에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모여서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해 달라고 조정에 탄원하는 한편 일본과 서양세력을 농민들의 힘으로 모두 물리치자고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월성 내남까지 들려오고 있다. 그들은 대표자들을 뽑아 한양으로 올라가서 궁궐 앞에서도 상소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소문을 듣게 된 안심서당의 신학문 선생인 오경덕이 안절부절이다. 왜냐하면, 부산 동래에 살고 계시던 그의 부모님이 충청도 보은지역으로 이주를 하여 그곳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일찍이 1850년대 후반에 부모님이 충청도 북부의 제천에서 살고 계시다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잠시 신학문을 접한 바가 있다.

당시 제천에는 오경덕의 외가인 밀양 손씨들이 여러 집 살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그곳으로 장가를 가서 아예 제천에서 눌러 사시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865년말부터 서학을 박해하는 조짐이 보이자 멀리 일본으로 도피를 하신 바가 있다. 1876년에 조선과 일본사이에 수교가 이루어지자 용기를 내어 부산지역으로 들어와서 동래에서 오래 사신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옛날이 그리워서 다시 충청도로 이주를 하셨는데 하필이면 그곳에서 동학교도들이 대규모 집회를 하면서 조정에 엄청난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잘못되면 그 옛날 서학을 탄핵하던 때와 같은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경덕은 걱정이 크다.

1893년 봄이 끝나갈 무렵 오경덕이 지주 손상훈을 찾아온다. 그리고 한가지 청을 한다; “형님, 그동안 서당에서 16년 세월 생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칠 수가 있어서 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충청도로 이주하신 부모님 걱정에 요즘은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1860년대 중반처럼 다시 조정의 탄압이 그곳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심히 걱정이 됩니다. 아무래도 저희 가정이 그곳으로 이주를 하여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십시오”.

이미 부부간에 확고하게 결정을 한 후에 손상훈 자신에게 통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손상훈은 1890년부터 매년 홍수가 나서 살림이 피폐해진 상태라 재정적으로 서당을 계속 지원할 여력이 자꾸만 없어지고 있는 도중이다. 따라서 그는 순순히 오경덕의 청을 받아 들이고 만다; “잘 알겠습니다. 저에게까지 사전에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떠나시기 전에 여러 동지들과 함께 덕천의 사랑방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다음날 손상훈이 덕천으로 재종 매형 최사권을 찾아가서 오경덕 선생의 신상변화에 대하여 말하자 당장 여러 동지들에게 통보를 하여 열흘 후에 모두들 만나자고 한다. 그날 저녁에 만난 사람 가운데 특히 서당에서 생도들에게 지금까지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는 장인식과 안성기가 가장 섭섭하다고 말한다. 그 두사람은 부모님이 아직도 동래 봉천마을에 살고 계시기에 오경덕과 같은 가슴앓이는 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렇게 오경덕 선생 가정을 충청도로 떠나 보내고나서 최사권과 손상훈 및 김춘엽 그리고 장인식과 안성기 등 5사람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발생하고 있는 동학교도들의 교주 신원회복 운동과 일본 및 서구의 세력을 배격하자는 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되어 나가는지를 계속 주시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조정에서는 동학교의 포교를 불법화하면서 대중집회를 엄단하겠다고 발표를 하고 있다. 그러한 강경대응에 충청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소위 동학의 북접은 주춤하고 있는데 전라도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남접은 그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회를 보아 조정과 지방의 탐관오리에 불만을 지니고 있는 농민들을 선동하여 한번 조선을 뒤집어버리려고 때를 벼르고 있다.

(음력으로 189311월에 만들어진 동학 남접의 사발통문임)

마침내 음력으로 1894년 1월에 동학교 남접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자신의 집이 있는 전라도 고부군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 군수 조병갑의 수탈이 극심하였기에 동학교도들이 앞장을 서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타도 조병갑’을 외치면서 합세를 한 것이다. 조병갑은 전주로 달아나 전라 감사에게 자신이 억울하다고 말했지만 처벌을 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조정은 그 사건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를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단 해산한 민란의 책임자를 체포하는 한편 그 책임을 전적으로 농민들에게 돌리고 만다. 그때문에 전봉준이 앞장을 서고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이 그 뒤를 따르면서 전라도에서 대대적으로 농민들의 힘으로 탐관오리를 잡아서 숙청하고 자신들이 허약한 조정을 대신하여 조선을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돌보겠다고 하는 기치를 내걸고 대규모 봉기를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소식을 접하게 된 내남 최사권의 사랑방에 모인 5인은 가장 먼저 작년에 충청도로 이주를 한 오경덕 선생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리고 여러 소작농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교리 최부자나 덕천 최사권, 그리고 너븐들의 손상훈 집안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아직도 소출의 7할을 거두어 가고 있는 여러 지주들은 문제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1894년 4월에는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이 전라 감사 김문현이 지휘하는 관군을 정읍의 황토현에서 크게 쳐부수고 한양에서 파견한 초토사 홍계훈이 지휘하는 신식군대의 선발대마저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패퇴를 시키고 만다.

승전을 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쉽게 호남의 행정중심인 전주성마저 차지를 하게 되자 다른 지역의 지주들과 조정이 큰 걱정에 휩싸이게 된다. 관군의 힘으로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의 무장세력을 진압할 수가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조선의 조정에서는 강온책을 모두 사용하기로 한다;

첫째, 초토사 홍계훈에게 전봉준을 위시한 적장들과 화해를 모색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인데 마침 전봉준이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있어서 그해 5월에 ‘전주 화의’가 성립이 된다. 물론 조정에서는 토벌군을 나중에 내려 보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 동학농민군이 해산을 하면서 호남지역에 수많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행정을 관할하는 것을 일단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조선의 조정에서 청나라에 급하게 파병을 요청한다. 그런데 청나라는 1885년에 일본과 맺은 ‘텐진 조약’에 입각하여 일본에 그 사실을 통보한다. 그러자 청나라의 군대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자 5월달에 아산만으로 들어오는 그때에 일본의 군대는 제물포를 통하여 한양으로 들어오게 된다. 청나라는 이미 전주에서 양 진영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으므로 도중에 군대를 돌려 제물포를 통하여 한양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 이미 대규모의 일본군대가 한양과 인천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2,800명에 불과한 청나라의 군대는 경인지역을 장악하고 있는8,000명의 일본군대를 어찌할 수가 없다. 그 호기를 일본공사가 적극 활용한다. 6월 하순에 갑자기 일본군대가 궁궐을 침범하여 조선의 민씨 조정을 해산하고 새로운 개혁파 조정을 세운 것이다. 동시에 음력 7월 1일에는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제 앞으로 청나라와 일본과의 전투가 조선에서 발생하게 되는 지경이 되고 만다.

여기까지의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한양에서부터 지방으로 동시에 퍼져 나가고 있다. 그 소식을 접하는 조선의 백성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덕천 최사권의 사랑방에 모인 인사들도 그 소식을 듣고 있다. 경주 읍내 향교에 다녀온 선비 최사권이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로부터 자세한 일의 전개과정을 듣고 있는 손상훈과 김춘엽 그리고 장인식과 안성기의 표정이 자꾸만 어두워진다. 조선의 운명은 이제 청일간의 전쟁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어느 편을 장차 상국으로 섬기느냐를 가름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산업근대화의 시기를 모두 놓쳐버린 조선이 근대화된 나라의 속국의 나락으로 다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사랑방에서 그 점을 논의하면서 선비 최사권은 청나라 군대가 일본군대에게 패퇴할 것으로 본다고 전망한다. 모두들 고개를 끄떡인다. 1840년 이후 청나라 군대가 외세와 전쟁을 하여 한번도 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