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30(작성자; 손진길)
8. 천석꾼 손성규의 죽음과 상실의 시대
농업소득과 상업소득을 비교하면 농업소득이 열위이다. 그리고 농업소득은 기타 산업의 제조업소득과 비교를 하더라도 크게 뒤떨어진다. 그 때문에 서구에서는 비교우위가 높은 산업으로 계속 이행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서구에서는 농업소득을 얻고자 토지를 중시하던 중세의 봉건시대가 교역을 중시하는 중상주의시대로 옮겨가고 마침내 제조업의 혁신으로 산업근대화의 시대를 이루고 마는 것이다.
그 제조업의 혁신이 유럽의 섬나라 영국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그들이 증기기관과 공작기계를 발명하여 공장제 대규모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유럽대륙의 주요국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수입하여 자신들도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따라서 서구에서는 먼저 산업근대화를 이룬 영국과 불란서가 있고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독일과 러시아가 있다.
그리고 유럽을 벗어나게 되면 아메리카의 미국이 산업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그러하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성립이 된 일본의 유신정부가 앞장을 서서 서구의 차관을 끌어들이고 서양의 산업기술을 수입하여 일본 열도의 산업근대화에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이웃나라인 조선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없다. 왜냐하면 조선은 오랜 세월 대국인 청나라를 섬기는 사대주의 사상에 깊이 젖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은 청나라의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고 조정은 청나라가 지시하는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청나라는 1840년부터 중국으로 밀고 들어오는 서구의 세력을 견제하다가 그만 전쟁에서 패하여 아편의 수입을 허용하고 각종 이권을 침탈당하고 있다. 그러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여전히 대국행세를 하고 있다. 특히 1884년에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의 정변을 청나라 군대가 분쇄한 이후에는 조선에서 상국의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다.
민씨 일족을 위시한 수구세력들이 청나라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원세개에게 잘 보이고자 야단이다. 더구나 임오군란으로 4년간 청나라 텐진에 끌려갔다 돌아온 흥선대원군도 그러하다. 그런데 그들은 한가지 모르고 있다; 청나라가 결코 조선의 산업근대화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이 산업근대화를 이루어 부강한 나라가 되면 더 이상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지 아니할 것이므로 청의 황실과 고관들이 그것을 원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대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을 하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국제정세를 읽지도 못하고 청나라의 허실을 제대로 간파하지도 못하고 있는 한심한 조선의 조정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왕인 고종부터가 서양에 대한 지식이 없다. 오랜 세월 청나라의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면서 오로지 종주국 청나라하고만 교류를 해왔기 때문이다. 청의 황제는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일체 불허하는 소위 ‘쇄국정책’을 강요하고 있다. 그 부작용이 구한말의 조선을 열강의 분쟁의 장소로 만드는 한편 승리한 나라의 식민지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두려운 문제는 그러한 사대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별로 없다. 조선의 왕가가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아니하고 시국의 탓만 하고 있다. 지도자들이 그 역사를 반성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조선의 백성들도 역사적인 사대주의 습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전통적인 사대주의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앞장을 서서 주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산업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을 조선의 조정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그것이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산업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이 성공하지를 못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1884년 갑신정변 때부터 1894년 동학혁명 때까지의 10년 세월을 허송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 상실감이 조선이 망하는 그때까지 백성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허탈감으로 자리를 잡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서배 할배 곧 손상훈은 다음과 같이 독백을 하게 된다; “우리는 왜 그 중요한 고종시대에 조국의 산업근대화를 위해서 스스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아니한 것일까?...”.
만약 1884년에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의 갑신정변이 성공을 하였더라면 조선의 미래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변은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왕궁을 침입하자 이른바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 10년간 조선은 종이호랑이 청나라를 여전히 대국으로 섬기면서 만주의 권력자 원세개의 비위를 맞추는 이상한 사대주의 사상에 빠져서 살아간다.
갑신정변이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실패하는 것을 보고서 일본공사는 재빨리 일본군대를 철수시키고 김옥균과 박영효 등 주모자들을 일본으로 도피시킨다. 그리고 조선조정과 청나라 군대에게 일본공사의 군대가 그 정변의 와중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한성조약을 맺고 일본공관은 한양에 계속 주둔을 한다.
다음해 일본측은 청나라에 더 큰 요구를 한다.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서 또 부딪칠 일이 있으면 원하지 아니하는 전쟁이 발생할 수가 있으므로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상호철군을 하자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1885년에 청일간에 그러한 내용으로 ‘텐진 조약’이 체결이 된다.
그때부터 1894년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양국에서 군대가 조선에 들어올 때까지는 무력행사가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 사이의 기간이 조선으로서는 자발적으로 차관을 얻고 산업근대화에 매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런데 그러한 호기를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황금과 같은 시간을 놓쳐버린 그 상실감이 조선을 망하게 하고 기어코 조선의 백성을 망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그와 같이 조선의 백성들이 맥없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때에 내남 너븐들에서 가장 큰 초상이 발생한다. 너븐들의 천석꾼이며 자수성가한 농사꾼 출신의 지주 손성규가 1890년 4월에 별세를 한 것이다.
1890년에 지주 손성규는 조선의 나이로 67세이다. 상처한지 6년이 지나고 있지만 그는 독신으로 살고 있다. 1884년 7월에 사랑하는 아내 이숙임을 떠나 보내고 나서 그는 회한에 잠겨서 살았다. 자신이 조상의 유지를 받들고자 50평생을 거랑가에서 돌밭을 옥토로 일구는 일에만 매어 달린 것이 아내에게 너무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농사꾼의 아내로서 알뜰하게 자신을 내조해준 고마운 조강지처 이숙임의 존재가 자신이 일군 천석의 재물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가주 손성규가 그 회한에 몸부림을 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재산관리를 일체 외아들 손상훈에게 맡겨버리고 손을 대지를 않는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상훈 내외를 위하여 한 일이 사촌동생 손성곤의 손자인 손영주를 손상훈의 양자로 들인 것이다.
그 손영주가 7살이 되는 1890년 4월에 천석꾼 손성규가 덜컥 병석에 눕고 만다. 아직 67세이다. 60이면 환갑이고 70이면 고희라고 하는 조선의 고종 시대이므로 아직 3년을 더 살아야 그 드물다고 하는 고희가 되는데 그 전에 자리보전을 하고 만 것이다.
이제 갓 마흔이 되어 장년의 티가 확실하게 나고 있는 외아들 손상훈이 부친의 병석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며느리 이채령도 근심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제 미운 7살된 양아들 손영주를 보살피느라고 사랑방에 누워 계시는 시아버지를 자주 들여다보지 못한다.
사돈이 편찮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서 아직 60이 안된 59세의 훈장 이덕화가 부인 김옥심과 함께 문병을 온다. 이웃에 살고 있는 손영주의 생부인 손찬이도 문병을 온다. 이제는 그가 재종이며 지주인 손상훈을 도와서 농사일과 소작일을 보살피고 있다.
손상훈이 근동에서 용하다는 의원을 여럿 불러서 진맥을 하고 처방을 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환자가 기력이 너무 약해져 있어서 회복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자신의 힘에 넘치게 근력을 오래 사용을 하여 사람의 진이 거의 빠졌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손상훈은 아버지가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이 되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조부인 손성익을 도와 부친 손성규는 50평생을 하루같이 거랑가의 돌밭을 전답으로 일군 사람이다. 그 일에 얼마나 기력을 많이 사용하였으면 이제 그 육신이 더 지탱을 못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자수성가를 하여 천석꾼의 살림을 손상훈 자신에게 대물림하고 이제는 눈을 감으려고 하신다.
아버지가 아주 사경을 헤매고 계실 때에 손상훈은 자신의 손가락을 칼로 베어 그 입에 핏방울을 떨어뜨린다. 그것이 죽어가는 사람의 혼을 붙들지도 모르는 마지막 처방이다. 그래서 그런지 잠시 부친 손성규가 힘겹게 감았던 눈을 뜬다. 그리고 작지만 또렷한 소리로 유언을 한다.
손상훈은 귀를 아버지의 입 가까이에 대고서 숨소리조차 내지를 않는다. 그때서야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상훈아, 애비를 위해서 슬퍼하지 말아라. 나는 진작에 너의 어머니가 없는 세상을 나홀로 살기가 싫었다. 내가 빨리 조강지처 이숙임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한 이유는 상훈이 너를 돌보아 달라고 너의 어머니가 내게 유언을 했기 때문이다…”.
자꾸만 약해져 가는 그 말을 듣기 위하여 손상훈이 정신집중을 한다; “이제 영주를 상훈이 너의 양자로 들이고 나름대로 대를 이어가게 하였으니 내가 할 일을 다한 셈이다… 너도 이제 마흔이 되었으니 이채령이와 함께 너의 시대를 한번 살아 보거라. 애비는 너희 부부가 백년해로하기만을 바란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나는 나를 기다리는 너의 어머니에게로 이제 간다…잘들 살아가기를…”.
마지막 말은 너무 약하여 겨우 손상훈이 알아 들었다. 그 말을 마치고 감아버린 천석꾼 손성규의 눈이 다시는 떠지지를 않는다. 손상훈이 부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면서 흐르는 눈물을 억누르지를 못한다. ‘커이 커이’ 목소리마저 잠겨버리는 그 통곡소리를 듣고서 이채령이가 급히 사랑방으로 달려 들어온다.
그리고 가주 손성규가 대단히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당에 모여 있던 훈장 이덕화 내외와 너븐들의 일가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주저 않아 모두들 통곡을 한다.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내남 월성 손씨의 가주이며 한평생 너븐들 농사꾼의 본이 되었던 손성규가 그렇게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디에서 그만한 지도자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인가? 그 마당에서 애곡을 하고 있는 일가와 소작인들은 마치 그들이 섬기던 조선의 왕이 죽은 것처럼 큰 상실감에 젖어 들고 만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통곡한 그날이 바로 1890년 4월 22일이다. 바야흐로 내남에서 농번기가 막 시작되고 있는 그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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