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29(작성자; 손진길)
며칠 후 손성곤이 사촌 형이며 너븐들의 대지주인 손성규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싱글벙글이다. 한낮에 방문을 하였는지라 사랑방을 차지하고 있는 가주 손성규만이 집을 지키고 있는 시간이다. 손성곤은 사랑방문 앞에서 자신이 찾아 왔음을 고한다; “형님, 저 성곤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방문 앞 디딤돌 위에 남자 신발이 한 켤레 놓여 있는 것을 보고서도 그는 먼저 자신이 왔음을 알린다. 가주 손성규가 반가운 얼굴로 방문을 열면서 말한다; “어서 오시게. 여름철 대낮이라 날이 무척 더운데 어떻게 이렇게 찾아왔는가? 빨리 들어 오시게. 방안이 시원해”. 손성곤은 방에 들어오자 마자 말문을 연다; “형님, 좋은 소식 두가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주 손성규는 좋은 소식 한가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일전에 자신이 부탁한 양자 건일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는 무엇일까? 궁금하여 손성곤에게 물어본다; “하나는 알 것 같은데…하여간 말을 해보게”. 손성곤이 대뜸 화제를 바꾼다;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절손이 된 손성벽 형님의 대를 잇게 했습니다”. 손성규가 의아하여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형님은 벌써 30년 전에 별세하시고 그 양자인 자네 아들 손상걸이도 20년 전에 죽고 말았는데 어떻게 그 가문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손성곤은 가주인 손성규가 참으로 답답한 양반이라고 생각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형님, 지금 시대는 옛날하고 다릅니다. 4년전에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민씨 일가 수구세력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들은 개화시대에 정치를 하자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나라의 벼슬을 대대적으로 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제는 돈만 있으면 양반의 족보는 물론이고 벼슬도 마음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 옛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때보다 매관매직이 더 성행하고 있지요. 그러니 개화가 되고 외국의 문물이 들어온 후 양반의 값어치가 땅에 떨어졌다 이겁니다”.
가주 손성규는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1884년 12월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개화의 의지도 개혁의 의지도 미흡한 민씨 일가가 정권을 잡고서 오로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벼슬을 팔아 제 잇속만 챙기기에 급급한 것이다. 물론 그 돈의 일부는 한양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의 관리들에게 상납이 되고 있다. 참으로 힘없는 조선의 백성들만 계속 착취를 당하고 있구나! 서구 열강이 조선의 이권을 노리고 있는데 조선의 고관들이 그토록 썩어 있으니 앞날이 참으로 걱정이다’.
그쯤 이해를 하고서 손성규가 손성곤에게 묻는다; “그렇다 치고 그것하고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좋은 일 두 가지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손성곤이 이제부터 본론을 이야기한다; “4년 전에 형수님 곧 상훈이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에 석 달 먼저 손성벽 형님의 부인께서 별세하셨지요. 그것으로 손사설 조부의 장남인 손선익 백부의 집안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집에 양자로 가서 죽은 제 아들 손상걸의 대를 잇고 그 가문을 되살리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죽은 손상걸에게 벼슬도 사주고 그 가문도 잇도록 조치를 한 것이지요”.
가주 손성규는 손성곤의 말 가운데 자세한 설명이 생략이 되어 있는 대목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그래서 더 이상 채근을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눈을 지긋이 감는다. 나라의 고관들이 돈을 받고 벼슬을 제 맘대로 팔고 또한 양반들이 한 재산 챙기면서 족보까지 팔고 있다고 하더니 그것이 자신이 가주로 있는 집안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엄청 그가 괘씸하다. 그러나 함부로 내칠 수가 없다. 일전에 그가 세 목숨이 달려 있으니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지 않았던가?...
가주 손성규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서 얼른 손성곤이 화제를 바꾼다; “형님, 그리고 제가 아들 찬이에게 잘 이야기하여 그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언제 좋은 길일을 택하여 찬이의 차남 영주를 상훈이의 양자로 데려가십시오”. 그 말을 듣고 손성규가 한마디를 한다; “내가 상훈이 내외와 이야기를 해보지. 좋은 날자를 선택하여 그렇게 하겠네. 그리고 자네 아들 찬이에게 물어보게. 우리가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는지. 논이라도 열 마지기 달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하겠네”.
그 말이 있자 손성곤이 급히 손을 좌우로 저으면서 말한다; “형님, 저나 찬이가 재물을 바라고 양자를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찬이 아들 영주가 상훈의 후계자가 되면 그 신분이 달라지는데 생가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가주 손성규가 말한다; “그렇다면 차차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을 말해 주게나. 영주도 자신의 생가가 잘 사는 것을 장차 보고 싶어할 테니까…”.
그날 손성곤이 돌아가고 저녁이 되자 가주 손성규가 아들 내외에게 말을 한다; “오늘 낮에 손찬의 부친 손성곤이 내게 다녀갔다. 찬이도 차남 영주를 상훈 너의 양자로 삼는데 동의를 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금년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좋은 날을 잡아서 영주를 너의 양자로 데려오도록 해라. 그 보답은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하니 천천히 살아가면서 네가 찬이의 집을 돌봐 주도록 하라꾸나”. 상훈이 내외도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한다.
그런데 손찬의 차남 영주를 상훈이 자신의 양자로 들이는 일이 다음해 정월 보름이 되어서야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그해 11월 16일에 영주의 조부인 손성곤이 갑자기 별세를 하고 말기 때문이다. 가까운 상신 뒷산을 장지로 삼아 삼일장으로 11월 18일에 장례를 치루었다. 하지만 철상을 하고 49제를 지내고 나니 다음해 정월 7일이다. 좋은 날을 택하니 정월 보름이 된 것이다.
그때 막 6살이 된 손영주를 손상훈과 이채령이 손찬의 집으로 가서 데리고 온다. 손영주보다 4살이 많은 그의 형 손영한은 동생이 너븐들 천석꾼 집에 양자로 가게 되니 그것을 부러워한다. 아직 철부지라서 그러하다. 자신이 나고 자라는 생가가 좋지 어떻게 양부모가 좋을까? 그러나 내남 너븐들의 일가들이 합심하여 가주 손성규의 천석꾼 살림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최선인 것이다.
그렇게 전근대적인 씨족사회의 전통이 19세기 말 개화기에 접어든 조선사회에서도 버젓이 남아 있다. 민씨 일족이 조선의 문을 열고 개화를 했다고는 하지만 제도적인 탈바꿈은 하고 있는지 몰라도 의식적인 근대화를 하기에는 아직 어림도 없다. 특히 지방의 양반이 유교적인 질서 가운데 세거부락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월성 내남 너븐들인 것이다.
1889년 1월에 가주 손성규는 그렇게 친손자를 안아보게 된다. 비록 자신의 피를 바로 받은 손자는 아닐지라도 사촌동생인 손성곤의 손자이다. 손성곤이나 자신이나 모두 할아버지가 같지 않은가? 조부 손사설의 자손들이니 손상훈의 양자인 손영주도 같은 피붙이가 맞다. 언뜻 생각하면 7촌 조카가 먼 촌수인 것 같지만 옛날에는 오래 살면 한집에서 고손자까지 보게 된다고 하니 그 촌수가 한집에서 8촌까지 뻗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결코 먼 피붙이가 아니다. 특히 이채령이는 6살짜리 손영주가 귀엽기만 하다. 자신의 배가 아프지도 아니하고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그것은 또다른 선물이다. 이제 손영주를 자신의 자식으로 잘 양육하면 그가 남편 손상훈의 집안을 계승할 것이다. 천석꾼 살림을 단단하게 잘 지키자면 손영주를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만 한다. 이채령은 그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다.
다음날 정월 16일에는 양삼마을에서 훈장 이덕화 부부가 사돈 집을 방문한다. 이채령이가 아들로 맞이한 손영주를 보기 위함이다. 이제 훈장 이덕화는 손영주의 외조부가 된다. 그리고 김옥심이는 외조모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6살짜리 꼬마 손영주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정겹다. 그렇게 1889년의 정월은 축제분위기로 너븐들에서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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