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26(작성자; 손진길)
7. 소망과 좌절의 시대
1884년은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나 내남 너븐들의 천석꾼 지주 손성규의 집안에 있어서나 잊을 수가 없는 해이다. 왜냐하면, 그해에 한양에서는 갑신정변이 발생하고 내남 손성규의 집에서는 안방마님 이숙임이 별세를 하기 때문이다. 순서로 따지면 이숙임 여사의 별세가 먼저이다. 그해 7월 7일에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그해 12월에 발생하므로 나중인 것이다.
김옥균은 나중에 ‘서배 할배’로 불리게 되는 손상훈과 같은 1851년생이다. 그는 고관인 김병기의 양자인데 어릴 때부터 대단히 총명했다. 김옥균은 1870년을 전후하여 개화사상가인 박규수의 사랑방에 출입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는 22살때부터 관운이 열려 중앙의 관계에서 크게 출세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균관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있던 김옥균이 1872년에 갑자기 실시가 된 알성문과에서 장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1414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이 있기 전까지 조선에서 실시가 된 알성문과는 특이한 중앙관료 등용문이다. 임금이 성균관을 찾아 문묘에 참배를 하고 그 자리에서 갑자기 한차례 고시를 치루어 단번에 급제자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1872년 고종이 성균관을 찾아 그곳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고시를 치루었는데 김옥균이 운이 좋게도 갑과에 급제를 한 것이다. 이름하여 알성문과 장원이 된 것이다.
22살이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장원으로 관계에 진출을 한 김옥균은 집안도 좋아 중앙관료로 출세가도를 달린다. 특히 그는 일본어에 능통하여 1882년까지 조선의 관리로서 두차례나 일본을 시찰하는 드문 행운을 가지게 된다. 또한 김옥균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국내외적으로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어 일약 일본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개화파 젊은이들의 선두에 서게 된다.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어진 김옥균은 큰 야망을 가지고 일본 동경에서 조선의 산업화를 위하여 국채를 발행하고 차관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추진한다. 실제로 김옥균은 세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1883년 6월에 고종의 국채발행 위임장을 가지고 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경에서 10개월이나 체류하면서 조선의 국채를 발행하고 차관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하였으나 실패를 맛보게 된다.
그 이유가 일본이 아니라 청국을 의지하여 조선을 근대화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친청파인 민씨 일족들이 일본공사를 움직여서 김옥균이 제시하고 있는 고종의 국채발행 위임장이 가짜라고 소문을 내어 그의 계획을 실패하도록 만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옥균은 정치적인 위기를 느끼게 된다. 동시에 수구적인 친청파 세력을 조정에서 몰아내지 아니하고서는 조선의 산업근대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고 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만다.
1884년 4월에 아무 소득이 없이 조선에 돌아온 김옥균은 수구적인 친청파를 일시에 쓸어버리기 위하여 정변의 기회를 모색한다. 때마침 1884년 6월에 월남의 북부지역에서 청나라가 불란서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에 따라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3000명의 청나라 군대의 절반이 월남전선에 투입이 되고 그해 8월에 청나라가 불란서와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를 하게 된다.
그것을 보고서 김옥균을 위시한 친일 개화파들은 정변을 일으키고자 하는 당론을 9월에 확정한다. 그 실시를 위하여 김옥균은 이번에는 사전에 일본공사와 접촉을 한다. 그리고 공사의 호위병 150명을 정변에 동원하는 한편 향후 조선의 개화당을 돕는다는 일본의 밀약을 얻어 내는데 성공을 한다. 그리고 개화파는 조선군 1000명을 정변에 동원할 수 있게 된다.
마침내 김옥균은 전격적으로 12월 4일 우정국 준공식에 모인 조정대신 가운데 수구파들을 척살하고 개화파 신정부를 수립하여 6일 오후 3시에 고종의 승인을 받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일본공사의 호위군사 150명이 조선군 1000명과 함께 개화당의 정변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그날 오후 늦게 조선의 궁궐을 공격한다.
개화파가 동원한 조선군이 전투에서 패하자 일본군이 재빠르게 철수를 하고 만다. 그것으로 김옥균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 그는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일본공사는 정변의 주모자들을 일본으로 빼돌리고 나서 자신들이 이번 조선의 정변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고종과 조선의 왕실을 지키는데 일본군사가 동원이 되었다가 일부 피해를 입은 바가 있기에 그것을 구실로 한성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공사는 계속 한양에 머무르게 된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조선의 조정에서는 급격한 개화를 부르짖는 세력들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조선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젊은 관료들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비록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이 일본공사의 힘을 빌려서 정변을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정부를 세워 강력하게 조선의 산업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그 기개와 의지만은 확고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함에 따라 그때부터는 그러한 능동적이고도 강력한 개혁주의 바람이 일어나지를 못한다. 그 대신에 청국이나 일본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왕실과 조정이 개혁을 추진하는 제도적인 모양새만 갖추는 것으로 일관하게 된다. 그렇게 국제정세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떠밀려가는 조정의 개혁이 조선백성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사로잡지는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앞두고 있는 1884년 여름에 갑자기 지주 손성규의 아내인 이숙임이 병석에 눕게 된다. 자꾸만 머리가 어지럽고 빈혈기를 느낀다고 한다. 처음에는 며칠만 잘 조리를 하면 낫겠거니 하고 모두들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달이 지나도 그 증세가 낫지를 않는다. 평소 워낙 건강한 안방마님이라 가족들이 설마 이숙임 여사가 57세의 나이에 자리를 보전하고 누울 줄은 아무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병세가 호전이 되지를 않는다. 용하다는 한의를 여러 명 불러와서 진맥을 하고 처방을 받아 구환을 했지만 낫지를 않는다. 출가한 두명의 딸들도 친정으로 찾아와서 이숙임 여사의 병세를 돌보았지만 차도가 없다. 그 모습을 보고서 지주 손성규가 갑자기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아직 며느리 이채령에게서 손주가 태어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친손자가 태어나서 대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아내 이숙임이 만약에 눈을 감아버리게 되면 그 회한을 어찌할 것인가? 시집을 와서 30년 동안 남편 손성규가 돌밭을 문전옥답으로 개간하는 일을 일편단심으로 뒷받침한 아내이다. 그 조강지처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지주 손성규에게는 없다. 그는 자꾸만 외아들인 손상훈과 며느리 이채령에게 빨리 자식을 낳도록 채근을 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매일 모친의 병세를 살피고 있는 34세의 손상훈도 가슴이 아프다. 이채령과 결혼한지 10년이나 되었어도 일점혈육이 생산이 되지를 아니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손주를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시고 모친이 돌아가실 것만 같아서 그것이 안스럽다. 마치 죄인이 된 심정이다. 그렇지만 조강지처 이채령을 두고서 자신은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다. 일편단심 아내 이채령만을 사랑하고 있는 손상훈의 마음이 그의 기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안사돈의 병세가 오래가고 위독해지자 이웃 양삼마을에서 훈장 이덕화와 김옥심이 문병을 왔다. 바깥사돈인 이덕화는 차마 안방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김옥심만 그 방에 들어가서 사돈 이숙임의 병세를 살핀다. 위독한 상태이다. 그녀는 얼른 바깥사돈 손성규를 안방으로 부른다. 손성규가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는다.
그때 안방마님 이숙임이 마지막 숨을 모아 손성규가 평생 잊지 못할 유언을 한다; “저를 친정이 있던 구왕골 앞산에 묻어 주세요. 그곳에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는 길지가 있답니다. 훗날 당신과 나의 가문을 번성하게 하는 자손들이 태어날 거예요. 한평생 자수성가한 당신의 아내로 살게 되어 저는 행복했어요. 여보, 먼저 갑니다. 당신은 좀더 상훈이를 돌보다가 나중에 오세요…”.
손성규는 가슴이 아파서 사랑하는 아내 이숙임의 약해져 가는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갑자기 대성통곡을 한다. 그 모습을 힘없는 눈으로 겨우 보고 있던 이숙임이 눈물을 흘리며 스르르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만다. 그것이 이 세상을 떠나는 이숙임 여사의 마지막 모습이다. 다시는 남편 손성규가 불러도 대답이 없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언제나 기쁘게 연기를 마셔가며 부엌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의 밥을 짓던 그 부지런한 조강지처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가 없다. 천석지기 손성규는 갑자기 아내 이숙임이 없는 세상을 자신도 살기가 싫어 진다. 자고깨면 밤낮 돌밭을 문전옥답으로 만드는데 한평생을 바친 강철과 같은 사나이 손성규가 이미 숨을 거둔 아내 이숙임의 몸을 안고서 몸부림을 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서럽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 손상훈 내외와 안사돈 김옥심이 함께 펑펑 울고 만다. 가주 손성규가 혼이 빠져 버린 듯이 평생 하지 아니하던 넉두리를 한다; “당신이 이렇게 황망하게 떠나고 나니 내가 한평생 일군 천석의 재물이 아무 소용이 없군요. 당신이 있었기에 그 재물을 일구는 재미가 있었던가 봅니다. 이제는 내게 아무 필요가 없으니 당신이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좋은 일에 사용해 주시구려…”.
그 말을 전해 듣게 된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일가 친척들과 소작인들이 한마디씩을 한다; “내남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전답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것은 다 제 식구 잘 먹이고 입히고자 하는 일이제. 그 마음은 세 마지기를 가지고 있으나 열 마지기를 가지고 있으나 천석꾼이 되어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야… 지주 손성규와 그의 부인은 평생 그렇게 알고 함께 사신 분들이 맞지. 그들이 진짜 농사꾼이고 말고…”.
그들의 결론은 진짜 내남의 농사꾼 손성규의 아내가 이 세상을 그렇게 살다가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강지처를 의지하여 억척스럽게 농토를 만들고 농사를 짓던 지주 손성규도 이제는 마음 둘 데가 없어 한꺼번에 힘이 빠져서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아들 손상훈은 온 동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왜냐하면, 1884년 7월 9일에 모친상을 치르고 나자 구왕골 산소를 다녀오신 아버지 손성규가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변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이 더 이상 부친만을 의지하고 바깥으로 나돌 수가 없다. 집안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챙겨야만 한다. 그 책임이 무겁다. 34세에 손상훈은 그렇게 천석꾼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서 살게 된다. 부친 손성규는 그때부터 사랑방에 틀어 박혀서 아무 말씀이 없다. 그렇게 가주 손성규가 바깥출입을 하지 아니하고 아무 말이 없지만 무정한 세월은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자꾸만 이조천의 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흘러만 간다.
그래서 손상훈은 문득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너븐들의 개천물이 형산강에 흘러 들고 많은 강물과 함께 흘러 영일만에서 동해로 들어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일까? 더 넓은 바다가 그 개천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끝일까? 너븐들에서 흘러 바다로 들어간 그 물은 바다에서 하늘로 올라가 자취를 감추고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아니면 하늘로 올라간 그 물방울이 먼 훗날 빗물이 되어 다시 고향산천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손상훈 뿐만 아니라 이채령도 시부모를 대신하여 이제는 천석꾼의 살림을 살아가면서 구왕골 산지에 잠들어 계시는 어머니 이숙임 여사를 생각할 때마다 자꾸만 그런 생각에 젖어 들고 만다. 그들은 이웃으로부터 언제부터인가 서배 아지매 서배 아재로 불리게 된다. 자식이 없어도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나이를 먹게 되니 그렇게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고 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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