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25(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7. 07:51

서배 할배25(작성자; 손진길)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이 되고 조선의 부산항과 원산항 그리고 제물포항에 일본의 상선이 출입하기를 시작한다. 그 결과 그 세 항구의 인근에 왜인들의 집과 점포가 서서히 들어서게 된다. 그 가운데 일본과 가장 가까운 부산항 주변의 왜인촌이 가장 번성하고 있다.

그 다음해에 손상훈은 부친 손성규의 허락을 얻어 부산지역을 방문한다. 그 이유는 그가 1876년 가을부터 경주 일원에서 서구의 학문을 서당의 생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을 구해보았으나 허사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서양의 문물에 대하여 알고 있는 조선의 사람이 그토록 없는 것일까? 참으로 답답한 가운데 손상훈은 그해를 보내게 된다.

그러한 사위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훈장 이덕화가 어느 날 경주 오일장을 방문한 김에 친구이며 처남인 김종민의 식당을 찾아가서 그에게 묻는다; “혹시 서양의 학문에 대하여 좀 알고 있는 조선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자네 알고 있나?”. 뜻밖에도 김종민의 대답이 긍정적이다; “알고 있지. 내가 집사람으로부터 달포전에 들은 바가 있는데 부산 동래 쪽에 그런 사람들이 좀 살고 있다고 하더군. 급한 일인가?”.

훈장 이덕화는 우연히 좋은 정보를 얻게 된다. 그날 분주한 점심식사 시간이 지나자 돼지국밥 집에 손님이 별로 없다. 그때서야 남편 김종민이 아내 정해옥을 부엌에서 불러온다. 자초지종을 들은 정해옥이 그녀의 고향이야기를 한다; “두 달 전에 친정동네에 갔더니 일본에서 건너온 조선사람들이 3가정이나 봉천마을에 들어와서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모두 일본에서 10년이나 살다가 왔다고 했어요”.

희한한 이야기이다. 어떻게 조선백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10년이나 살다가 다시 돌아온 것일까? 일단 만나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훈장 이덕화는 처 김옥심의 올케가 되는 정해옥으로부터 동래 봉천 그 마을로 찾아가는 방법을 자세하게 물어서 사위 손상훈에게 전해준다. 손상훈은 그동안 선진문물에 대하여 아는 선생을 구하고자 얼마나 노심초사를 했는지 정초 그 추운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먼 부산 동래 봉천마을까지 직접 찾아가겠다고 말한다.

서로 인연이 있어서 그러한 것일까? 1877년 초에 손상훈은 동래 봉천마을에서 자기보다 젊은 청년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나이가 10살쯤인 1865년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10년간 살다가 조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충청도가 고향인 그들의 부모님들이 우연히 고향에서 천주교가 경영하는 신학교에서 서학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1865년에 대원군이 천주교를 심하게 탄압하는 것을 보고 덜컥 겁이 나서 식솔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밀항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일본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고 이제 강화도조약으로 자유왕래가 가능하게 되자 부모님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와서 동래에서 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손상훈이 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들은 그들의 이름이 고경 오씨인 오경덕, 순흥 안씨인 안성기, 그리고 인동 장씨인 장인식이다. 그들 세 사람은 아직 20대 초반의 노총각들이다. 손상훈이 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한다; “혹시 조선의 어린 생도들에게 서양말과 일본말을 가르치고 기초적인 과학지식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들 세 사람은 자신들이 일본에서 그러한 과목을 벌써 공부하였기 때문에 생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모두들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처지인지라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멀리 내남에서 부산 동래까지 도보로 찾아온 손상훈인지라 마음이 급하여 그날 세 청년의 부모님을 일일이 찾아 뵙고서 허락을 얻는다. 아직 50이 채 되지 아니한 그들의 부모들은 쾌히 승낙을 한다.

일찍이 서양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그들인지라 자신들의 아들들이 조선의 어린 생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친다고 하는 일에 매우 긍정적인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결과가 있자 손상훈이 세 청년에게 말한다; “작년 초에 일본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서 저와 뜻을 같이하는 두사람이 각각 자신들의 사재를 털어 서당에 다니는 어린 생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마침 이곳에서 오형과 안형 그리고 장형을 만났으니 제가 수일내로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이곳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때 말씀을 깊이 나누시고 저희들과 뜻을 함께하시면 좋겠습니다 ”.

손상훈의 그날 발걸음이 헛되지 않는다. 1877년 봄에 그 세 사람이 각각 내남 덕천과 안심 그리고 외동 서배에 설치가 되어 있는 서당에 신학문 선생으로 초빙이 되기 때문이다. 오경덕이 양삼에 있는 훈장 이덕화의 집에서 기숙을 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친다. 장인식이 선비 최사권의 집에서 묵으면서 생도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안성기가 김춘엽의 집에 머물면서 역시 그곳 서당의 생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게 된다.

그에 따라 1877년 봄부터 내남 덕천 최사권의 사랑방모임에 참석하는 젊은이의 수가 늘어나게 된다. 2달에 한번꼴로 그동안 손상훈과 김춘엽이 그 사랑방 모임에 참석을 하였는데 이제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선생 3사람이 추가가 된 것이다. 아직 총각인 오경덕, 장인식, 그리고 안성기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는지 모른다.

그 덕택에 최사권과 손상훈 그리고 김춘엽은 내남 덕천에 앉아서 일본에서 발생하고 있는 서양학문의 조류와 일본 열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대하여 근사한 지식을 얻게 된다. 그렇게 두달마다 한번씩 지속적으로 만나다 보니 마치 혈육과 같은 끈끈한 정이 생긴다. 따라서 총각인 세 선생의 짝을 찾아주고자 다들 열심이다. 훗날 그 영향으로 오경덕이 김춘엽의 사촌 누이와 결혼을 한다. 장인식은 최사권의 일가의 딸과 결혼을 한다. 그리고 안성기는 이가연의 여동생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시골의 양반들인 손상훈과 김춘엽 그리고 최사권이 사심이 없이 조선의 앞날을 개척하기 위하여 서당에서 신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들을 그렇게 초빙하여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데 비해서 조선의 조정은 그러하지가 못하다. 조선의 근대화에 있어서 개화파들은 개인적인 욕심이 그득한 것이다.

예를 들면,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 대신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식 관료조직과 군사조직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잘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두 조직을 사유화하여 민씨 일가의 영구적인 권력독점을 획책한 것이다. 그 두 신식조직을 새로 만들어 민씨 일족들이 완전히 장악을 하게 되면 과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처럼 오랜 세월 조선을 자신들이 다스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급히 만든 것이 신식관료제 편제를 도입한 통리기무아문이고 신식군대 별기군이다. 그렇지만 욕심에 눈이 어두운 그들이 크게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본래 제도화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진취적이고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의 의식의 수준에 맞추어 이루어지지 못하면 사상누각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선진제도를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에 가져다 사용한 것은 좋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조선 백성들의 의식의 개혁이 전무하다. 그러므로 조정의 선진제도와 아직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의 보수성향이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고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그것이 18827월에 한양에서 발생하고 있는 임오군란이다.

백성들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조선의 구식군대가 차별과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신식군대만을 키우고 있는 민씨 일족에게 일대 항거를 한다. 위기를 느낀 민비가 급히 지방으로 피신하여 보신책으로 종주국 청나라에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한다. 반면에 구식군대는 대원군을 업고서 사태를 수습하고자 한다. 그러나 진입하는 청나라 군대를 막지 못하여 주모자가 사로잡혀 처단을 당하고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가고 만다.

멀리 한양에서 들려오고 있는 그러한 일련의 사태를 내남과 외동에서 전해 듣고 있는 손상훈과 최사권 그리고 기타 젊은이들은 참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왜냐하면, 청나라의 군대를 민비가 겁도 없이 끌어 들였으니 이제는 일본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올 것이다. 그들은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서 장차 힘겨루기를 할 것이다. 누가 승리할 것인가?

그들 6명은 이구동성으로 일본의 군대가 이길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청나라는 벌써 40년전에 외세에 무릎을 꿇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조선 땅에서 일본의 신식군대와 전투를 벌인다면 승리를 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대를 앞세운 청나라의 조선 개입이란 일본의 제국주의가 조선에 진출하는데 있어서 좋은 명분을 제공하는 셈이 된다.

시골의 선비들도 알고 있는 그러한 정세를 조선의 조정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한마디로, 조선의 조정을 믿고서는 조선의 앞날을 개척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장차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선비 최사권의 사랑방에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을 하고 있는 그 6사람의 근심 어린 화두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