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27(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7. 14:59

서배 할배27(작성자; 손진길)

 

부인의 초상을 치르고 3주가 되도록 가주 손성규가 사랑방에서 꼼짝하지 아니하고 있다. 아들 손상훈 내외가 안채의 옆방에 고인이 된 모친 이숙임의 영정을 상위에 두고 매일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고 있는데 그 자리에 남편인 손성규가 한번도 참석을 하지 아니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일체 대문을 나서는 법이 없다.

때는 한여름으로 들어서는 7월 중순이라 농촌에서는 농사일이 바쁘다. 지주 손성규는 그 즈음이면 자기 소유의 논에서 벼가 잘 자라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농경지를 누비던 사람이다. 그런데 79일에 삼일장으로 부인상을 치르고 나서는 일체 내남의 농경지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자신들의 농사일이 바쁘지만 이웃에 살고 있는 사촌인 손성신과 손성곤 형제가 지주 손성규를 방문하고 있다. 그들은 가주 손성규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상실할까 염려를 하고 있다. 그래서 모처럼 지주 손성규를 만났더니 그가 딱 한마디만 하고 있다; “앞으로 농사에 관한 일과 소작에 관한 일은 나와 상의하지를 말고 내 아들 상훈이와 하세요. 종숙질간에 의논을 하기가 쉽지 않을 터이니 격을 맞추어 이제는 찬이와 섭이가 재종간인 상훈이와 직접 논의를 하도록 하세요. 저는 이제 모든 일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내남 너븐들의 천석꾼 손성규가 논밭관리의 권한을 전부 외아들 손상훈에게 위임하고 말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 마을에 두루 퍼진다. 그때부터 손성규의 논밭을 붙이고 있는 일가와 소작인들이 지주 손상훈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34세의 손상훈을 이제는 서배 아재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지주 손상훈이 노인이 되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서배 할배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게 훗날 서배 할배라고 불리우게 되면 손상훈은 아들에게 재산관리를 맡기고 부친 손성규처럼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가주 손성규는 외아들 손상훈이 있어서 그에게 전권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전답관리에서 은퇴를 할 수가 있지만 손상훈의 경우에는 그것이 안된다. 결혼을 한지 10년이 되었지만 아직 아내 이채령에게서 일점혈육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그 점을 34세에 지주가 된 손상훈이 서서히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장인인 훈장 이덕화는 밤잠을 설치면서 그 점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그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돈인 손성규의 의사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자연스럽게 손성규가 자신의 복안을 토로하도록 만들 수가 있을까? 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리저리 궁리를 거듭하던 훈장 이덕화가 자신의 이마를 탁 친다. 기가 막힌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79일 안사돈의 초상을 치르고 3주가 지나자 어느덧 7월말로 접어든다. 이틀을 더 기다린 훈장 이덕화가 81일에 작심을 하고 사돈인 손성규를 방문한다. 한여름이라 논에서 벼가 잘 자라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하여 사위 손상훈이 일찍 출타를 한 모양이다. 며느리 이채령이 아침 설거지를 부엌에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친정아버지 이덕화가 3주가 훨씬 지나서 발걸음을 하여 대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서 급히 마당으로 마중을 나간다.

훈장 이덕화는 자상한 미소로 딸 이채령을 바라보면서 입을 뗀다; “채령아 잘 지냈냐? 애비가 자주 못 와서 미안하구나…”. 채령이 너무 반가워서 명랑한 소리로 말을 한다; “아버지 아녜요. 무소식이 희소식인 걸요. 어머니도 잘 계시죠?”. 이덕화가 즉시 답을 한다; “물론 잘 지내고 말고. 우리들은 다 무탈하다. 그저 사돈의 안부가 궁금할 뿐이다. 내가 사랑방을 좀 들여다보마”.

사랑방 안에서 지주 손성규는 진작부터 마당에서 나누는 며느리와 사돈의 소리를 다 듣고 있다. 그러나 벌컥 방문을 열고 싶지는 않다. 사랑하는 아내 이숙임이 홀로 떠나간 세상에서는 이제 보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것도 없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저 소리 소문도 없는 세월만 무심하게 빨리 지나가라고 바라는 도인과 같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 바로 앞에서 훈장 이덕화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형님, 저 이덕화입니다. 방문을 안 열어 주시니 오늘은 제가 염치 불구하고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방문이 열리고 훈장 이덕화가 디딤돌에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리자 그때서야 지주 손성규가 자신의 옷 매무새를 고치면서 바로 앉는다. 방안에 들어오자 마자 훈장 이덕화가 다짜고짜 사돈인 손성규에게 절부터 한다. 황망한 일이다. 사돈 사이이므로 서로 반절만 해도 충분한 것을 참으로 오래간만에 찾아온 훈장 이덕화가 마치 처음  만난 사이처럼 그렇게 정식으로 큰 절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주 손성규가 깜짝 놀라서 자신도 엉겁결에 마주 절을 하고 만다. 그때 고개를 숙인 채로 훈장 이덕화가 나지막하게 말을 꺼낸다; “형님, 제가 죄인입니다. 아들을 생산하지도 못하는 딸자식을 형님 댁에 며느리로 들여 놓았으니 이 죄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제가 안사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친손자를 안아보지 못하시는 것을 보고서 요즈음은 밤에 잠도 설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님의 속상한 마음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부디 용서하십시오”.

손성규는 50이 넘은 사돈 이덕화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서 자신도 마음이 좋지가 않다. 사위 손상훈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보고서 사돈도 마음이 심히 상하고 있는 것이다. 딸 자식을 가진 친정 아버지가 사돈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라고 하는데 그 마음인들 오죽할까?

따라서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린 채 손성규가 훈장 이덕화를 위로한다; “허허, 사돈 그런 말씀 마세요. 아들을 어디 여자 혼자서 낳습니까? 두사람이 함께 산지 벌써 10년이나 되었는데 아직 무자식인 것은 서로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 책임은 상훈이와 채령이에게 반반씩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돈이 죄인이라고 하면 저도 죄인이지요…”.

훈장 이덕화는 따뜻한 지주 손성규의 말에 큰 위로를 얻는다. 역시 직관력이 뛰어난 천석꾼 손성규이다. 아들과 며느리 가운데 누가 문제가 있어서 무자식인지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아들 손상훈이 아내 이채령만을 사랑하고 있는데 다른 여자를 한번 취해보라고 권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해도 무자식이라면 괜히 사랑하는 두사람의 가정에 돌 만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 방법을 지주 손성규는 조강지처 이숙임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자 찾은 것도 같다. 천석꾼 재물이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재물을 반드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에게 물리고자 하는 생각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조천 최부자가 모범을 보이고 있는 그러한 방안인 것이다.

아직 훈장 이덕화는 지주 손성규의 그러한 생각을 모르고 있다. 나중에 그때가 되면 밝히기로 하고 신중한 손성규는 아직은 일체 아무에게도 발설을 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자 훈장 이덕화가 화제를 바꾸어 사돈 손성규가 사랑방을 박차고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기묘한 사안에 대하여 말을 꺼낸다; “형님, 10년 전에 숙부님이 별세하셨을 때에는 그 산소에 상석을 마련한다고 저와 함께 경주 나들이를 두번이나 하셨는데 이번에는 어째서 그러한 움직임이 없습니까? 안사돈의 무덤에는 상석을 아니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이제는 상석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제가 필체가 썩 훌륭하지를 못하여 전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듣자 마자 손성규가 깜짝 놀라면서 손사래부터 친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정신줄을 놓고 있어서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있어서 그러하이. 내일이라도 경주 읍내에 가서 적당한 상석을 주문해야 하네. 그리고 그 다음 경주 오일장에는 옛날처럼 그 돌공장에 들러 석수장이가 각자를 할 수 있도록 사돈이 한자를 써주어야 해. 나를 일깨워주어서 고마우이. 내일 나와 함께 경주 읍내에 가자고. 마침 내일이 82일이니 경주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구먼. 하지만 사돈 형편이 어떠하신지?...”.

지주 손성규는 역시 유교를 숭상하는 내남 월성 손씨의 가주이다. 이제는 상석을 주문하고 49제를 지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훈장 이덕화의 훈수에 언제 자신이 인생을 자포자기 했던가 싶게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 모습을 보고서 훈장 이덕화가 내심 빙그레 웃는다. 자신이 오늘 작심을 하고 사돈 손성규의 사랑방을 찾은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소리로 말한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얼마든지 열 일을 제쳐 놓고 무조건 동행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