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31(작성자; 손진길)
내남 너븐들의 천석꾼 지주 손성규가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는 소문이 내남은 물론 멀리 경주 읍내까지 널리 퍼지고 있다. 많은 친지들이 초상집을 찾아와서 조문을 한다. 먼 거리에서 오는 조문객을 생각한다면 오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게 초상을 오래 치를 수가 없다.
막 농번기가 시작이 되는 4월 22일에 별세를 하였기에 지주 손상훈은 농사준비에 바쁜 내남 사람들의 형편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4월 24일에 삼일장으로 부친의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그리고 장지도 비교적 가까운 박달 도진마을의 선산으로 정했다.
그 소식을 어떻게 빨리 전해 들었는지 경주 교리 최부자 집의 가주인 최현식이 4월 24일 발인이 되기 전에 오전 일찍 조문을 왔다. 그는 지주 손상훈보다 3살 연하이지만 일찍 학문을 하고 대과에 합격하여 진사의 신분이다.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이 내남 덕천의 천석꾼인 재종 매형 최사권이다. 최사권은 손상훈보다 15살이나 연상이며 경주 유림의 실력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주 손성규의 장지를 부인 이숙임이 잠들어 있는 구왕골의 산록으로 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의견도 많았지만 손상훈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는 평소 부친 손성규로부터 상주인 그가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부친의 말씀이 다음과 같았다; “상훈아, 너의 어머니가 멀리 구왕골 앞산에 가서 묻힌 것은 그곳에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는 길지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개간한 들판의 끝이 내려다보이는 박달 뒷산에 묻히고 싶다. 그곳에서 내가 상훈이 너의 천석꾼 살림이 대대로 자손들에게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으마. 우리 부부가 그렇게 내남 구왕골 산록과 박달 산지에서 자손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후대에 가서 그 음덕을 너의 자손들이 두루 입게 될 것으로 이 애비는 생각이 되는구나”.
그 말씀이 마치 그 옛날 월성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묻혀서 왜의 침략을 막고자 하신 문무왕의 유언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도 왜가 쳐들어오는 바다를 똑바로 응시하는 경주 선도산에 묻혀 계시지 않는가! 그와 같은 마음을 품고 계시는 부친 손성규의 유언과 같은 말씀이 있었기에 상주 손상훈이 부친의 장지를 박달 도진마을의 산지로 정한 것이다.
그 내심을 모르고 사람들은 그저 장지가 박달이므로 삼일장을 치루어도 충분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농사준비에 바빠지는 그들인지라 장례행사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농부의 마음까지 살피고 있는 지주 손상훈이다. 이제 바야흐로 훗날 ‘서배 할배’로 불리게 되는 지주 손상훈의 시대가 시작이 되고 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여전히 아버지를 여윈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 있는 지주 손상훈에게 일주일후 그의 양자인 손영주의 생부 손찬이 찾아온다. 그는 사랑방에서 자신보다 2살 연상인 6촌 손상훈에게 은밀하게 말한다; “형님, 이번에 고인이 되신 가주의 상석을 할 때에 비석을 같이 세우셔야지요. 그리고 제가 한번 알아볼 터이니 천석꾼으로 자수성가하신 고인의 업적에 걸맞게 조정에서 추존하는 벼슬을 하나 얻어서 비석과 상석에 금석문자로 새겨 주는 것이 장차 자손들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손상훈은 생전에 부친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상훈아, 요즈음에는 조선의 조정이 썩어빠진 모양이다. 돈을 받고서 죽은 사람에게 추존하는 벼슬을 팔아서 고관들이 재물을 모으고 사치를 즐기며 청나라의 관리들에게도 뇌물을 바치고 있다고 하는구나. 개화를 한다고 하면서 그 하고 있는 행동은 그 옛날 세도정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 참으로 걱정이다. 그러한 잘못된 세태를 따라가지 말고 우리 집안만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할 게야”.
부친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것이 최근에 시골 내남에까지 퍼지고 있는 잘못된 고종시대의 말세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큰 돈을 한양의 고관에게 바치면 조정의 이름으로 죽은 사람에게 통정대부 참판 벼슬까지 내려준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부인은 숙부인이 된다. 그리고 참의 정도의 벼슬을 사자면 더 적은 재물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지방 양반들의 재물이 한양의 고관들에게 많이 넘어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절손이 된 시골 양반의 족보를 돈을 주고 사서 그 후손으로 등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족보를 만드는 양반들이 뻔히 알면서도 서로들 한 재산 챙기면서 그렇게 족보를 팔아먹고 있으니 고종의 시대는 조정의 권위와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이다.
그러한 요지의 말씀을 하시면서 가주 손성규가 아들 손상훈에게 다음과 같이 개탄을 하신 것이다; “그것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개화의 시대라고 말하고들 있으니 문제가 많다. 그렇게 돈이 지배하는 세상, 돈이 많은 자가 고관이 되고 양반이 되어 큰소리를 치는 세상이 도래하게 되면 백성들이 축재에만 눈이 어두워 모두들 미쳐서 돌아가게 될 게야. 부정부패와 폐습이 더욱 성행하는 세상이 캄캄한 시대이지 어떻게 개명한 개화시대의 세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조정 대신들이 오도를 하고 있으니 장차 조선의 앞날이 캄캄한 게야”.
작년에 손상훈 자신에게 들려주신 부친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따라서 새 가주 손상훈이 단호하게 답을 한다; “동생, 그렇게 고인을 생각해주니 고맙네. 그러나 고인이 되신 선친의 뜻은 평소 그것이 아니었네. 그저 고지식한 천석꾼 농사꾼 답게 자신의 산소에는 상석과 석주 정도면 충분하다고 나에게 말씀하셨네. 그러니 자네가 섭섭하더라도 고인의 유지를 따라 그렇게 하도록 해주게”. 손찬은 더 이상 권할 수가 없다.
그런데 며칠 후 덕천의 천석꾼이며 재종 매형인 최사권이 너븐들로 손상훈을 찾아 와서 똑같은 권유를 한다. 그때에도 손상훈은 부친의 유지를 따라 산소에는 상석과 석주 두개 만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경주 유림의 지도자라고 알려지고 있는 선비 최사권마저 자신에게 그렇게 권하고 있을 정도이니 1890년의 조선은 도대체 어떠한 개화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인가?
지주 손상훈은 일체 돈자랑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부친의 초상을 치르고 3주가 지났을 때 장인어른인 이덕화와 함께 경주 읍내의 돌공장으로 가서 조금 큰 규모의 상석 하나와 석주 둘 만을 주문했다. 물론 일주일 후에 상석 돌이 말끔하게 준비가 되자 재차 장인 이덕화와 함께 그 석물공장을 방문하여 상석에 한자로 글을 적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는 인부를 사서 그 석물들을 운반하여 부친의 묘소에 설치를 했다.
집에서 49일 동안 부친의 위패 앞에 상식을 올린 손상훈과 이채령 그리고 손영주는 철상을 하고 산소를 찾아가 상석에 제물을 차리고 49제를 지냈다. 농번기인지라 지주 손상훈은 가까운 친지들만 그 자리에 초대를 하고 소작인들은 일체 참석을 하지 말라고 엄히 말했다. 그들은 섭섭하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이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가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상주인 손상훈이 여긴 것이다.
그렇게 새 지주 손상훈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천석꾼 살림을 여물게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이를 악물고 재산을 지키며 자손을 돌본다고 하여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부친 손성규가 세상을 떠난 다음 자꾸만 내남 너븐들과 안심 그리고 박달에서 큰 물이 난다. 거랑가의 돌밭을 개간하여 논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라 큰 물이 나면 그 일대가 작은 자갈로 뒤덮이기 일쑤이다.
형편이 그러하니 지주 손상훈은 소작인들과 함께 다시 돌을 골라내고 논을 개간해야만 한다. 그 비용이 이중 삼중으로 들어간다; 첫째, 여름에 큰 물이 지니 가을에 벼를 제대로 수확을 하지를 못한다. 긴 장마로 소출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둘째, 떠내려온 돌을 골라내고 다시 논을 개간하느라고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셋째, 수확이 적어 먹고 살기 힘들어진 소작인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 지주 손상훈의 재물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손성규가 살아 계실 때에는 매년 천석을 거두어 들이면 그 가운데 200석만 가용과 서당 운영비로 사용하고 800석은 비축을 하여 그러한 재난에 대비를 했는데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손상훈이 새 지주가 되고부터 몇 년간은 장마가 계속이 된 것이다. 그러하니 그 재산이 상당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천석꾼의 살림이 줄어들어 800석으로 내려앉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서배 아재 손상훈에게 있어서 수가의 어려움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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