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이민자(손진길 소설)

시간 이민자28(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0. 8. 3. 15:31

시간 이민자28(손진길 소설)

 

6. 과연 국란은 끝난 것일까? 돌아가는 길.

 

김상진이 성북구 중화동에서 점을 치고 있는 박창진을 만난 때가 19921월 중순이었다. 그때 김상진은 박창진에게 199912월말에 아내인 윤지혜와 함께 2020103일로 되돌아가겠다고 타임머신을 예약했다.

박창진은 재산을 지니고 타임머신을 탈 수가 없기 때문에 사전에 재산을 본래 이름인 이상우윤성혜로 바꾸어 놓으라고 김상진에게 말했다. 그리고 20년의 시차가 있으므로 이곳에서 믿을 만한 신탁회사에 재산을 위탁해 놓으라고 도움말을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김상진이 중화동에서 박창진을 만난 이야기를 아내 윤지혜에게 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다; “내 생각에는 1998년쯤 명일동 우리 부부 소유의 부동산을 팔고 다른 땅을 구입하면서 본래이름인 이상우윤성혜로 바꾸어 놓아야 하겠어요. 그리고 그 재산을 신탁회사에 맡겨 두면 좋을 것 같아요… ”.

그 말을 들은 윤지혜가 처음에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다음날 새벽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보,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더니 1998년이면 너무 늦어요. 한국의 경제위기가 제가 알기로는 1997년초부터예요. 그러니 이왕 부동산을 팔 것 같으면 일찍 1996년에 모두 처분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합시다… “.

그 말을 들은 김상진이 깜짝 놀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의 기억력이 기자인 나보다 더 좋은 것 같군요.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그러면 1996년에 명일동의 땅을 모두 적당한 값에 처분하고 재산 3분법의 원칙에 따라 이상우와 윤성혜의 이름으로 재투자를 하도록 하지요”.

윤지혜가 금방 동의하지 아니한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보, 내 생각은 조금 달라요. 1996년에 명일동의 땅을 모두 처분하여 현금화하는 것에는 찬성이예요. 하지만 재산 3분법이 아니라 약간 수정하도록 하지요. 그 이유는… “.

그 말을 듣자 김상진이 귀를 기울인다. 무언가 의미가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말이 다음과 같다; “1997년부터 경제적인 위기가 발생하여 수년간 진행이 되지요. 그러니 1996년에 재산의 3분의 1을 투자하여 안전하게 멀리 충청도 홍성군쯤에 땅을 사두도록 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이자율이 높으니 아예 25년 장기로 정기예금을 들어 놓지요. 그리고… “.

놀라운 이야기이다. 그래서 김상진이 숨을 죽이며 아내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때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나머지 3분의 1은 주식을 사지 말고 차라리 강남의 빌딩을 1997년이나 1998년에 구입하도록 하세요. 그런데… “.

놀라고 있는 남편 김상진을 빤히 보면서 윤지혜가 미소를 띄면서 말한다; “당신은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잘 지니고 계신가요?... “. 김상진이 후유라고 숨을 쉬면서 대답한다; “난 또 무슨 말이라고. 그럼요, 내가 잘 보관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이 언제 그렇게 재무관리에 도가 트여 있지요? 놀라운 일이군요… “.

그 말에 윤지혜가 방긋 웃으면서 쾌활하게 대답한다; “당신이 신문사 기자일에 바쁠 때에 저는 부지런히 재벌가의 여인들인 성순혜 사모님과 임효린 여사를 만나고 다녔답니다.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 재태크에 관한 것이지요. 더구나 저는 벌써 2020년까지 서울에서 살아보았으니 그녀들보다 재태크에 있어서는 한수 위라고 봐야지요. 그러니 이 정도야 보통이지요. 호호호… “.

그 말을 듣자 김상진은 아내 윤지혜가 대단한 복부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아예 그녀에게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전부 맡기면서 말한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 이제부터 재산을 정리하고 재투자를 해주세요. 나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보다 당신이 훨씬 유능하네요… “.

그때가 19921월 중순이다. 그런데 이제는 7년의 세월이 지나 19991월 중순이다. 그래서 하루는 저녁시간에 김상진이 아내에게 재산정리와 재투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어본다; “여보, 우리가 합의한대로 재산정리와 재투자가 모두 끝난 겁니까? 그 내역이 어떻게 되지요?... “.

그 말을 듣자 윤지혜가 활짝 웃으면서 대답한다; “물론, 작년까지 전부 처리를 했지요. 1980년말에 사둔 명일동의 땅이 엄청 값이 올랐어요. 그래서 1996년에 전부 처분하고 3분의 1을 투자하여 홍성군에 더 넓은 땅을 구입했지요. 그리고 3분의 125년 장기로 정기예금을 들어 두었어요. 게다가… “.

윤지혜가 잠시 숨을 쉬고서 천천히 말한다; “역시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강남의 빌딩들이 매물로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작년 1998년에 제가 몇 채 구입해 두었어요. 물론 모든 부동산과 예금의 명의는 이상우윤성혜입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하시지 마세요. 우리가 202010월로 돌아가게 되면 의미가 있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자금이 마련되어 있을 거예요… “.

그 말을 듣자 김상진이 천천히 말한다; “잘 알겠어요. 그런데 금년 199912월말에 우리는 20년을 건너뛰어 타임머신을 타고 곧바로 202010월의 서울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니 그 사이 비는 기간 20년 동안에는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게 되나요?... “.

그 말을 들은 윤지혜가 담담하게 대답한다; “안 그래도 그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가 은근히 성순혜 사모님과 임효린 여사에게 물어보았지요. 그랬더니 재벌가에서는 별도로 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을 회사에 두고 있었어요. 물론 비밀을 엄수하는 그러한 신탁회사가 회사 바깥에도 있고요. 그 가운데 실력이 있고 믿을 만한 신탁회사를 소개 받아서 그쪽에 일임을 해두었지요. 일단 그렇게 알고 계세요… “.

그 말을 듣자 김상진은 아내 윤지혜가 좀 생소하게 여겨진다. 그 옛날 안국동에서 67세까지 가정주부로 살아온 윤성혜가 아닌 것만 같다. 이제는 재벌가의 사모님들과 20년 가까운 세월을 어울려 지내서 그런지 재산관리에 대해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999년을 지내면서도 김상진은 재산관리에 관해서는 전부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신문사의 편집국장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렇게 한해를 지내는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일들을 재삼 경험하게 된다;

첫째로,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정책에 있어서 문외한인 전임 김영삼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으로 물려준 한국의 경제를 부도직전에서 다시 구해내기 위하여 1998225일 취임한 이후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게 된다.

급하게 처방한 것은 국제통화기금에서 최대한의 구제금융을 받고 기타 거대한 다국적 투자회사의 자본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가가 참으로 비싸게 먹히고 있다. 큰 것만 꼽아보아도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첫째, 구조조정을 한 후에 노른자위 기업을 다국적투자회사들이 합병형식으로 많이들 가지고 간다. 둘째, 한국의 은행을 국제펀드회사가 직접 지배하고자 한다. 셋째, 한국사람들에게 카드사용을 하게 하고 카드채무를 갚도록 하는데 그것이 고리인 것이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놀랍다. 외국의 빚을 갚자고 하면서 장롱에 있는 금반지까지 가지고 온다. 그것은 마치 구한말에 일제의 외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던 그때와 같다.

그러한 각오로 이를 악물고 일을 해서 그런지 1998년에 마이너스 6.9%라는 최악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더니 1999년에는 놀랍게도 플러스 9.5%로 경제가 회복이 된다. 전세계가 놀라고 한국사람들도 스스로 놀라고 있다.

어째서 그러한 놀라운 새로운 기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김상진은 2020년까지 미리 살아본 경험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첫째, 21세기형 벤처기업이 한국인의 적성에 맞았기 때문이다. 1997년말부터 국제통화기금이 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앞으로는 대기업위주의 수출이 아니라 IT산업 등 소규모 벤처기업이 한국의 경제를 견인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에 따라 김대중 정부가 IT산업육성정책에 박차를 가한다. 1999년에 빠른 속도로 전국에 인터넷이 보급되고 PC방도 크게 늘어난다. 그 결과 각종 프로그램의 개발과 게임개발의 성과가 경제적인 이득으로 일찍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해외교포들이 한국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외환위기로 한국의 부동산가격이 폭락하고 한화의 값이 바닥을 치고 있다. 따라서 여유가 있는 해외동포들이 큰 돈을 들고서 한국에 들어와 투자한 것이다. 한국경제가 빠르게 회복세로 돌아서자 교포들이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셋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국인들이 허리를 졸라맨 것이다. 19981월에 3,300개의 기업이 도산하는 것을 보고서 한국사람들이 엄청난 위기를 느끼고 있다.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실업율이 크게 늘어난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피난생활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그때처럼 생존하고자 발버둥을 친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서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라도 열심히 한다. 그러니 누가 그것을 당할 수가 있겠는가?...

셋째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1999년은 검찰조직이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상당히 받게 된다. 당시 1999년의 역사를 잘 요약하고 있는 다음의 글을 김상진이 아직도 머리속에 기억하고 있다; “연초부터 대전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고 검찰 초유의 항명 파동이 일어나더니, 유명한 옷로비 사건 터졌고, 급기야 연말에는 전직 검찰총장이자 법무부장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진다. 특히 검찰과 관련하여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이 일어나서 1999년이야 말로 검치(檢恥) 라는 별명마저 붙어버렸다”.

넷째로, 북한의 정권은 마치 일본사람들의 심성과 같은 이중성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일본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사무라이통치시대를 살아왔기에 생존하기 위하여 절대로 자신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를 않는다.

사무라이 앞에서 싫어하는 내색을 얼굴에 드러내었다가는 현장에서 즉시 목이 날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속과 겉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일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것을 속마음인 혼네 겉표정인 다떼마에라고 말하고 있다.

1999년의 북한이 그러하다. 그들은 서해에서 한국이 정하고 있는 영해인 국경선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우기면서 공공연히 침략한다. 그래서 6 15일에는 남북경비정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하게 된다. ‘서해교전또는 연평해전이라고 불리고 있는 무력충돌이다.

그리고 9 2일에는 한국이 정하고 있는 서해의 북방한계선인 NLL이 무효라고  제멋대로 주장하면서 새로운 해상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획정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김대중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를 일본에 보내어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 북한의 미사일 문제에 관하여 공조하고 협력하는 체제를 계속 유지하자고 강조한다.

그러자 북한이 한발 물러서고 있다. 그와 같은 군사적인 갈등이 증폭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연히 한국은 물론 일본과 미국까지 북한이 군사적인 우위에 서고자 핵폭탄을 제조할 것으로 판단하게 것이다.

그러면 국제기구의 사찰이 엄격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당국이 그러한 사태의 발전을 사전에 회피하고자 한다. 재빨리 남북통일농구대회 개최하는 다떼마에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로, 816일에 대우그룹 해체가 결정된다. 한국에서 2번째로 거대하다고 그 몸체를 자랑하던 대우그룹이 회생 불가능 판정을 받고서 공중분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그 가운데 쓸모가 있는 기업을 다른 관련 기업들이 인수하여 함께 살아가야 한다.  

대우그룹과 김우중 회장에 대해서는 김상진이 1980년대 후반에 벌써 국회 경제관계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송일섭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대우그룹의 주인이 김우중이라고 세간에서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어요. 실제로 김회장이 가지고 있는 지분은 너무나 적기 때문이지요... “.

당시 한숨을 쉬면서 송일섭이 계속한 말이 다음과 같다; “대우그룹은 그 오너가 사실은 한국 국민들입니다. 그들이 은행에 저축한 돈이 자기도 모르게 대우그룹에 투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국민을 대신하여 재무부가 대우그룹을 감독하고는 있지만 김회장이 독단적인 것 같아요그를 내치려고 해도 대신 경영할 사람이 마땅하지가 않은 형편이지요… “.

그때로부터 10년이상의 세월이 지났으니 국민들의 투자분이 어떻게 날라갔는지 모른다. 자신이 투자한 돈이 별로 없으니 김회장이야 손을 놓으면 그만이다. 그가 저지른 일의 뒷감당은 불쌍한 국민들이 나누어지게 된다. 그러한 생각이 들자 1999년을 보내면서 김상진은 새삼 입맛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