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72강(사57: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3월 8일(화)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메시아의 죽음, 그 뒤를 따르는 진실한 제자들의 죽음이 천국의 평안을 얻는 길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악한 자들의 비극에 대하여(사57:1-2)
본문은 짧습니다. 두 구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선지자 이사야가 전해주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는 간단한 내용이 아닙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 그 주요내용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 가도다. (2)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57:1-2);
첫째로, 제1절에서 ‘의인’은 단수이며 ‘진실한 이들’은 복수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죽음을 당하고 진실한 이들은 거두어감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1) ‘의인의 죽음’은 단수이므로 메시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미 제53장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사53:4-9). 따라서 메시아는 회개하는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속죄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실제로 그 사명을 감당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바라보는 자들은 그 마음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을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어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메시아가 세상구원과 만민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끝까지 실천하다가 의인으로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장차 마음속에 그러한 깨달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동족들이 많을 것임을 알고서 이에 본문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사57:1a).
(2) ‘진실한 이들’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거두어감을 당하게 된다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일관했던 에녹이 하늘로 데려감을 당하고 있습니다(창5:24).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는 선지자 엘리야가 요단 강가에서 불수레와 불말 그리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서 하늘로 올리어가고 있습니다(왕하2:7, 11). 그와 같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휴거를 당한 인물도 있지만 모세와 같이 별세 후에 그 무덤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신34:5-6). 유다서에서는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신을 하늘로 거두어간 것으로 암시해주고 있습니다(유1:9). 그와 같은 경우를 되돌아보게 되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이사야의 말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진실된 마음으로 한 평생 실천하고자 했던 ‘진실한 이들’은 그 영혼이나 육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거둠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사57:1b, 요5:24).
둘째로, 의인들이 악한 자들 앞에서 먼저 죽거나 하늘로 불리어가게 되는 것은 특별한 징조입니다(사57:1c).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이미 두 가지의 경우를 엿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노아의 시대에 그의 조상들이 모두 이 세상을 먼저 떠나자 홍수심판이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창5:24-31, 7:11). 또 하나는, 의인 열명이 없으므로 소돔 성과 고모라 성에 불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창18:32, 19:24-25);
(1) 노아의 증조부가 에녹입니다. 그는 365세를 살다가 일찍 휴거를 당하게 됩니다(창5:23-24). 노아의 조부는 므두셀라입니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장수한 인물입니다. 향년이 969세입니다(창5:27). 므두셀라가 별세한 때가 공교롭게도 노아 600년인데 그 해 2월 17일에 홍수심판이 발생합니다(창7:11). 만약 므두셀라가 홍수심판 시작 때에도 살아 있었다면, 의인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를 노아의 방주에 함께 들어가도록 조치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에는 사람으로서는 노아 부부와 3아들 부부만이 타고 있습니다(창7:7). 그러므로 므두셀라는 그 해 정월에 죽고 그 장례를 손자 노아가 치르고 홍수심판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계산방법은 “187(라멕 탄생)+182(노아 탄생)+600(노아홍수의 해)=969(므두셀라의 향년)”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계산해보면, 향년이 777세인 라멕(노아의 부친)은 “777-182=노아 595년”, 곧 홍수심판 5년전에 벌써 소천하고 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더불어 사람의 모습으로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거처 앞에 나타나십니다(창18:1-2). 아브라함의 극진한 식사대접을 받으신 다음에 여호와는 두 천사를 소돔 성으로 먼저 보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등지에서 죄악이 넘쳐나고 있으므로 실태파악이 되는대로 멸망시켜버리실 계획이라는 것입니다(창18:20-21).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살고 있는(창13:12-13) 장조카 롯의 가족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창18:23). 하나님께서는 옥석을 구별한 다음에 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등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의인 50명만 있어도 용서해달라고 건의합니다(창18:24). 하나님의 긍정적인 응답을 받았지만 그 의인의 수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그 수를 줄여가면서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 결과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확답을 받게 됩니다(창18:32). 아브라함은 안심합니다. 자신과 같은 의인 열명이 그 크고 번성한 성읍에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의 예상은 빗나가고 맙니다. 실제로 의인 열명이 없어서 10만명 정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큰 성들이 불 심판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창19:24-25).
(3) 그러므로 의인의 존재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 성읍이 보전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악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모조리 일찍 소천하고 있다고 한다면(사57:1c)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신호입니다. 그만큼의 의인이 빠른 속도로 충당이 되지 못하는 한 그 성읍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한 가지 기억해야만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일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의 기습을 받게 됩니다(출17:8). 그때 의인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서 전장을 내려다보면서 두 팔을 하늘로 들고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를 합니다(출17:10-11). 그 결과 승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피곤하여 그 팔을 내리게 되면 어김없이 패전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의인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읍의 주민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할 때에 그 중보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신앙을 보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전쟁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방법론입니다.
셋째로, 본문 제2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57:2).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이 세상에는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개인적으로 사람의 육신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중에 병들고 늙어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불완전하고 유한한 육신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창4:26, ‘에노스’의 의미임) 어떻게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불안합니다. 기본적으로, 재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살기다툼이 치열합니다. 그리고 힘으로 약탈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 세상에서 안전과 평안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영생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코 이 땅에서 그와 같은 불안한 삶을 계속 살아가라고 강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제3장 말미를 보면 하나님의 그 뜻이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부부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상태로 생명나무의 실과마저 따먹고 ‘저주 가운데 영생’ 하도록 결코 방치하지 아니하십니다”(창3:22-24). 따라서 하나님과 평생 동행한 에녹에게는 휴거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역시 하늘로 올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도 부활한 다음 베다니 앞에서 승천하시고 있습니다(눅24:50-51). 모두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영생을 누리며 참된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메시아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복 중의 가장 큰 복입니다.
(3)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여 자신의 침상에서 편히 쉬게 해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사야가 전해주고 있습니다(사57:2).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천국에서 자신의 거처와 편안한 침상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그 비결을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마련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 비결은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의 거처를 마련하여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계22:20-21).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메시아가 다시 오실 때까지 바른 길을 가라고 성도들에게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바른 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장차 하늘의 상급과 기업은 그렇게 행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맡은 바 사명에 최선을 다하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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