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74강(사57:7-1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17. 01:50

이사야 강해 제274(57:7-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310()

 

이사야가 비판하고 있는 선민들의 잘못된 신앙생활과 의식구조(57:7-10)

 

이사야는 본문에서 동족 유대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신앙생활의 문제점에 대하여 가장 깊숙하게 메스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가 발견하고 있는 문제의 뿌리 곧 신앙생활에 있어서 선민들의 잘못된 의식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높은 산에 올라가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쾌락을 위한 것입니다(57:7a, 8b). 둘째, 이방 신과 우상에게 산당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57:7b).

(2)  하나님의 말씀 이면에 자신들의 자랑과 이기심을 숨겨두고 있습니다(57:8a).

(3)  이방 신을 섬기며 이방인과 똑 같은 방법으로 선민의 나라를 운영하고자 합니다(57:9a). 힘있는 나라를 의지하여 안보를 유지하고자 하지만 결국은 나라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57:9b).

(4)  선민을 다시 살려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도록 기회를 주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뜻과 능력을 의지하여 살아가고자 할 따름입니다(57:10).

그와 같은 내용을 본문의 각 구절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의미를 도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b)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57:7); 먼저 높고 높은 산’, ‘침상’, ‘제사등 세 가지 용어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서 이 구절의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57:7a); 출애굽기 제19장의 내용을 참조하면 높은 산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장소입니다(19:3, 9, 16, 20);

1)    그러므로 거룩한 곳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산을 함부로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제2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성막을 지으라고 하십니다(25:8-9). 그때부터 지성소에 하나님이 임재를 하시고 그곳에서 모세와 대제사장 아론을 만나십니다(25:22, 16:17, 29, 34). 그 성막이 나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왕상8:6).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만큼이나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가 높은 산입니다.

2)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 제14장에서 높고 높은 하나님의 보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14:14). 그 보좌만큼 높이 계명성인 천사장 루시엘이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고 하다가 땅으로 추방을 당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14:12-15).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높고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자신들의 향락의 침상을 설치하고 있습니다(57:7a).

3)    사람들이 자신을 청결하게 하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모세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배워야만 할 터인데 선민들은 그와 반대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삶이 아니라 육체적인 쾌락을 얻고자 높은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영성을 인간의 육체적인 쾌락과 향락으로 마비시키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57:7b); 선민들이 높고 높은 산 위에 올라가는 두 번째의 목적은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1)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이방 신과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선민들이 산으로 찾아가서 산당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여사제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는 관행을 이미 이사야가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57:3-5).

2)    여기에서는 그 선후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육체적인 쾌락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산당제사가 언급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표현기법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모시고 우상을 섬기고자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세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제 마음대로 얻고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쾌락과 향락을 의미하고 있는 침상을 높은 산 위에 설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57:7b).

둘째로, “(a) 네가 또 네 기념표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b)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c) 또 네가 그들의 침상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57:8);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권면한 신명기의 말씀을 어떻게 선민들이 저버리고 있는지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네가 또 네 기념표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57:8a); 모세는 신명기 제6장에서 쉐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6:4-9);

1)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6:9)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는 선민들이 쉐마표를 두고 있는 그 뒤에 자신들의 기념표를 두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선민들의 관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민들은 자신들의 민족적인 자랑과 성취 그리고 선민의 영광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민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과연 그럴까요? 그것은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선민들이 이기적인 선민우월사상을 버리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신앙을 전해주고 이방인들을 위하여 제사장나라로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있습니다(19:5-6). 요컨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님 백성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선민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반대로 사고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은 구원의 대상으로, 이방인들은 진노와 멸망의 대상으로 삼아주시는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2)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57:8b); 선민들이 이방인들과 함부로 혼인하고 이방인들의 풍습을 무분별하게 따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거룩한 백성이 타락하여 이방인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동족들인 선민들의 신앙생활이 그와 같은 타락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나를 떠나입니다.

2)    이방인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며 함부로 혼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이방인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자고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그들과 언약하며”(57:8b)입니다.

(3)  또 네가 그들의 침상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57:8c); 선민의 나라와 이방인의 나라가 외교관계를 맺고 서로 긴밀하게 교류를 하게 되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과 같이 거룩한 하나님신앙이 밀려나고 그 자리에 육체적인 쾌락과 세상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이방인들의 우상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사야 시대의 선민사회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물질문명과 향락문화가 이데올로기의 벽을 허물고 전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a)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b)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57:9); 하나님신앙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있는 선민들의 외교국방상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57:9a);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선민들이 이방 신을 도입해서 전제를 드리면서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만 도입하여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외교적인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방나라에 선물을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상호이익을 증진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국제관계에 있어서 참으로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개인적으로 히스기야 왕 때의 외교국방정책에서 그 잘못된 모습을 생생하게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2)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57:9b); 먼저 이사야가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대군이 다윗 왕조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오자 히스기야 왕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국력과 군사력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30년 전에 시리아의 아람왕국을 정복했으며, 20년 전에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강대국 중의 강대국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사력을 다하여 많은 금과 은을 주면서 산헤립 황제를 달래어보고자 합니다.

2)    그러나 산헤립 황제는 영악합니다. 많은 재물을 얻게 된 산헤립은 회군하는 척 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미 전국 방방곡곡 주요 성읍들이 적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갇힌 히스기야 왕과 귀족들은 마지막 수단을 강구합니다. 그것은 애굽 제25왕조의 바로인 구스의 왕 디르하가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전략이 성공을 할까요?

3)    이사야는 실패할 것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계자인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아니하고 제멋대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선민의 나라를 한번 구해보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 그대로 애굽의 구원병은 산헤립 황제의 매복전략에 휘말려서 패퇴하여 돌아가고 맙니다(37:9). 그때서야 히스기야 왕이 성전으로 들어가서 눈물로 구원을 호소합니다(37:14-20). 여호와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을 생각하여 여호와를 모독한 앗수르 군대를 징벌하고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을 구원해주십니다(왕하19:34-35, 37:35-36).

4)    부끄럽기 그지없는 구원을 받은 히스기야 왕의 그 다음 행보가 걸작입니다. 그는 너무나 빨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그 대신에 그는 제멋대로 하다가 잘못되면, 최후의 순간에 여호와만 찾으면 무조건 용서해주시고 다시 구원의 길을 허락해주신다고 하는 이상한 신앙에 빠져듭니다. 따라서 히스기야 왕과 선민들은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과 평안함을 추구합니다(39:8).

5)    특히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공로라고 자랑하면서 국제적으로 유다 왕국과 자신의 위세를 드높이고자 합니다(왕하20:12-15). 그 결과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음부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57:9b),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9:5-6).

넷째로, “(a)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b)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57:10); 나라가 망한 선민들을 이방 땅에서 해방시켜 고토로 돌아가게 하지만 그들의 개과천선과 신앙생활은 부족하기 그지 없습니다;

(1)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57:10a); 주전 586년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이방 땅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자손들이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해방을 맞게 됩니다;

1)    바사의 고레스 왕이 신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시대를 열기 때문입니다. 고레스 황제는 자신의 천하통일을 예언한 이사야의 기록을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44:28, 45:1-8).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유를 주고 원하는 자는 고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도록 도와줍니다(1:1-4).

2)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피곤한 이방제국의 포로생활 가운데에서도 보호하여 주시고 해방의 기쁨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옛날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이제는 출바벨론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말할 필요가 없이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믿으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2)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57:10b); 그런데 훗날의 역사는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1)    선민 유대인들이 제2성전시대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실족을 시작으로 하여 다시 타락하고 있습니다(13:4-7, 28). 선지자 말라기의 시대가 되면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기도 힘들게 되는 헌금부족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3:8-10).

2)    그 뿐만이 아닙니다. 훗날 그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만민구원의 뜻을 부르짖는 메시아가 오지만 배척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방민족을 멸망시키고 선민만을 구원하는 메시아를 달라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시지 아니하시면 자신들의 힘으로라도 로마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합니다.

3)    그 결과 주후 70년에 예루살렘과 유다 사회가 망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이방세계를 떠돌게 되는 유민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가나안 땅에 현대 이스라엘이 다시 건설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선민 유대인들은 그들의 책략과 재능과 재력에 의하여 세계가 움직여져야만 한다는 시오니즘 곧 선민우월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그 사상은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겸허하게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는 시대는 언제일까요? 온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섭리로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해달라고 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때는 언제가 될까요? 그 때를 위하여 성도들이 기도를 해야만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이사야가 질타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잘못된 하나님신앙은 사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자신과 자기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스럽지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지적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성전이나 교회의 건물 안에 가두어버리고 자신들은 높은 산 경관 좋은 곳을 찾아 다니면서 성적인 쾌락과 이기적인 소원성취를 우상에게 빌고 있지나 아니한지 새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의로움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의 이기적인 정의만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지 아니한지도 점검해보아야만 하겠습니다.  

나아가서, 인간적인 책략과 재능 그리고 재력으로 온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현대판 선민우월사상도 차제에 청산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 모든 인간적인 계산과 욕심을 내려놓고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겸손하게 바로서는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