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71강(사56:9-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16. 08:16

이사야 강해 제271(56:9-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37()

 

오랜 세월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외면한 선민들의 게으름과 탐욕 그리고 영적인 몰지각함에 대하여 이사야가 강력하게 규탄하다(56:9-12)

 

이사야는 들의 짐승과 같고 숲 속의 짐승과 같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불러 쓰시겠다고 하는(56:9) 그 이유에 대하여 본문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선민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전혀 수행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결국 진노의 잔을 마시고 있기 때문입니다(51:17, 56:10-12).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선민 이스라엘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파수꾼들이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이 없고 그 예언의 뜻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56:10a). 따라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제대로 경고를 해주거나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39:6-8, 56:10b).

(2)  둘째, 선민들의 영적인 지도자 목자들의 타락이 심합니다. 탐욕에 사로잡혀서 무엄하게도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56:11).

(3)  셋째,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선민인 그들에게 임하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지(感知, 느끼고 깨닫기)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56:12).

과연 그와 같은 내용이 어떻게 각 구절에서 묘사가 되고 있는지 이제부터 한 구절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들의 모든 짐승들,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 (b) 와서 먹으라”(56:9); 먼저 가나안 땅에서 그 주변과 이웃의 들과 숲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에게 과연 어디로 와서 무엇을 먹으라고 하는 것일까요?

(1)  들의 모든 짐승들,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56:9a); 가나안 땅에서 그 이웃 주변을 바라보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들은 메마른 광야입니다;

1)    그러므로 가나안 주변의 이방인들은 메마른 광야에서 들의 짐승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으므로 그러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선민 이스라엘이 손쉽게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메마른 광야에는 간간히 숲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샘물이 있으므로 사람과 가축들이 목을 축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숲 속에서 낮의 폭염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자연히 숲 주변에 짐승들이 몰려들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집단거주지도 그 숲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는 선민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제멋대로 수천 년 동안 살아가고 있는 주변의 이방인들을 들의 짐승 또는 숲 속의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그와 같은 이사야의 견해는 훗날 그리스도가 수로보니게 이방여인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표현을 빌려서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과 흡사한 것입니다(15:26, 7:26-27).

(2)  와서 먹으라”(56:9b); 훗날 그리스도로 오시는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22:2). 종들을 보냈으나 초청인사들이 모두들 세상일에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서 전혀 참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수 차례 종들을 보내어 계속 간곡하게 잔치참석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지부동입니다. 어떤 자들은 임금의 종을 잡아 죽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임금이 진노하여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버립니다.

2)    이제 임금은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22:8-10). 위와 같은 내용은 선민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천국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선포가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3)    훗날의 그 예언을 알고나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미리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와서 먹으라”(56:9b)고 전하고 있는 말은 이방인들을 천국잔치자리에 초청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들의 짐승과 숲 속의 짐승은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의 천국에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 진노로 멸망을 당하고 그 대신에 이방인들이 천국잔치자리에 초청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가 이미 알고서 위와 같이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4)    하지만 문제가 아직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천국의 잔치자리에 모두 초청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잔치자리에서 음식을 먹으며 떳떳하게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복으로 상징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입니다”(22:11-14). 이방인들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 동안 여호와의 종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구원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21:6-7).

  둘째로, “(a)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b)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56:10);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이사야가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56:10a); 먼저 파수꾼이라는 용어의 의미부터 따져봅니다;

1)    파수꾼’(a watchman, a guard, a lookout)이란 잠을 자지 아니하고 적의 위협을 살피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와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는 파수꾼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만약에 파수꾼이 잠을 자버리게 되면 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선민의 나라의 파수꾼인 신정국가의 지도자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이므로 위협은 두 군데에서부터 오고 있습니다; 첫째, 내부적인 위협입니다. 하나님신앙을 떠나서 위정자들이 스스로 나라의 주인행세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타락입니다. 둘째, 외부적인 위협입니다. 악한 영과 세상풍조 그리고 악한 군대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나라의 파수꾼들인 정치적인 지도자들이 눈뜬 소경이며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지를 못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캄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국가적인 위기에 대하여 전혀 경고를 해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표현 그대로, ‘벙어리 개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56:10a).

(2)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56:10b); 선민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이 어째서 그토록 영적으로 캄캄한 인사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을까요? 이사야의 답변이 다음과 같습니다;

1)    꿈꾸는 자들이요”; 그들은 이상주의자들이 되어 있습니다. 도무지 현실감각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미성숙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와 같이 응석받이 아이와 같이 되어 있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립하는 신앙인, 그리고 성숙한 신앙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반대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2)    알기 쉽게 여기서 히스기야 왕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두 차례나 구원해주십니다. 먼저는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해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병으로 죽을 운명인 히스기야를 구해주고 보너스로 15년 수명연장까지 해줍니다”(37:14-20, 35-36, 38:2-5).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스기야 왕이 자만심과 세상적인 자랑에 빠져버립니다.

3)    급하게 되면 최후의 순간에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만사형통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걱정하며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편리한 수호신 여호와를 모시고 있으니 한평생 즐겁고 행복하게 세상적인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39:8). 그와 같이 하나님을 현세적인 복과 소원성취를 얻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로서 이해하고 있는 신앙이 바로 우상문화입니다. 그 사조에 빠져든 히스기야 왕과 그 백성들이기에 100여년이 지나게 되면 선민의 나라가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철저하게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1:2-15, 25:1-7).

4)    누워있는 자들이요”; 누워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권력자가 되면 비스듬히 누워서 맛있는 것을 먹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좌식계급’(坐食階級, 일을 안하고 앉아서 밥만 받아 먹고 사는 지배계층을 말함)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을 치기 위하여 군사를 지휘하지를 않습니다. 한없이 문약해집니다. 로마의 경우에는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사용하다가 결국은 그들에 의하여 제국이 망하고 맙니다. 고려와 조선도 무신을 경멸하고 문신들이 권력을 계속 장악하다가 결국은 국력이 약해져서 망하고 맙니다.

5)    유대인들의 정치지도자들이 문약해지고 있습니다. 국가의 안보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모두 지켜주신다고 믿고서 국방을 튼튼히 하지를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건전한 신앙생활일까요? 아닙니다. 정치지도자들 역시 여호와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기 위하여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선민들의 신앙생활과 현실적인 삶을 지도하며 그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겨서 선민의 나라를 이웃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부강하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모범이 전혀 없고 마냥 누워서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적인 복이 나무의 홍시처럼 뚝 떨어져서 자신들의 입으로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6)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56:10b); 하나님께서 온 세상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었더니 그들이 선민의 의무를 조금도 이행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19:5-6). 선민들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해야만 합니다(1:2, 3:2, 12:39).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모범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지 아니하고 잠만 자고 있으니 그것이 선민들의 잘못입니다.

  셋째로, “(a) 개들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b)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56:11); 선민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신정국가의 지도자들이 개들처럼 육신적인 삶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들도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부터 챙기고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개들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56:11a); 훗날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당시 선민 유대인들의 통념을 빌려서 수로보니게 이방여인을 ’(dog)라고 간접적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7:26-27). 그것은 천대의 의미입니다;

1)    그와 같은 개념으로 여기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 선민국가의 지도자들을 개들’(dogs)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개들이라고 비하가 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세상적인 탐욕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에 먼저 힘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마치 개와 같은 짐승처럼 세상의 먹이를 많이 취하고자 여념이 없습니다. 제 배를 불리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망하고 그들의 나라마저 망하고 말 것입니다.

(2)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56:11b); 선민국가의 정치지도자들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인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하나님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몰지각한 목자들이라는 용어의 의미입니다. 그 대신에 그들이 종교생활에 있어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지도자의 기득권을 오래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신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것입니다(56:11b). 그러므로 그들이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우상문화의 전형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a)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잔뜩 마시자. (b)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39:8, 56:12); 매일같이 포도주와 독주에 취하고 미래가 지금과 같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1)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잔뜩 마시자”(56:12a); 하나님신앙에 있어서 포도주와 독주의 사용처는 조금 다릅니다;

1)    포도주는 잔치자리에 사용이 되는 것으로서 특별히 천국잔치에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4:23-25).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상징하고 있는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포도주를 함부로 마셔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선민나라의 영적인 지도자인 목자들이 그 포도주를 함부로 가져가서 마시고 즐기고자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거룩한 것을 함부로 범하고 있는 타락입니다.

2)    하나님의 것인 포도주를 제멋대로 마시고 취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들이 세상적인 독주를 마시고 한껏 취하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독주를 마시게 되면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그리고 영적인 양심도 억눌러버립니다. 마치 영성과 이성을 상실한 짐승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완벽하게 육신적인 삶을 탐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떠나버리십니다(6:3). 그 결과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입니다.

(2)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56:12b); ‘취생몽사’(醉生夢死, 한평생 취하여 살다가 꿈같이 죽고 마는 것)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입버릇처럼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 깨고 나면 그만인 한 바탕 나른한 봄철의 꿈과 같은 것)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1)    한 세상 잘 먹고 잘 누리고 잘 살고 가면 그만이지 그 다음의 일을 생각해서 무엇을 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현세구복사상과 내세를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상을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서 발견하고서 완전히 절망을 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39:8).

2)    그와 같은 사고방식에 젖어서 한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종으로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선민의 나라의 멸망입니다. 결국 극소수의 회심자들에 의하여 훗날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이방 땅에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동족들의 현세주의 구복신앙을 바라보고서 절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선민의 나라의 멸망을 내다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동족들을 구원할 길은 메시아로 오시는 강력하신 여호와의 종의 대속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모든 힘을 모아서 훗날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부디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신앙을 회복하라고 동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선민의 나라의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영적인 지도자들의 타락의 모습이 얼마나 절망적인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습이 2,7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기독교국가의 모습에서도 많이 눈에 뜨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나없이 다시 한번 영적인 각성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그러한 깨달음의 은혜와 영적인 복이 성도님들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