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53강(사52:7-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18일(목)
선지자 이사야가 온 세상에 전하고 있는 복된 좋은 소식에 대하여(사52:7-10)
본문에서 이사야는 다음 네 가지 사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세상의 좋은 소식과 구별이 되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진술함(사52:7).
(2) 둘째, 시온으로 다시 돌아오시는 여호와를 자신이 파수꾼이 되어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다는 이사야임(사52:8).
(3) 셋째, 예루살렘을 구속하시고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함(사52:9).
(4) 넷째,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땅끝까지 열방과 만민에게 미치게 될 것임을 선포함(사52:10).
그와 같은 내용을 본문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이제부터 각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내용을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b)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c)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d)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세상의 좋은 소식과 구별이 되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1)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사52:7a); 평화를 공포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가장 좋은 예를 고대 그리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 원정군을 맞아 동북방 마라톤 지역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수적으로는 엄청난 열세였지만 협곡의 매복작전이 주효하여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 좋은 소식을 한 병사가 무려 42km를 달려 수도인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전하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것이 마라톤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와 같이 평화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 동양과 서양 그리고 옛날과 오늘날)을 막론하고 세상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식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2)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사52:7b);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메시아를 통하여 가장 좋은 복된 소식을 세상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입니다. 그 내용은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생을 살도록 되어 있는 사람의 운명을 창조주가 바꾸어준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요3:16, 계21:27),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요8:35), 천국에서 창조주와 함께 영생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역사 가운데 가능해지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된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3)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사52:7c); 선민들의 나라는 처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창조주 여호와를 주권자로 모시고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정국가이며 나라의 법률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입니다;
1) 그러나 왕정국가가 되면서 그 모습이 달라지게 됩니다.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선민의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 왕들이 월권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도 하나님보다는 왕을 더 받들고 섬기게 됩니다.
2) 그리고 이방 신과 우상을 도입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왕과 백성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과 소원성취를 위하여 가장 편리하고 쾌락적인 신을 모시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게 됩니다. 그것이 선민국가의 타락입니다.
3)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선민들이 이방 땅을 헤매게 됩니다. 그런데 멀리서부터 참으로 복된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 다시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시기 위하여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그 소식을 예언으로 미리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는 이사야가 여기서 감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사52:7c).
(4)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d);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선민들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달려오는 선지자의 발소리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가 선민의 사회에서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구원의 대상은 선민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만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방 땅으로 그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하여 떠나고 있습니다. 그 선교의 발걸음이 실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a) 네 파수꾼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b)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사52:8); 시온으로 다시 돌아오시는 여호와를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은 이사야 자신의 심정을 파수꾼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네 파수꾼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사52:8a); 파수꾼은 모두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도 불침번을 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영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번을 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영의 바깥에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의 변화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들 파수꾼들이 복된 소식을 먼저 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발걸음을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즐거워서 일제히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사52:8a).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입니다.
(2)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사52:8b); 여기서 이사야는 타락한 도성 예루살렘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떠나계셨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시자 시온이 적들에게 함락이 되는 역사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여호와께서 다시 일어나십니다. 남은 자들을 구원하여 시온으로 다시 들어오시고 계십니다. 그 광경을 가장 먼저 보고 있는 자들이 파수꾼들입니다. 여기서는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가 시대를 뛰어넘는 파수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래의 그 만민구원의 메시아의 소식을 700년이나 먼저 동족들에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a)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b)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사52:9); 예루살렘을 구속하시고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사52:9a); 여호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버리시자 그곳은 이방인들에 의하여 멸망이 되고 맙니다. 백성들은 전쟁포로가 되어 이방 땅으로 끌려가버립니다. 영적으로 타락하자 예루살렘이 황폐화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자 그곳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당장은 메시아를 선민들이 배척함으로써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훗날에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옴으로써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먼 훗날의 일을 이사야가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사52:9b);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버리시고 그의 백성들을 떠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의 백성들이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신앙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1) 겉으로 보면, 율법을 잘 지키고 절기를 따라 제사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있는 주인의 뜻을 따르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 뜻을 따르게 되면 손해가 발생하고 세상적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을 전부 이방인들처럼 처리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할 실익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2)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떠나버리십니다. 그러자 완전한 위로가 사라져버리고 백성들은 모두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들어가버리고 맙니다. 훗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뜻이 메시아를 통하여 드러나게 됩니다. 죄와 사망의 종 노릇을 하고 있는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 삯을 지불하시는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롬8:1-2).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자는 죄와 사망의 철칙에서 해방이 되는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사52:9b).
넷째로, “(a)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b) 땅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사52:10);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땅끝까지 열방과 만민에게 미치게 될 것임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사52:10a); 사도 요한의 증언 그대로 메시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입니다.
1) 그러므로 메사아가 자신의 희생으로 드리는 속죄의 제사는 선민에게만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과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속죄를 위한 제사입니다. 그 뜻을 사도 요한이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2) 그와 같은 메시아의 역할을 이미 알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은혜를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사52:10a). 비록 예루살렘에서 발생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이지만 그 효력은 열방과 만민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산제물이기 때문입니다.
(2) “땅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사52:10b);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만민을 구원하고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구원의 은혜가 땅끝까지 미치게 됩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종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새로이 건설하시는 것을 이사야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사65:17-25).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땅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사52:10b)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2) 하지만 그 효력이 땅끝까지 미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끝까지 그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성도들이 행하라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지시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마28:18-20, 행1:8).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 구원으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이 죄와 사망의 지배를 벗어나서 영생의 복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훗날 메시아로 말미암아 그 구원과 영생의 복이 이 세상에 올 것임을 동족들에게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떠나버리신 여호와께서 다시 찾아오시는 날이 바로 그 구원의 날입니다. 그날을 이사야는 빨리 보고 싶어 자신이 파수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처럼 이사야는 구원의 여호와가 오시면 자신이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된 구원의 소식을 동족들에게 알려주는 전령이 되고 싶어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대속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만민과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들도 이사야처럼 동족들을 위한 파수꾼이 될 수 있고 복음의 전령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자는 너나없이 그 일에 나서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지상명령을 한평생 실천하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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