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50강(사51:17-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15일(월)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선택하여 마시고 비틀거리는 선민들과 그 후손들의 처참한 모습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사51:17-20)
첫째로,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30:19).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유언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생명과 복을 택하는 대신에 그만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비웠도다”(사51:17).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유다 왕국 백성들을 깨우고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만 그것이 순조롭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민들이 이미 자정능력(自淨能力, the power of self-purification)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이사야의 말씀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사51:18).
풀이를 해보자면, 먼저 선민사회 유다 왕국에 두 가지 종류의 민족이 살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혈통적인 선민들입니다. 그들이 ‘네가 낳은 모든 아들’입니다. 또 하나는 선민사회에 편입이 되어 있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은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이라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선민사회 내에서 유대교를 믿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민사회 바깥에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선민들은 그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통적인 유대교로써는 결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그들 자신이 얻을 수가 없으며 더구나 천하만민에게 그 복을 전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선민들의 비극이며 유대교의 하자(瑕疵, 결함)입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도대체 선민사회의 유대교의 결함이 무엇일까요? 어째서 선민사회가 그들의 후손들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전해주지를 못하고 하나님경외의 신앙태도를 제대로 보여주지를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선지자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여러 번 지적해주고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1) 첫째, 선민들이 자신들만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멸망의 대상이라고 진작부터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잘못된 선민우월주의입니다.
(2) 둘째,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서 현세적인 복을 받아 누릴 수만 있다면 대만족이라는 것입니다. 선민들은 현실적으로 적군을 물리쳐주시는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원하고 있습니다(사37:15, 35-36). 그리고 부귀영화와 장수함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있습니다(사38:1-6). 그들이 죽은 다음에 얻을 수 있는 그러한 내세의 복은 그들의 소원 바깥의 관념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사39:5-8).
(3) 그 두 가지는 이방인들이 이방 신이나 우상에게서 얻기를 원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내용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우상문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사51:17).
셋째로, 이사야 시대의 선민 유대인들과 그들의 후손들 그리고 선민사회 내에 편입이 되어서 율법생활을 착실히 하고 있는 이방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모두 유대교를 믿고 있으므로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세상사람들에 대하여 하나같이 유대인화되어야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은 그것이 아닙니다. 천하만물과 온 세상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정신으로 만민구원을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사11:5-12). 결국 유대교가 주장하고 있는 인위적인 선민구원, 이방인멸망이라는 도식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들이 과감하게 유대교를 개방하고 개혁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은혜를 온 세상에 복음으로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사51:18). 그리고 선민사상이 점점 강화되고 있으므로 그들의 후손들도 스스로 만민구원에 나설 가능성이 전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비상조치가 장차 이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의 오심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가능하도록 하십니다(창18:11-14, 눅1:34-38). 독생자가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십니다(사7:14, 요1:14). 사람들과 동일하게 자라고 생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이나 선민우월사상에 결코 물들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한평생을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눅24:44-48). 그리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칠 것입니다(사53:3-12, 요1:29). 그 시대를 앙망하고 있는 선지자가 바로 이사야입니다.
넷째로, 이사야는 메시아의 시대 곧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자 메시아의 깃발을 흔드시는 그 시대를 바라고 소원하라고 그의 동족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사11:10-12). 그러나 선민사상과 유대교의 교리에 심취하고 있는 동족들과 선민사회내의 이방인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들의 장래에 대하여 다시 한번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겪게 될 참상이 본문 가운데 다음과 같습니다; “(19)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20)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사51:19-20). 역사적으로 두 가지 참혹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황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라 잃은 백성들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해줄 위로자가 없습니다(사51:19). 선민사상을 버리며 우상문화를 청산하고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2)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제공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사회에 오시는 메시아입니다. 선지자의 말씀을 배척했을지라도 메시아의 말씀만은 영접을 하는 것이 선민들이 다시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미래를 예지해보니 선민들의 후손들이 그러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참혹한 풍경이 환상과 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사51:20).
(3) 풀이를 해보자면, 회개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노와 견책이 계속 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선민들이 이방인들의 땅에서 유민이 되어 계속 떠돌게 됩니다. 마침내 이방인들의 덫에 걸려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거리로 내몰리게 됩니다. 재산도 빼앗기고 살 수 있는 권리도 빼앗기고 죽음의 자리로 내몰리고 있으니 그 참상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사51:20).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거역하고 있는 선민들을 그토록 가혹하게 다루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자신의 백성을 그토록 엄중하게 처벌하셨으니 그 분노의 잔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선민이 마신 다음에 반드시 이방인들에게 차례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그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원칙을 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5:29).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의 ‘애국애족’(愛國愛族, 자신의 나라와 동족을 사랑함)정신은 특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선민사상과 우상문화를 선택하고 있는 동족들을 구원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시고 고통 가운데 헤매게 될 그들을 어떻게 깨워서 반듯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사51:17)
그 해답은 오로지 구원자로 장차 그들의 사회에 오시게 될 메시아입니다. 왜냐하면,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는 그들의 후손과 유대교인화 되어 있는 이방인들로써는 자체 정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사51:18). 따라서 이사야는 메시아를 앙망하며 그 만민구원복음의 시대에 그의 동족들이 모두 동참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지하고 있는 동족들의 미래는 참혹합니다.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자손들이 이방인들의 땅을 떠돌게 될 것입니다(사51:19). 메시아를 배척함으로써 그 참상은 더욱 가중이 되고 맙니다. 그들의 후손들은 이방인의 땅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것입니다(사51:20).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의 고심과 간구는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한 가지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분노와 징계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것을 결코 피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를 일찍 맞고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 심정입니다. 훗날 그와 같은 이치를 꿰뚫어 보고 있는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어느 정도 구원을 얻게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민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롬11:25-26).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는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고의적인 차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롬11:29-36).
그 사실을 믿고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사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지자 이사야도 그와 같은 종말론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있는 그의 동족 12지파의 모습을 내다보고 있습니다(사65:17-25, 66:20-22). 그것이 이사야가 마지막으로 믿고 있는 하나님신앙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놀라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평생을 만민구원을 위하여 달려가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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