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48강(사51:12-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13일(토)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사51:12-14)
이사야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창조주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말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사51:13a). 그 결과 선민들이 이 세상에서 위로를 얻지를 못하고 이방인들을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51:12, 13b). 그러므로 하나님신앙만 회복하게 되면 하루살이에 불과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서의 보호하심과 영생까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사51:14).
과연 그와 같은 내용이 어떻게 본문 가운데 담겨 있는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하나씩 분해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b)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51:12); 이사야는 자신의 동족들이 이상하게도 위로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이방인들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사51:12a);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위로자가 없습니다. 막상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나면 유가족이나 친지들은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생전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다시 한번 보고 싶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없으면서 말로써만 위로하는 것이 결코 완전한 위로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너희를 위로하는 자’(사51:12a)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51:12b); 진정한 위로자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비극이 찾아오게 됩니다;
1)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능력자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유한한 그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얼마나 두렵고도 비굴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보장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해침을 당할까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해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한시적인 기간 동안에 사용하고서 버려버릴 수밖에 없는 그 유한한 육체와 목숨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연약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는 육체와 한시적인 목숨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피조물인 사람의 자식들에 지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사51:12b).
둘째로, “(a)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b)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c)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51:13); 천지와 더불어 사람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피조물인 지배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딱하다는 것입니다;
(1)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사51:13a); 사람들이 타락하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사51:13a). 그러므로 그들이 보고 있는 세상은 창조주가 없고 오로지 피조물들만이 설치고 있는 곳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하고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세상의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들 가운데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게 되는 짐승과 같은 사회가 되고 맙니다. 지배자의 말이 곧 법이며 그들이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피조물이 피조물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그 종으로 살고 있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신앙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2)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사51:13b);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하심이 상실되어 있는 사회의 모습은 얼마나 두려움에 싸여있는지 모릅니다. 도처에 위협과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의 재산과 목숨을 빼앗기 위하여 빈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종으로 삼아 학대하고 있는 사회이므로 약자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두려워하면서 전전긍긍할 따름입니다(사51:13b). 개인간에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약소국과 강대국 사이에서도 그러합니다. 그와 같은 비참한 인간세상을 향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강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육신과 목숨 그리고 재물을 노리고 있는 세상의 힘과 권력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게 되면 그 위협이 맥없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사51:13b 의역).
(3)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51:13c); 이 세상에 영원한 강자가 없습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10년 이상 가는 권력이 없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의 권력이란 그런 것입니다. 사람에게만 ‘생노병사’(生老病死,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의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제도나 국제관계도 모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강자가 없으며 영원한 학대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자신 있게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51:13c)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a)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b)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c)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d)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사51:14);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은혜가 임할 것임을 이사야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사51:14a);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해방자이십니다. 일찍이 출애굽의 역사를 통하여 세상제국 애굽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켜주신 바가 있습니다(출12:29-42). 하나님의 그와 같은 역사는 일회용으로 끝나지를 않습니다;
1)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선민들을 노예로 삼고자 쳐들어온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군대를 신위적인 능력으로 무찔러버리십니다. 하룻밤에 천사를 보내어 적군 18만 5천명을 죽여버리신 것입니다(왕하19:35). 그 이유는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포로가 아니라 자유민으로 살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 같은 이유로 앞으로 신바벨론 제국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는 선민들도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바사의 왕 고레스를 강성하게 하여 신바벨론 제국을 멸망시켜버리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계속 발생할 것임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사9:4).
(2)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사51:14b);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게 되면 성도들은 죽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신앙의 회복으로 말미암아 창조주가 주시는 영생을 받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1) 그 영생은 종말로 성도들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천성 곧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요5:27-29계21:27). 그 뿐만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게 되고 그리고 구속자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의 역할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되면 자신이 그 영생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2) 그 사실을 훗날 백성들에게 선포하시는 메시아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3)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사51:14c); 여기서 구덩이는 음부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불꽃이 회개하지 아니하는 죄인 곧 악한 자를 괴롭히고 있는 무저갱, 소위 ‘지옥’(地獄, hell)을 의미합니다. 종말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해지게 되면 그 음부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메시아를 구원주로 믿게 되면 그 심판이 면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로 옮겨지게 됩니다(사51:14c).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의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4)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사51:14d); 가장 간단한 말씀 같지만 사실은 대단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첨단과학을 자랑하고 있는 21세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인류는 아직도 양식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주가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서 구원주로 섬기게 되면 그 양식이 절대로 부족하지 아니하게 되는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700년이 지나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기적의 사역이 그러합니다. 이른바 ‘5병2어’(五餠二魚,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반찬 두 마리)의 기적과 ‘7병2어’의 기적을 백성들 앞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마14:19-21, 15:34-38). 그것은 하늘의 곳간이 열리게 되면 먹고 사는 문제가 바로 해결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은 피조물들의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 아니라 창조주의 ‘플러스 섬 게임’(plus-sum game)을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결론적으로, 참된 위로와 해방 그리고 구원과 영생의 확보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창조주의 능력과 의도를 모르고 사람들끼리 자신들이 의롭고 선하다고 주장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처럼 군림을 해보아야 그것은 도토리 키 재기이며 누워서 침 뱉기에 불과합니다. 그 누가 이 세상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원한 안전보장과 구원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그 사회적인 권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세상이므로 노동자와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해보아야 그 결과가 바람직하지를 못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지주와 자본가 계급이 사라지지만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당의 고위간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피를 흘리면서 이데올로기의 절대성을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신앙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모순을 해결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 예루살렘 성을 건설하여 이 땅에 임재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한한 목숨과 육신적인 삶에 연연하여 창조주를 제대로 못 섬기고 있는 백성들을 긍휼하게 여기시고 메시아를 따르는 제자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선지자 이사야가 본문 가운데 강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참된 위로자이시며 영생의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찾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부디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지를 마십시오. 이 세상의 지배자로 말미암아 육신과 목숨을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동족들인 선민들이 하나님신앙으로 돌아오기를 이사야가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그 호소가 저희들의 부르짖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신앙고백과 외침이 성도님들에게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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