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46강(사51:7-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11일(목)
하나님의 공의를 아는 자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특징에 대하여(사51:6-7)
오늘의 본문말씀은 짧습니다. 다음과 같이 두 구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7) 의(righteousness, KJV)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my law)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8) 옷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같이 좀 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51:7-8).
그렇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떠한 내용의 말씀인지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봅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사51:7a).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가 세상적인 정의(justice)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세상적인 정의는 폐쇄적인 것입니다.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 내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집단의 규율을 지키고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면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정신이란 한없이 개방적인 것입니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공평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성도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의 규율만 지켜서는 안됩니다. 열방과 만민 그리고 만물이 모두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만 합니다.
(2) 그러나 세상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당연히 싫습니다. 자기부터 잘 살고 세상적인 이익을 챙기기에도 바빠죽겠는데 무슨 재주로 남을 돌보고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재화가 부족하여 세상사람들이 모두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상주의자들의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기서 하나님신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건설할 수 없는 그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지금도 그 창조의 능력을 보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창조하신 세상이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면 그것을 마치 토기그릇처럼 부수어버리시고 새로운 그릇을 다시 만드실 수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4)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마음속에서부터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며 그 공의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을 해나가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그 앞에 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듭난 삶을 허락하시고 천국이 이 땅 위에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요3:3-17, 14:2-3, 막9:1-5).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사51:7b). 이사야는 그 저항이 비방과 두려움, 그리고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신앙을 가진 백성들은 그것 때문에 결코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상세하게 살펴봅니다;
(1) 예를 들어, 두 나라가 서로 미워하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경우를 살펴봅니다. 미움과 전쟁을 초래하게 되는 이유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더 크게 하기 위하여 이웃나라를 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국은 모두 자신들의 전쟁을 ‘정의의 전쟁’(the war of justice)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종교를 가진 국가라고 한다면 서로 신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2) 서로 정의를 내세우고 있는 양국간의 전쟁에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어느 편에 서실까요? 그 어느 편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의 아전인수격인 정의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방법론이 아니면 모두가 하나님의 눈밖에 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라고 강조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요3:16-17, 10:10-11).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복음사역입니다. 그런데 그 사역이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선민사상 및 유대교리와 다르다고 하는 이유로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목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로마의 권력을 이용하여 십자가에 처형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마27:22-26).
(4) 그와 비슷한 경우를 장차 성도들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처럼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 앞길에 동일한 비방과 위협과 공포가 다가오는 것입니다(요15:18-19). 그러나 이사야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안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사51:7b). 그 이유는 그 비방이나 위협 그리고 공포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보호하심이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일시적인 것입니다(사51:8a). 아무리 그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100년 안팎의 인생을 사는 동안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이사야는 마치 옷이나 양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좀이 옷을 파먹고 좀 벌레가 양털을 갉아먹고 말기 때문입니다(사51:8a).
(2) 세상의 권세와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찍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 패권을 자랑하던 많은 제국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100개가 넘는 족속을 통치하며 마치 영원한 통치권과 영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이 야금야금 옷감을 파먹듯이 어느 사이에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져서 오늘날 그 흔적조차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3) 더구나 사람의 육신과 목숨이 참으로 유한한 것입니다. 오늘날 21세기 과학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다고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120세 이상을 사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광과 권세는 개인적으로 100년을 넘기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그러나 성도들의 세상적인 고난은 장차 얻게 될 하나님자녀의 영광과 비교하면 참으로 작고도 적은 것입니다(롬8:17-18). 그 사실을 여기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51:8b). 조금 풀이를 해봅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공의의 실현입니다. 피조물을 모두 살리고 돌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정의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먼저 살아야 하며 잘해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이 먼저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마치 모세처럼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야만 합니다(출3:5). 물론 자기가 소속된 집단 내에서의 헌신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사람들이 보기에 대단히 위대하며 거룩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온전히 실천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현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처럼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능력을 위임 받아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만약 자신의 감정에 휘말려서 과도하게 행사하게 되는 경우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신32:51-52, 34:4).
(3) 사람이 짧은 인생을 살아간 후에 이 세상에 무엇이 남게 될까요? 혹자는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그 이름을 남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도 얼마나 오래 역사 가운데 후손들이 기억을 해줄까요? 생각보다 짧습니다. 특히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가 되면 현재의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소멸이 되고 맙니다(사65:17, 계21:1). 인류의 역사가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이사야가 여기서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51:8b)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영원히 남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 생전에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 내용입니다. 그것을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이름과 함께 일대기로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구원의 열매가 남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생명책에 기록이 된 사람 곧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모두 입성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계21:27). 자손대대로 복음을 믿고 실천한 성도들이 모두 구원을 받고 천국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올바른 하나님신앙일까요? 이사야는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라고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는 동족 유대인들의 신앙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동족들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디 선민들만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를 마십시오.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죄 사함의 제사를 드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그 일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서부터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만 합니다. 형식적인 율법의 준수와 가축으로 대신하여 드리는 제사만으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만민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고 희생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억하시며 자손만대로 구원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사51:7-8 의역).
2,700년전 이사야의 부르짖음이 자꾸만 지금도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때와 별로 달라진 점이 없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본문말씀의 뜻을 깊이 음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며 그 말씀을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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