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44강(사51: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9일(화)
공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추구하는 삶의 비밀 세 가지에 대하여(사51:1-3)
본문에서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며 여호와만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 수가 있는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비밀 세 가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첫째가, 어떤 환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살고 있던 세상의 철칙과 사회체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되짚어보라는 것입니다(사51:1). 둘째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어내어 이방 땅으로 보낼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인생에 동행을 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사51:2). 셋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며 여호와만을 바라보는 인생을 살았을 때에 풍성한 하나님의 복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넘쳤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사51:3).
과연 그와 같은 내용이 어떻게 설명이 되고 있는지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에 대하여 하나씩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내용을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공)의(righteousness)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b)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51:1); 공의의 정신을 따라 여호와를 추구하는 자들이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야만 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왜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1) “(공)의(righteousness)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사51:1a);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합계 66권의 책이 하나의 정경으로 편집이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창세기가 서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이 결론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결론을 맺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의 결론에 해당하는 요한계시록 제3장의 한 대목을 살펴보면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1) 사도 요한은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결론 삼아 적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3:20-22).
2)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영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다가 마침내 영생의 영광을 차지한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꿈과 같은 소망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육신을 가진 인간이 인생 가운데 받아 들여야만 합니다.
3)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이 받아 들일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바로 위에서 제시한 요한계시록 제3장의 글에 다음과 같이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믿고 있는 자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때부터 놀라운 인생이 시작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발생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이 땅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복음사역을 끝낸 성도들은 천국에 입성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계3:20-22 의역).
4) 그와 같은 이치를 이사야는 구약시대의 동족들이 알아 듣기 쉽게 조금 다르게 설명을 해주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자들은 이하 세 가지의 방법론을 귀담아 들으라는 것입니다.
(2)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51:1b);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서 성도로 삼아 주시기 이전에 자신이 어떠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가를 먼저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1) 그때 세속적인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어떠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면 앞으로 어떠한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될지 다시금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2) 이사야는 알기 쉽게 ‘반석’과 ‘우묵한 구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반석’은 세속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의 기반입니다. 그것은 약육강식과 인과응보의 철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으며 그 종이 됩니다(창6:2-5). 그리고 보복의 법칙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출21:23-25). 원수를 미워하고 반드시 복수를 하게 되는 사회입니다(마5:43). 구약시대 율법사회도 그러한 무서운 사회입니다.
3) 그와 같이 약육강식과 보복의 피 바람이 불고 있는 무서운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우묵한 구덩이’라는 용어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온 지면에 무서운 칼 바람이 불고 있을지라도 ‘우묵한 구덩이‘ 안에서는 평화를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4) 사람들은 정치 및 안보공동체에서 그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같은 부족이나 민족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속사회의 최고의 가치는 효(孝)와 충성(忠誠)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속하고 있는 집단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정의감입니다. 그와 같은 애국애족의 정신이 최고의 가치관이며 세계관의 기초입니다.
5) 그런데 그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만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곧 영생을 얻을 수가 없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모두 종말의 심판 가운데 들어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로 불러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세속적인 사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둘째로, “(a)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b)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c)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사51:2);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른바 ‘하나님 경외’의 본을 보여준 믿음의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창22:12). 그들 부부가 그와 같은 놀라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사51:2a); 하나님은 창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을 통하여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깊이 묵상하게 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무엇인지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도 분명히 그러합니다.
(2)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사51:2b); 이사야가 참으로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사51:2b);
1)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혼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하고 육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 그것을 불쌍하게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혼자서 제멋대로 살게 되면 멸망의 대상이 될 따름이기 대문입니다.
2) 그래서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문만 열어주면 함께 살아가고자 하십니다(계3:20). 그리스도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성도들이 구원을 얻고 세상을 이기며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때까지 함께 동행하고자 하십니다(계3:21-22). 결국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 땅의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해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사51:2c);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복을 주어 이 세상에서 창성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창20:7).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손의 번성과 당사자의 창성함을 허락하십니다(창12:2).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 그 사람의 뒤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블레셋의 연맹 왕인 아비멜렉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21:22). 사실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사는 그것이 복이며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셋째로, “(a)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b)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창13:10, 오아시스) 하였나니, (c)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唱和, 시나 노래 따위를 한쪽에서 노래 부르고 다른 쪽에서 화답하는 것)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게 됨으로써 그들이 가는 곳마다 어떠한 하나님의 복이 흘러 넘치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사51:3a);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땅끝까지 나아가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시온의 영광만을 외치며 가나안 땅에 갇혀 있던 하나님신앙이 개방이 되고 개혁이 되어 이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시대를 구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이사야가 예지하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어떠한 변화가 이 땅에 찾아올까요?
1) 무엇보다도 먼저, 이방 땅에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복음으로 전하게 되면 그만큼 자신들의 동족들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기 쉽게 여기서 이사야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사51:3a).
2) 선민들의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완전히 저버림으로써 마침내 멸망을 당하고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이 훗날 회개를 하고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 땅이 회복이 되는 역사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창13:10, 오아시스) 하였나니”(사51:3b); 그와 같은 치유와 회복의 역사는 선민들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황폐한 땅이 비옥한 땅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대상이 이제는 구원의 은혜를 입는 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목에 대한 이사야의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세기 제2장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강의 근원이 출발하고 있습니다(창2:10). 그 말은 에덴에 큰 샘물의 근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막 한 가운데에 큰 샘물의 근원이 존재하게 되면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사51:3b).
2) 가나안 남부 염해 아래쪽에는 광야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 광야를 대상들이 많은 낙타를 이끌고 지나다니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사이에 교역을 하고자 그 험한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들 상인들이 편히 쉬면서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염해 아래에 있는 5도시국가입니다.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성입니다. 일찍이 가나안 남부 벧엘 땅에서 멀리 동남부의 그 지역을 관찰하던 롯은 그곳이 ‘하나님의 동산’과 같은 살기 좋은 오아시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창13:10).
3)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지구의 온난화 현상과 사막화 현상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자꾸만 사막과 광야가 넓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절실합니다. 사막이 에덴과 같고 광야가 하나님의 동산과 같은 오아시스로 변모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4) 그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심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땅의 회복뿐만이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시대가 전개될 것입니다.
(3)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唱和, 시나 노래 따위를 한쪽에서 노래 부르고 다른 쪽에서 화답하는 것)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c); 땅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새 예루살렘 성으로 이 세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사65:17-18). 그리하면 성도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서로 찬양을 올려드리게 됩니다(사51:3c).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의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며 여호와만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 수가 있는지 그 점에 대하여 본문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의 출발점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그러한 영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능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이사야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살고 있던 세상의 철칙과 사회체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되짚어보라는 것입니다(사51:1).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사회이며 보복의 법칙이 정당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그 두렵고도 무서운 사회에서 선지자로 또는 성도로 불러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2) 둘째,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어내어 이방 땅으로 보낼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인생에 동행을 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사51:2).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셨기에 선지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경외의 인생으로 일관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의 임재로 영적인 삶을 살아갈 때에 이 세상에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며 만민구원의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며 여호와만을 바라보는 인생을 살았을 때에 풍성한 하나님의 복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넘쳤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사51:3). 먼저 이방인들에게 만민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복음으로 전할 때에 자신들의 친척과 동족을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고 회복해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나아가서 온 세상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사막이 에덴이 되고 광야가 하나님의 동산같이 변화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 땅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새 하늘과 새 예루살렘이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이사야의 예언은 종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끝을 바라보면서 부디 모두들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공의의 정신으로 살아가라고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뜻과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앞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사야가 권면하는 그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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