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41강(사50:4-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5. 16:10

이사야 강해 제241(50:4-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26()

 

영적인 귀머거리와 벙어리 신세를 면하자면 어찌해야만 하는가?(50:4-6)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 가지의 은사를 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학자들의 혀를 주신 것과 둘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50:4). 이사야는 하나님말씀의 뜻을 깨닫고 보니 아직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이 불쌍하여 그들이 아무리 자신을 핍박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감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50:6). 그리고 이사야는 끝까지 선민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물러서지 아니하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하나님말씀의 진의(眞意, 참뜻)를 외치고 싶다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50:5).

과연 그와 같은 내용이 어떻게 진술이 되고 있는지 이제부터 본문의 세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b)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50:4);  신앙생활에 있어서 학자들의 혀가 왜 필요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사야의 귀로 들려오는 하나님말씀은 어떠한 논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1)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50:4a);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하나님이시기 이전에 이미 전체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따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나게 됩니다;

1)    영적인 체험은 개인적이지만 그 이치는 공동체적인 것이며 객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체험은 그것을 간증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라도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신앙고백과 진술에 있어서도 자체 논리성과 현실적인 타당성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2)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사야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학자들의 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설명의 논리성과 타당성을 중시하며 평소 학문의 객관성과 일반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개인적인 집착이나 공동체적인 아집을 상당히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3)    이사야는 동족들인 유대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선민에게는 구원, 이방인에게는 심판과 멸망을 호소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패턴은 창조주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모두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굉장히 이기적이며 주관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은 옹졸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학자들의 혀를 가져야만 합니다.

4)    이사야는 하나님말씀의 뜻이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만민구원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민들이 현세적인 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진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정직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이사야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5)    그와 같은 사실을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혀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셔서 이제는 유대인들에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50:4a).

(2)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50:4b);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언제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아침마다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마치 새벽기도와 새벽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이사야가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더욱 은혜스러운 것은 이제는 사람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새 세상의 창조이치를 설명해줄 수 있도록 영적인 논리성을 지니고 들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a)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b)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50:5); 하나님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자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을까요? 이사야가 영적인 귀가 열리는 것부터 설명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50:5a); 먼저 한 가지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구원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고 그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가능한 방법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먼저 인생 가운데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뜻을 말씀 가운데 정확하게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본문에 있어 이사야는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하나님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사야 자신에게 영적인 귀를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2)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50:5b); 그런데 이사야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자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동족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유대교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선민사상과 현세구복적인 신앙이 옳은 것일까요? 아니면 이사야 자신이 전하고 있는 메시아의 오심과 만민구원사상 그리고 영생의 구원이 옳은 것일까요? 이사야는 아무리 동족들이 반대하고 자신을 공격하더라도 결코 물러설 뜻이 없습니다(6:9-10).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선지자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그 말씀을 주시고 동족들에게 그대로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6:8).

셋째로, “(a)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을 맡기며, (b) 모욕침 뱉음을 당하여도 (그들이 불쌍하여)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50:6); 이사야는 동족들인 선민들도 자기처럼 영적인 귀가 열리고 학자의 혀를 가지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은 장차 여호와의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마음과 같습니다(53). 그리스도는 선민사회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그들이 올바른 하나님말씀의 뜻을 깨닫기를 원하고 있습니다(53). 그 마음이 이사야의 예언으로 본문 가운데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을 맡기며”(50:6a); 여호와의 종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양으로 제공하십니다;

1)    그 고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등에 채찍질이 가해집니다(53:5, 27:26). 그리고 뺨을 얻어 맞게 됩니다(26:67). 생각해보면 그것은 손자가 할아버지의 수염을 뽑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주제도 모르고 감히 창조주이신 독생자가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1:1-4, 14) 희롱하고 그 수염을 뽑고 있는 것입니다.

2)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득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하나님말씀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고 하여 그리스도를 해치려고 하는 선민들의 횡포가 극심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가 여기서 그와 같이 구체적인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선지자 이사야에게 평소 그러한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2)  모욕침 뱉음을 당하여도 (그들이 불쌍하여)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50:6b); 선민들은 선지자들과 메시아가 전하고 있는 말씀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하며 아예 외면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하며 모욕을 가하고 침을 뱉기도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만민구원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아예 선지자나 메시아를 살해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위협 가운데에서도 선지자와 메시아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부디 구원하여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러한 장면을 극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누가복음에 다음과 같이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2:60-62).

결론적으로,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위대하신 창조주의 뜻을 미물에 불과한 피조물 인간들이 어떻게 완전히 이해하고 실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영육합일체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만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창조가 되어 있는 인간이 그나마 지니고 있는 영성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면서 부디 그 뜻을 제대로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할 따름입니다.

오늘날 학문적으로 ()주관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비록 연구자의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결과를 보는 사람은 그 객관적인 진술 가운데 어느 정도의 연구자의 주관성이 개입이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한 용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과학철학의 기반이며 합의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의 말씀을 인간이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간주관성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화하고 일반화하여 설명할 수 있도록 학문적인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당연히 학제간 연구’(學際間 硏究, interdisciplinary study)도 필요하며 인접학문과의 소통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창조주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생각과 육체적인 삶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생각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음도 인정해야만 합니다(55:8-9). 그러므로 과학과 이성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존재양식을 모두 파악할 수가 있다고 자만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이사야의 말 그대로 학자들의 혀와 말씀의 뜻을 깨닫는 영적인 귀를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도록 자신의 이지적인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스스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응답을 영적인 깨달음으로 얻었다면 그 영적인 지혜 아래에 자신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종속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본문을 천천히 음미하시면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다시 나아가시는 은혜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