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39강(사49:24-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4일(목)
이사야는 어째서 여호와를 구원자이시며 구속자이시고 야곱의 전능자이시라고 부르고 있는가? 악한 영과 세상제국의 지배를 모두 폐하시고 모든 성도들에게 완전한 영생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사49:24-26)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비슷하지만 그 의미가 다른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원자, 구속자, 그리고 전능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세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어떠한 의미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지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용사(warriors)가 빼앗은 것(plunder)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b) 승리자(the fierce, or the righteous)에게 사로잡힌 자(captives)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사49:24); 무엇보다도, ‘용사’와 ‘승리자’의 개념의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용사(warriors)가 빼앗은 것(plunder)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사49:24a); 창세기 제6장을 참조하면, 용사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강한 자들입니다(창6:4).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의 비교우위적인 힘으로 약탈하는 자들입니다(창6:2). 그러한 용사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짐승의 사회와 같습니다. 육체적인 삶만이 지배하며 영적인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사회를 떠나버리십니다(창6:3).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그 세상에 도래하게 됩니다(창6:5-7). 그렇지만 이사야는 본문에서 그와 같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하나의 철칙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사회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심판하시고 구원하실 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2) “승리자(the fierce, or the righteous)에게 사로잡힌 자(captives)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사49:24b); 세상의 용사와는 차원이 다른 두려운 자가 인간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1) 그 점에 대하여 사도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유한한 사람의 목숨을 죽일 수 있는 세상의 지배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의 생명과 영혼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이 심판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그 기준이 ‘공의’(公義,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이 ‘righteousness’임)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의 사본에서는 여기서의 ‘두려운 승리자’(the fierce)를 아예 ‘공의를 행하시는 분’(the righteous)이라고 달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심판을 받아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의 지옥 불구덩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건져내실 수 있을까요?
3) 사실 영벌을 결정하시는 심판주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건지고자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지옥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그냥 힘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구속’(救贖, redeem)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 의인으로 간주가 되고 지옥 행이 천국 행으로 바꾸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a)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하노라. (b) 용사(warriors)의 포로(captives)도 빼앗을 것이요, 두려운 자(the fierce)의 빼앗은 것(plunder)도 건져낼 것이니, (c)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contend), (d) 네 자녀를 내가 (폭넓은 의미로서) 구원(save)할 것임이라”(사49:25); 용사와 승리자를 용사와 두려운 자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붙잡고 있는 것을 서로 바꾸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하노라”(사49:25a); 세상의 지배자로부터 사람을 구출해내는 구원이든지 아니면 지옥의 권력자로부터 죄인을 구속해내는 일이든지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실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사야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과 구속의 주체이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만 합니다. 특히 앞으로의 역사의 섭리가 그와 같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경청을 해야 합니다.
(2) “용사(warriors)의 포로(captives)도 빼앗을 것이요, 두려운 자(the fierce)의 빼앗은 것(plunder)도 건져낼 것이니”(”(사49:25b); 앞선 구절에서는 용사가 약탈한 것을 다시 되찾는 일과 두려운 승리자가 지배하고 있는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대상물이 서로 바뀌어 있습니다;
1) 세상의 힘있는 지배자 용사가 사람을 포로로 잡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되찾아오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두려운 영적인 존재가 약탈해간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되찾아 오시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2) 창세기 제14장을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다국적 군대와 염해 지역 5개 도시국가의 연합군 사이의 전쟁에 관한 기사가 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남부 헤브론의 호족으로 살고 있던 히브리인 아브라함이 그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는 소돔 성에 살고 있던 장조카 롯의 가족이 전쟁포로가 되어 북송이 되고 있는 현장을 급습합니다(창14:12-14). 그래서 무사히 롯의 가족도 구출하고 약탈당한 재물도 되찾아 오게 됩니다(창14:16). 그것이 쉽게 창세기에서 엿볼 수 있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3) 본문에서 이사야는 두려운 영적인 존재가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간 것은 재물을 약탈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사49:25b). 그 의미는 본래 그 사람의 주인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의 주인이 되찾아오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과 생명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탄의 권세 하에서 죄와 사망의 고통을 겪고 있는 피조물인 사람을 구해내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4) 다만 죄인인 인간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이 항변을 할 것입니다; “영벌의 심판에 들어갈 자를 어째서 창조주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아니하고 되찾아 가는 것인가?”. 그 항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5) 풀이를 해보자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합작으로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① 먼저 그리스도가 친히 죄인의 죄와 사망을 짊어지십니다. ② 그러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죄인이 의인이 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③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성도들 개인에게 적용하여 심판을 면제해주기 때문입니다.
(3)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contend)”(사49:25c); 이 세상에서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복음사역의 길에 방해를 하고 있는 대적자들을 하나님께서 처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4) “네 자녀를 내가 (폭넓은 의미로서) 구원(save)할 것임이라”(사49:25d); 만민구원의 복음사역에 나서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그 후손까지 구원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러합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의 강력한 보호뿐만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구속의 역사까지를 포괄하고 있는 광의(廣義, 넓은 의미)의 개념입니다. 그 폭넓고도 영원한 은혜가 성도의 가정과 그 후손들에게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히 평생을 바쳐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사역에 매진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a) 내가 너를 억압하는 자들(oppressors)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 (b)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c)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saviour)요, 네 구속자(redeemer)요, 야곱의 전능자(the mighty)인 줄 알리라”(사49:26);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 앞에서 의사결정을 하여 시행하게 되면 어떠한 역사가 도래하게 될까요? 이 대목에서 이사야가 시원하게 답변을 해주고 있습니다;
(1) “내가 너를 억압하는 자들(oppressors)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사49:26a); 다윗의 시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시7:15-16). 하나님의 보응의 역사가 임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지배하며 약자를 억압하고자 하는 자는 그 보응을 받게 됩니다. 결국은 자신들이 약자가 되고 억압을 받게 되는 미래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출22:21-24).
(2)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사49:26b);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기를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피의 양을 하나님께서 측정하시고 계십니다;
1) 창세기에서 이미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자손은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15:16). 하나님께서 참으시는 그 선을 넘게 되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신9:4-5).
2) 훗날 똑 같은 역사가 선민들에게도 임하게 됩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왕하21:11-13).
3) 자기 피에 취하게 되고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업자득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입니다. 오늘날에도 또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3)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saviour)요, 네 구속자(redeemer)요, 야곱의 전능자(the mighty)인 줄 알리라”(사49:26c); 용어정리를 다시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세상 권력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 좁은 의미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대가를 치르고 해방시켜주는 것이 구속입니다. 그 두 가지 은혜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세상에 임하게 됩니다.
2)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바라보고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결심하게 되면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도와주십니다; ① 먼저 거듭난 자의 삶을 허락해주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운명의 창조와 같습니다. ②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적인 삶을 살아가며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③ 마침내 그 예물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미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글 제66장의 결론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사49:26)고 외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날 땅끝까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핍박으로부터 구원해주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속해주셨으니 두려움 없이 복음사역에 전념할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삶과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이 가능하도록 해주신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새로운 역사도 창조하시고 새로운 인생도 창조해주셨으니 사도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갈 뿐입니다(빌3:10-12). 그와 같은 은혜가 아무쪼록 모든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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