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36강(사49:14-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1일(월)
본문강해에 앞서 먼저 생각해보는 이슈, 사람은 무엇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사람은 무엇으로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구원을 주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조금 알기 쉽게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구원을 줄 수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피조물인 사람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베풀거나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제로섬 게임을 해야만 하는 인간세상에서 어떻게 모두를 살리고 돌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얻을 수가 없는 것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 둘째, 잠시의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잠시만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믿어야만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100년 안팎의 인생만을 살게 되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다한 그 다음의 영원한 삶은 전적으로 영생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해주신 그대로 책임을 져주시는 것입니다.
(3) 셋째,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인생 가운데 자신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4) 넷째, 그러한 믿음이 가능할까요? 세상적으로 영리하고 이치에 밝은 사람들은 그렇게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믿음을 가지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어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그리스도는 똑같이 모태에서 아기로 태어납니다(사7:14).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자라나고 공부하며 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합니다. 12살 때에 이미 자신의 아버지는 목수 요셉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선포하고 있습니다(눅2:49). 그리고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즉,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합니다. 그 방법은 자신에게 보내어주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대속의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요3:16, 6:39).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이 그를 무덤에서 부활시키고 승천시키게 됩니다(눅24:6, 51).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생을 얻는 방법을 직접 자신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인생을 사셨으며 어떻게 부활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전해줄 것입니다(눅24:44-49, 행1:8). 그 복음을 믿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주로 받아 들이는 자는 누구나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선지자 이사야가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동족들은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먼저 그와 같은 믿음을 얻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구원에서 완전히 탈락하고 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본문에서 이사야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사49:14-17)
이제부터 본문의 각 구절을 쪼개어서 살펴보고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b)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사49:14); 예루살렘을 의미하고 있는 ‘시온 산성’은 본래 가나안 원주민 여부스 족속의 것입니다(삼하5:6). 그 산성을 주전 1,003년경 열두 지파를 통일하고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빼앗아 왕도로 삼게 됩니다(삼하5:7). 그리고 주전 960년경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시온에 예루살렘 성전을 세웁니다(왕상6:1, 38). 그때부터 시온은 다윗 왕조의 정통성과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들을 가리키는 상징어가 되고 있습니다. 그 용어를 사용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the Lord, KJV)께서 나를 버리시며”(사49:14a); 여기서 ‘the Lord’로 표현이 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1)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인 시온의 백성들을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섬긴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백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게 되면 시온의 정통성을 자랑하고 있는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2) 그리고 이사야는 그때가 되어도 선민들은 자신들의 죄를 여전히 깨닫지를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할 것임을 여기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우리 선민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것입니다(사49:14a).
(2) “주(my Lord, KJV)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사49:14b); 그런데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해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창조주의 심판이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선민의 나라는 이미 완전히 망했으며 그 백성들은 유민이 되어 이방인들의 땅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1) 마침내 오랜 원망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야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을 호소하게 됩니다; “부디 불쌍히 여기셔서 잊지 마시고 구원해주십시오”(사49:14b의역). 그렇게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친숙하게 다가갈 때의 표현이 여기서 ‘주’(my Lord)라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2) 이방 땅에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 고생을 하면서 선민들이 무엇을 깨닫고 있을까요? “그것은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하고 그 구원을 독점하고자 했던 선민들의 잘못을 서서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백성들입니다. 그들 이방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며 살아가야만 했는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선민들입니다.
3) 자신들만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선민들의 죄가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해주기를 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 이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며 멸망의 대상이라고만 여겼던 것입니다. 더 깊이 성찰을 해본다면, 자신들의 기득권과 현세적인 이익을 영원히 누리고자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겼던 그 죄가 엄청난 불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a)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b)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창조주 하나님을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1)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사49:15a); 자식을 얻기 위하여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키우고 있는 자는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우신 심판의 하나님 여호와(the Lord)를 아버지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친숙한 구원의 하나님(my Lord)은 어머니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는 훗날 이방 땅에서 고생 끝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소원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구원하고자 시도하시는 하나님을 여기서 어머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이 절절합니다; “자신의 뱃속에서 잉태하여 세상에 태어나게 된 그 아들,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그 자식을 어찌 어미가 한시라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어미에게 다시 돌아오고자 하는 그 아들을 어찌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하겠느냐?”(사49:15a)는 것입니다.
(2)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b); 그렇다면 선민의 자손들이 이방 땅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아직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은 장차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마침내 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 훗날 있게 될 것이라고 여기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식을 잊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언제나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사49:15b).
셋째로, “(a)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b)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6);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며 어떻게 그들을 기억하고 계시는지 이사야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49:16a); 손바닥에 글씨를 쓴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메모지가 없을 때 급히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임시적인 기록입니다. 둘째, 자주 들여다보기 위하여 손바닥에 글씨를 적습니다. 특히 본문에서와 같이 ‘손바닥에 새겼다’(사49:16a)고 하는 경우에는 지워지지 아니하게 새겨서 영구히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자주 들여다보고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손바닥 안에 무엇을 새기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들의 이름입니다. 여기서는 선민들의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그보다 훨씬 방대합니다. 생명과 목숨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의 이름이 그 가운데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진술하고 있는 욥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
2) 구원을 얻는 자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예수님과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가리라”(계21:27). 그렇다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과 하나님의 손바닥에 그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3)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책 보다는 아무래도 손바닥이 더 간편합니다. 따라서 쉽게 손바닥을 펼쳐보고 필요한 조치를 즉시 취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둘째,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친밀성을 보이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책에 기록도 해주지만 수시로 보기 위하여 손바닥에 새겨둡니다. 그것은 마음에 새겨둔다는 것과 같은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신6:6:6).
4) 결국, 생명책에만 기록이 되어 있어도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손바닥에 적혀 있으면 더 확실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손바닥에서 그것을 빼앗아 갈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2-3),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2)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6b); 하나님은 선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굉장히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바라보고 계십니다;
1)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곧 무너질 예루살렘 성곽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은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19:41-42). 그러므로 결국에는 선민들을 구원하여 새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이실 것입니다.
2) 그래서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 높은 성곽에 천성 열두 대문을 만들고 그 위에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겨두고 계십니다(계21:12). 따라서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들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그 성벽을 항상 바라보고 계신다고 여기서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사49:16b).
넷째로, “(a)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b)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49:17); 먼 훗날 이스라엘 자손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사49:17a);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마음이 급하십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그 표현이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사49:17a)라고 빠른 걸음걸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49:17b); 완벽한 선민들의 구원을 위하여 적들에 대한 조치를 확실하게 하십니다. 선민들의 나라를 헐며 그 터전을 황폐하게 하던 자들을 모두 멸망시켜버리시는 것입니다. 마치 홍해에서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를 모두 수몰시켜버린 것처럼(출14:26-28) 영원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보내어버리십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이사야가 동족인 선민들로 표현하고 있는 민족은 사실 하나님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처럼 두 가지의 경우가 성도들에게도 발생할 것입니다;
(1) 성도들만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고자 한다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 것입니다.
(2) 반대로,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따라서 온 세상에 말씀을 전하며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공생애를 살아가게 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서 수시로 들여다보시고 성도를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에도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이 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선민과 성도들이 전자와 같은 이기적인 선민우월주의 형태의 삶이 아니라 후자와 같이 만민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손바닥에도 적어두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갈 새 예루살렘 성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집을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부모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아무쪼록 아버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하고서 만민구원에 적극 나서며 다 함께 천성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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