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37강(사49:18-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2일(화)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살펴보는 이슈, 선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어째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는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여호와를 만나고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전하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사6:1-8). 그때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위탁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주의사항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선민들이 이사야가 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믿지를 아니할 것임을 먼저 알고 있으라는 것입니다(사6:9-10). 어째서 선민들이 이사야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자신들 선민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이 이해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선민인 자신들은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출2:23-25). 그 반면에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듯이(창12:3, 17, 20:3, 7, 18)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는 이방인 나라와 민족들은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출12:29-30, 14:26-28, 왕하19:35, 사45:1-6). 그것이 선민우월주의에 입각한 하나님 말씀의 이해입니다.
그것은 선민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기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언약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민들이 배제하고 있는 그 부분이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선민들이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그 부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호하시고 번성하게 하시는 그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창세기에서 찾아보면 그 부분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12:3-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창26:4-5),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8),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4).
위와 같이 그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모세가 여러 번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로 그 목적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신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혀 인정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 번성하게 되면 천하만민들이 선민을 섬기며 그 그늘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시는 복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선민들의 생각은 대단히 이기적인 것이며 자신들의 집단이기주의를 일종의 선민사상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만민구원에 있다고 외쳐도 그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를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지자인 이사야는 선민들의 미래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예언으로 전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내용은 동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이방 땅에 끝까지 전하지 아니하게 되면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그 백성들이 이방인의 땅에 유민이 되어 떠돌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이사야는 선민우월주의와 만민구원사상의 차이와 그 결말에 대하여 무엇을 예언하고 있는가?(사49:18-21)
이미 본문에서 이사야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대의에 대하여 위에서 설명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각 구절을 검토하면서 그 깊은 뜻을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b)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c)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사49:18); 선민우월주의에 매달리게 되면 전도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민구원사상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 땅에 전파하게 되면 그 열매가 풍성합니다. 함께 구원 받기를 소원하며 땅끝까지 복음 들고 가는 성도들의 그 앞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이 다음과 같이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1)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사49:18a);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이방 땅에 전하게 되면 큰 역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동서남북 모든 이웃나라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는 백성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하여 말씀을 더 배우고자 전도자와 선교자 주위에 몰려들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이사야가 미리 내다보고서 예언을 동족들에게 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2)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사49:18b); 전도의 열매와 선교의 열매가 풍성할 것임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장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의 이름과 영생을 걸고서 맹세를 하시고 있습니다. 그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의 능력으로 반드시 그렇게 시행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종말로 향하여 정신 없이 가고 있는 인류의 역사이지만 그 이면에는 만민구원과 만물구원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안배가 숨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사49:18c); 만민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어떠한 부활을 맞이하게 될까요? 이사야는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사49:18c)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후 새 예루살렘 성에서 모든 성도들을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고자 하십니다(계21:2, 9-14). 그리스도가 신랑으로서 천국잔치에 참석하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세례 요한은 그 잔치자리에 신랑의 들러리로 참석만 할 수 있어도 그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자신의 제자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요3:29)
둘째로, “(a)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b)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사49:19); 선민사상만 고수하고 자신들만 현세적인 복을 누리며 구원을 받겠다고 고집한 결과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황폐화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온 세상 만민이 모두 구원받기를 소원하며 하나님 말씀을 땅끝까지 전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기적처럼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1)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사49:19a); 선민들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의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을 섬김으로 천하만민에게 복이 돌아가도록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자신들 선민들만이 얻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세상사람들을 모두 구원하여 영생의 복을 주고자 하셨는데 선민들은 그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것도 지극히 현세적인 복에 국한이 되고 있습니다.
2) 그것은 만민구원, 영생구원이 아니라 선민들만의 현세적인 구원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결국 영생하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선민들은 이방 신이나 우상처럼 섬긴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엄청난 잘못입니다. 그 결과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이방 땅에서 유민으로 떠돌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은 완전히 버려진 땅 폐허가 되고 맙니다.
3)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새로운 역사가 발생합니다(롬11:24). 이방인들이 그들 주위에 몰려듭니다. 그리고 버려진 예루살렘과 유다의 땅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났던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해서 현장을 방문하여 생생하게 더 많이 배우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예루살렘은 그 규모에 비해서 인구밀도가 조밀하며 순례자와 방문자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고 있습니다.
(2)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사49:19b); 선민들의 땅을 삼켰던 제국들이 역사적으로 앗수르, 신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사라센 등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자취가 그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에 현대 이스라엘이 그 자리에 다시 건설이 되어 있습니다. 기이한 역사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나온 그 예언이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말씀인 것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a)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셋과 같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b)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사49:20); 그와 같은 역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섭리에 대하여 이사야는 창세기의 말씀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셋과 같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사49:20a); 아담부부는 며칠 사이에 두 아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장남 카인이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암살해버리고 그 일이 악하여 하나님께서 카인을 멀리 동방 ‘놋’ 땅으로 유배를 보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창4:8-16). 절망에 빠진 아담부부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대안으로 다른 씨 곧 ‘셋’이라는 아들을 또 주신 것입니다(창4:25). 그 아들 ‘셋’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사49:20b); 모세는 창세기 제1장을 기록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1:26-27). 그런데 창세기 제5장에서는 ‘아담과 셋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1)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양만 닮아 있지만 아담과 셋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5:1-3).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셋’의 후손들의 계보를 별도로 등재하고 있습니다(창4:26, 5:3-32).
2) 동일한 관점에서 노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상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짐승과 같이 약육강식의 사회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로지 셋의 후손인 노아만이 의인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창6:1-9). 그리고 노아 홍수 후에 의인 노아의 후손만으로 현대인류가 번성하게 됩니다(창9:1, 19, 10:1-32).
3) 이사야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훗날 다시 발생할 것임을 여기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사49:20b). 이사야 예언의 끝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 성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로 마감이 되고 있습니다(사65:17-25). 그 지경이 얼마나 넓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인생 가운데 올바로 실천하는 성도들은 그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넉넉하게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a) 그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b)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느고, (c)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마치 7천명의 의인처럼)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사49:21); 전도와 선교 그리고 양육의 열매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1) “그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사49:21a); 복음서를 보게 되면, 성도들이 전도와 선교에 나서게 되면 영적으로 추수가 이루어집니다(요4:34-38). 그것은 구약시대의 선지자인 이사야의 입장에서는 선민들이 전통적인 선민우월주의와 하나님독점사상을 버리고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만민구원사상으로 전해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행할 수만 있다면 그 열매가 참으로 풍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그 발걸음에 창조주의 임재와 능력 행하심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이 오히려 어리둥절하여 외칠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한 것일까? 나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그 열매가 참으로 풍성하구나!”(사49:21a 의역).
(2)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느고”(사49:21b); 선민사상을 고집하였기에 유대인들의 나라가 망하고 그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이방세계를 떠도는 나그네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참하고 보잘 것이 없는 인생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되자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그들 이방인들이 풍성하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사49:21b).
2)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에 그리스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상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3)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마치 7천명의 의인처럼)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사49:21c); 선지자 엘리야의 행적을 떠올리게 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1) 엘리야는 능력이 대단한 선지자입니다. 한번 기도하자 3년 6개월간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가뭄이 들었습니다(왕상17:1, 약5:17). 또 한번 기도하자 큰 비가 쏟아집니다(왕상18:41-45, 약5:18). 그리고 백성들에게 부르짖자 그들이 용기백배하여 바알 선지자 450명을 도륙하고 맙니다(왕상18:19, 40).
2) 하지만 바알 우상을 섬기는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복수를 맹세하고 엘리야를 잡아죽이려고 군대를 풀자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왕상19:1-3). 조국 이스라엘 왕국에 자신이 피신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조 유다 왕국으로 도망을 칩니다. 브엘세바에서 기진맥진하여 죽기를 기다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인도하십니다(왕상19:3-8).
3)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엘리야가 자신의 신세한탄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는 하나님신앙이 사라지고 이제 저 혼자 남아 있는데 어찌하실 것입니까? 저마저 죽고 나면 깨끗하게 모든 일이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왕상19:14). 그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엘리야는 정신이 번쩍 들고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7,000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4)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거대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만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모든 북쪽의 동포들은 다 우상숭배자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같은 의인 7,000명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엘리야가 만나서 제자로 삼게 됩니다. 그 제자의 이름이 바로 엘리사입니다(왕상19:19-21).
5) 그러므로 성도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상숭배가 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있는 그곳에서도 7,000명의 의인을 숨겨놓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역사를 믿고서 전진할 따름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생명력이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이치를 따라서 인류의 역사와 자연의 흐름이 운행이 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말씀의 뜻을 벗어나서 제멋대로 굴러갈 수 있는 인간의 역사와 영적인 흐름은 없습니다. 따라서 좁고도 이기적인 선민우월사상이나 현세적인 구원사상을 버리고 모두가 만민구원 영생구원의 시대에 합류를 하여야만 합니다.
이미 본문에서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그대로 메시아가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는 본격적으로 열리게 됩니다. 그 대열에 합류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미래가 전개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전도와 선교의 열매가 풍성할 것입니다. 양육의 열매도 풍성합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각별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의인들이 발생하여 만민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700년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예언이 실로 놀랍습니다. 그의 예언 그대로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만민구원에 나선다면 그들 선민들의 구원도 풍성해질 것입니다(롬11:12, 24). 그와 같은 사실을 먼저 알고서 평생을 이방인 사도로 살아간 바울의 생애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사도 바울처럼 살아감으로써 한민족의 통일과 구원이 앞당겨지고 풍성해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간구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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