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42강(사50:7-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6. 08:55

 

이사야 강해 제242(50:7-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27(주일)

 

이사야가 증언하고 있는 주 여호와의 도움은 무엇인가?(50:7-9)

 

이미 지난번 강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지자 이사야는 주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학자들의 혀와 하나님말씀을 학자들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50:4). 이사야가 여기서 특별히 학자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학문과 철학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학자들이 평소 이치를 규명하며 그 연구한 바를 논리적으로 사람들에게 진술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는 사람들의 생각과 지혜를 훨씬 뛰어넘고 있는 초월적인 것입니다(55:8-9). 그렇다면, 차원과 급이 전혀 다른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를 어떻게 피조물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가 있을까요?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사실 뛰어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두뇌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자입니다. 차원 높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귀에 들려오게 되면 그것을 선지자의 두뇌가 일반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로 변환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깊이 묵상해보면, 그것은 뇌 구조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선지자는 창조주의 입장과 피조물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먼저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 두뇌회전의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마치 자식과 같은 피조물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다루기를 원하시고 계시는가?하는 그 마음을 먼저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 듣고 사람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훗날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이사야는 주 여호와의 피조물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보면 두 가지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곧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전해주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들의 생각이나 종교적인 교리와 다르다고 반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그 뜻만은 꼭 전해주고 싶어합니다(50:5-6). 둘째, 사람들의 평가와 여론에 좌지우지되지를 않습니다. 설혹 종교적인 법정에서 정죄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위협에 굴복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롭다 하시는 이가 주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진리와 성령님의 임재로 선지자와 성도의 마음을 굳건하게 붙들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것이 선지자와 성도들을 돕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은 위의 두 번째 현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그 내용을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하여 각 구절을 분석하고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b)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50:7); 이사야는 주 여호와의 도우심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50:7a);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교의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 예수님의 교훈과 무덤에서 부활하였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부끄러워하였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1:16 반대해석). 그렇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그에게 환상 가운데 임재하였을 때에(9:3-5) 그의 생각이 달라지기를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실제로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부인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1:17). 그리고 그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랍비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되어 남은 생애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신앙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신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9:15, 22:21). 그와 똑 같은 이야기를 이사야가 본문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50:7a).

(2)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50:7b); 사람은 수치를 당하게 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것을 참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백성들로부터 수치를 당할지라도 그러한 변화가 발생하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수치가 이사야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단단한 부싯돌과 같이 자신을 단단한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셨기에 문제가 그를 피해가고 있다는 이사야의 간증입니다.

2)    실제로 사람들의 평가절하나 모욕이 이사야의 안색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심과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에 선지자에게 수치를 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할 일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선지자가 수치를 당할 때에 사람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도록 조치하십니다. 이사야 자신의 얼굴을 돌려세워 그 눈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그 앞에 놓인 화로를 바라보게 되면 어느 사이에 자신의 얼굴이 거룩하고 영혼이 굳건해지는 것입니다(6:1-7, 50:7b).

둘째로, “(a)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5:32)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b)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50:8); 이사야는 주 여호와께서 자신을 의롭다 하시고 대적과 친히 싸워주신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간증은 훗날 그리스도 예수님에 의하여 그대로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1)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5:32)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50:8a); 사람들이 선지자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1)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로 불리고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합니다(20:7). 애굽의 황제인 바로나 블레셋의 연맹 왕인 아비멜렉이 그 때문에 아브라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비멜렉의 고백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21:22-23).

2)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도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5:32),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8:16).

(2)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50:8b);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진리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굳건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대적하고 있는 무리에게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50:8b).

셋째로, “(a)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b) 보라 그들은 다 과 같이 헤어지며 이 그들을 먹으리라”(50:9); 이사야는 주 여호와로부터 받는 대접과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50:9a); 이 땅에서는 선지자나 메시아가 그들의 종교적 교리와 다르다고 하여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떻게 판결이 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사야의 경우에는 자신이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이 세상의 정죄가 모두 헛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50:9a).

(2)  보라 그들은 다 과 같이 헤어지며 이 그들을 먹으리라”(50:9b); 사람들의 정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죄한 그 사람들이 100년 안팎의 짧은 인생을 살다가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영원히 헤어지거나 좀이 먹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하심입니다(10:28).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사야가 유한한 사람들의 한시적인 비난과 대적행위에 대하여 겁을 집어 먹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 제8장의 기록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메시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6-17)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천하려고 하다가 세상의 도전과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선지자 이사야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는 예언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조금도 세상의 비난이나 핍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욱 강하게 붙들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영적으로 임재하고 계심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붙드심을 체험하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구원의 복음으로 온 세상에 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