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43강(사50:10-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6. 08:57

이사야 강해 제243(50:10-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28()

 

회개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스스로 죄인인줄 아는 자인가 아니면 스스로 의인으로 생각하는 자인가?(50:10-11)

 

훗날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가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레위를 불러 제자로 삼으십니다(2:14). 당시 로마의 속국은 관세를 거두어 모조리 로마황제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백성들은 관세를 거두어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세관원들을 민족의 반역자이며 제국의 앞잡이라고 욕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그들을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2:15). 그런데 메시아의 능력을 행하고 있다는 나사렛 예수가 그 같은 죄인을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비난이 예수님 일행에게 쏟아집니다(2:16).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그리스도로 알려지고 있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그때부터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 동안 레위 인이면서도 동족의 지탄을 받고 있던 부끄러운 인생에서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선물로 받은 마태라는 성도로(9:9:10) 신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며 죄인을 불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만드는 일에 전력투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죄인과 함께 잡수시며 세리를 불러 제자로 삼으시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칭 의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의로움을 뒷받침하고 있는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11:48, 53).

그와 같은 훗날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회개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스스로 죄인인줄 아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50:10). 그와 반대로, 자기 스스로 의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결국은 고통스러운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는 것입니다(50:11). 과연 그와 같은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두 구절을 면밀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내용을 파악하고자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b)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50:10);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누가 그러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1)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50:10a);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과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봅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종이며 여호와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시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면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사회적인 통념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신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경외한 사람입니다. 그는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을 합니다(22:1-3).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하시는 여호와의 명령이 상당히 이상한 것이지만 그래도 주인의 명령이므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목을 치려고 하자 황급히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말리십니다(22:10-11). 그리고 여호와 이레로 숫양을 번제물로 마련하여 주십니다(22:13-14).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칭찬하십니다(22:12).

3)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주전 740년경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습니다(6:1-8). 그는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을 예언으로 받은 선지자로서 동족들에게 그 예언을 전하게 됩니다(6:9-13). 그런데 여호와의 선지자이며 종인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여 듣고자 합니다(39:5-8).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의 목소리를 모두 듣고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2)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50:10b);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1)    그러므로 이사야가 보기에 모두가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멀리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기적으로 살고자 합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밝은 빛 아래로 나아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2)    그러한 죄인들이지만 아직도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흑암 중에서 서로 이기적으로 살게 되면 모두가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어 달리는 자들에게는 그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오는 자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앞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조치가 바로 메시아를 보내어주시는 것이며 성령님을 보내어주시는 것입니다(48:16).

둘째로, “(a) 보라, 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b)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c)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50:11); 하나님 경외에 이르지를 못하며 하나님의 종이 전하는 말씀을 무시하게 되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이사야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보라, 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50:11a); 인류의 문명은 불을 피우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불을 피우게 되면 그 빛이 사방을 밝히게 됩니다. 그래서 문명과 더불어 문화가 발생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봅니다;

1)    사람의 정신과 사회를 밝히는 빛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철학자들은 진리는 나의 빛”(VERI TAS LUX MEA)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계몽운동과 같은 것들이 모두 불을 피우고 빛을 던지는 운동입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적인 철학과 과학이 발달하게 됩니다.

2)    사회의 발전을 주도하려는 이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 등이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시대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마치 횃불과 같습니다. 그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서는 자들이 기존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혁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2)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50:11b); 유물론자들은 철학과 과학의 발전이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회를 구원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자들과 혁명론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인 갈등과 역사적인 모순을 해결하고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선민사상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절대적으로 의롭고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하여 자신들이 헌신하고 희생을 하게 되면 그 열매를 얻게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3)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50:11c); 이사야는 유물론자들과 인위적인 개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스러운 종말 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그것은 마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 결과가 허망합니다(44:9).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창조주의 뜻과 방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만민과 만물을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전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만 구원하고 이방인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죄인이므로 전부 회개하고서 구원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만이 옳으며, 집단적으로는 자기 민족만이 옳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은 모두 의롭지 못하므로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 이유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와 같은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가 겉으로는 선민사상으로 그리고 자기들만이 옳다고 하는 의인사상으로 포장이 되고 있습니다.

4)    그러므로 그 결말은 창조주가 원하시는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사야가 상당히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50:11c). 요컨대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의로움과 집단적인 정의만을 내세우게 되면(10:3)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자와 자신이 의인인 줄 알고 있는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죄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있는 줄 알고 있으므로 회개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인 줄 알고 있는 자는 그것이 어렵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하나님의 용서와 죄 사함이 자신에게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며 유한한 목숨을 가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만인투쟁의 사회를 평화공존의 사회로 변화시키는 정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발견한 진리나 이데올로기로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와 능력에 의지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어설픈 자기 사랑이나 자신의 의로움, 그리고 이념지상주의는 재고(再考, 다시 생각함)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특히 유일하신 창조주 앞에서는 꺼낼 수도 없는 카드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음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본문을 읽으시면서 그러한 마음가짐을 정립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