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51강(사51:20-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9. 03:38

이사야 강해 제251(51:20-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216()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51:20-23)

 

이사야는 제51장을 끝내기 전에 본문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오로지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얻기 위하여 그 환상에 취하여 정신 없이 달려가고 있는 자들의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곤궁함에 대하여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51:21). 그들은 세상적인 유혹과 함정에 빠져서 한평생 허우적대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객사(客死, 길에서 죽는 것)를 하고 말 것입니다(51:20). 생명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그 영혼이 돌아가지를 못하고 음부의 세계에서 영원히 헤매게 되었으니 그것이 객사와 같은 것입니다. 관련구절을 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51:21); 여기서 곤고(困苦)하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외롭고 쓸쓸하며 그 형편이 곤궁하고 고생스럽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맨 정신으로 그러한 처지를 견딜 수가 없어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버리는 것입니다.

1)    그와 같은 사람의 심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는 노아입니다; “노아는 홍수 후에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옵니다. 이제 세상에는 사람으로서는 그의 가족들 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 자신이 족장입니다. 최고어른인 그는 외롭고 쓸쓸합니다. 친구가 없으니 그 외로움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리고 집도 새로 짓고 새로이 문명을 일으켜야만 합니다. 우선 종자를 뿌리고 농사부터 지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합니다. 그 형편이 곤궁하고 고생스럽습니다. 그래서 포도농사를 지어 얻은 열매로 술을 만들어서 마십니다. 마음껏 취해서 세상만사를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 결과 부끄러운 모습을 그만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맙니다”(9:18-23).

2)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들지만 본문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하여 골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만 할 수가 있다고 하면 다른 모든 것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공지향주의 세상사람들을 향하여 이사야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에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51:20);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버리고 오로지 세상적인 이익만을 쫓아서 살아가는 자들이 맞이하게 되는 비극에 대하여 이미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위에서 다시 살펴보게 되면, 첫째, 그 후손들이 결국은 세상에서 실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영악한 세상사람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서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무런 대책이 없이 길가에 나앉게 됩니다. 둘째, 그와 같은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분노와 견책이 그들과 그 자손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세상재미에 취하여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분노의 큰 잔을 마셨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그렇지만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분노의 큰 잔을 거두어들이실 것이라고 제22절에서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구원을 베풀고자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22절의 내용을 좀더 살펴봅니다;

(1)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51:22a);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나게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갑을병정’(甲乙丙丁) 네 사람이 똑 같은 죄를 범했는데 그 가운데 만 처벌을 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처벌을 유보하고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1)    그러한 불이익을 편파적으로 당하고 있는 경우, ‘은 재판장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항의를 할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도 죄질이 같으므로 저와 똑같이 처벌을 해주십시오. 그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그것이 아닙니까?

2)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세 사람, 을병정에게 차례대로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합니다.

3)    하나님이 우선 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고 나머지 세 사람에게 집행을 늦추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갑이 먼저 당하고 있는 그 참상을 보고서 나머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4)    그러나 회개를 하는 이방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평하게 동일한 처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51:22b); 분노의 잔을 마시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자식과 같은 인류를 그렇게 멸망시키고 싶지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래서 심판 대신에 구원의 길을 모색하십니다. 구원자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의 구원사역입니다. 그 내용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복음’(福音, 복된 소식, Gospel)으로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셋째로, 하나님의 긍휼로 먼저 구원함을 받게 된 성도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분노의 잔을 마시고 비틀거리고 있는 세상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경외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을까요?(51;23) 이사야는 제53장에서 여호와의 종의 모습으로 복음사역의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모세는 창세기 제23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성도들의 선교의 자세를 엿볼 수 있도록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먼저, 이사야가 묘사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3-6). 이사야가 묘사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로 오시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그 뒤를 따르고자 하면 역시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 핵심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공생애 가운데 당하고 있는 고난과 핍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멸시버림’, ‘간고질고라는 네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멸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경멸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5:43-48). 약육강식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강자와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는 정반대입니다. 마치 강자에게 굴욕을 당한 약자나 실패자처럼 남을 섬기면서 봉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그의 교훈을 경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멸시합니다. 자연히 메시아를 외면하며 아예 버려버리고자합니다. 그러므로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는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 중에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것이 간고입니다. 그리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질고입니다.

2)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이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여호와의 종, 메시아)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속의 은혜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대조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메시아가 징벌, 고난, 찔림을 받음으로 우리의 허물이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상함으로 우리의 죄악이 사함을 받게 됩니다.  결국 메시아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53:4-5).

(2)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점령한 새로운 강자 헷 족속 앞에서 겸손합니다. 그러자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방백으로 인정하고서 그에게 호의적입니다. 창세기가 제23장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브라함)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23:3-6). 조금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아브라함은 이방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헤브론의 호족으로 살게 됩니다. 그는 일찍이 가나안을 침략한 메소포타미아 다국적군대를 쳐부수고 인질과 재물을 되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14:13-16). 따라서 가나안에서의 그의 입지는 단단했습니다.

2)    그러나 헤브론 땅의 가뭄을 피하여 오랜 세월 비옥한 블레셋 그랄 땅에 머물다가(20:1, 21:34, 22:19) 되돌아오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습니다. 가나안의 지배세력이 아모리 족속에서 헷 족속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입니다(23:2). 따라서 그가 옛날 아모리 족속의 호족 마므레에게서(13:18, 14:13) 산 땅은 소유권 자체가 사라져버렸습니다.

3)    그러므로 본처 사라의 별세로 당장 장지가 필요해진 아브라함은 울며 겨자 먹기로 헷 족속에게서 자신의 옛 땅을 다시 돈을 주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얼마나 억울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의 태도는 너무나 겸손합니다. 자신을 그들 앞에서 나그네이며 거류하는 자에 불과하다”(23:4)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    이방인 앞에서 그와 같이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신앙을 지켰기에 헷 족속의 태도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호의적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훌륭한 선지자이며 영적인 지도자이다”(23:6)라고 인정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이방 땅에 전할 수 있는 성도의 신앙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분노의 큰 잔을 마시게 되는 선민과 이방인들에 대하여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선민으로부터 시작이 된 하나님의 분노의 큰 잔을 모든 이방인들이 마시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51:23). 하나님의 분노와 견책이 그 속에 들어 있으니 그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 모릅니다(51:20).

그와 같은 미래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분노의 큰 잔을 거두어들이시고(51:22) 메시아를 보내어 주십니다. 그 분노의 잔을 메시아가 대신 마시고 이 세상에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53:6).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이 어떻게 고난을 당하며 대신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제53장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 대속의 은혜를 깨닫게 된 성도들이 남은 인생을 만민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를 (짓밟고서)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그 대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51:23).

과연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의 종과 같이 헌신하며 희생할 수가 있을까요? 여호와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가 그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성도들은 그 길을 따라가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결단만 한다면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복음사역을 위하여 끝까지 겸손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