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54강(사52:10-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10. 07:03

이사야 강해 제254(52:10-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219()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소식이 땅끝까지 전파될 것이라고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52:10)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들인 유대왕국의 백성들에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예언은 동족들이 원하고 있는 선민만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만민구원에 대한 예언입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팔이라고 볼 수 있는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옴으로써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열리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이 바로 본문의 제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52:10).

조금 더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선민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계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다윗의 제국을 회복하고 다시 선민의 영광을 온 세상에 떨쳐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선민들의 기대는 잘못된 것입니다. 메시아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한 속죄의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그 사실을 믿는 자는 선민 이방인 구별이 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고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복된 좋은 소식”(good tidings of good, KJV, 52:7)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된 좋은 소식’, 그것이 바로 복음’(福音, Gospel)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그 용어 복된 좋은 소식에는 같은 구절에 의하여 두 가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가 구원의 선포’(publisheth salvation, KJV, 52:7)이고 둘째가 시온에게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선포하는 것’(saith unto Zion, Thy God reigneth!, KJV, 52:7)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 열방과 만민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세상 끝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말해주고 싶어하는 복음의 의미는 세상의 그 어떤 조직체나 권위체도 창조주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과 직접 통치의 뜻을 가로막아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준엄한 창조주의 선언인 것입니다.

실제로, 선지자 이사야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타락한 다윗 왕조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의 관점은 다윗 왕조의 왕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있으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섬기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 선민들은 자신들만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현세적인 축복과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동시에 이웃 열방들과 이민족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소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민들은 여호와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들 유대인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선민들의 소원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민만을 위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동족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어야 할 제사장나라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멸망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으니 참으로 회개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에 비추어보지도 아니하고서 국가의 대사를 제멋대로 정책결정을 하고 있으니 그 잘못이 큽니다. 따라서 다윗 왕조의 왕들도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응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선민들이 이방인의 땅으로 끌려가서 노예와 같은 삶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39:5-7).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소식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오고 있으므로(52:10) 이제 이방인들은 어찌해야만 하는가?(52:11-12)

 

첫째로, 부정한 장소를 떠나고 다시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 대목을 이사야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52:11a). 무엇보다도, 믿음의 열조 가운데 아브라함의 경우와 야곱의 경우를 살펴보면 본문의 내용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12:1).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던 데라가 그만 도중에 하란에서 움직이지를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31-32). 이방인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하나님신앙과 메소포타미아 고대문명을 전해주어야 하는 데라가 그 사명을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데라를 영적으로 죽은 것으로 치부하고서(7:4) 그의 아들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장소를 떠나서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신앙을 온 세상에 전하는 발걸음입니다(12:3).

(2)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얍복 시냇가에서 숙적인 쌍둥이 형 에서와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됩니다(32:28-32, 33:4-11).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야곱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야곱이 하나님과 약속한 자신의 서원을 지켜야만 합니다(28:17-22). 벧엘로 남하하여 제단을 쌓고 하나님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배신을 합니다. 북쪽 큰 도시 세겜으로 올라가서 사치와 향락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33:18-20, 34:1). 그 결과 소위 세겜 사건을 맞이하고 맙니다(34:2, 25-29). 세겜 주변의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게 되면 집안이 절단이 날 판입니다(34:30).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다시 살려달라고 매어 달립니다. 그때 주시는 하나님의 처방이 다음과 같습니다; “세겜을 떠나서 애초의 약속의 장소 벧엘로 찾아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라.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모든 우상과 패물을 제거하라”(35:1-5).

(3)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도 그러합니다(19:9-14);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경계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서 그 말씀대로 행하고자 노력합니다”(19:7-8). 그것이 세상의 노예근성을 벗고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방법입니다(19:5-6).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말씀을 온 세상에 앞장서서 전해야만 합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52:11b).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은 레위인들입니다(4:4-16). 특히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서 백성들 앞에서 행진을 합니다(3:3, 6, 8).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 그 법궤를 메고서 전진을 하고 있기에 요단 강을 건너서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들일 수가 있습니다(4:13-17).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서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난 이방인들은 말씀을 생활화하면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수행해야만 합니다(28:18-20, 1:8).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게 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66:20-21).

셋째로, 장차 이루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바라보고 이미 역사 가운데서 보여주신 그 섭리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52:12); 하나님께서는 항상 앞서 역사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미래의 역사를 예비하시고 성도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65:17-18). 그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서 새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기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65:19).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역사 가운데 섭리하신 그 내용을 묵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51:13). 그 가운데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이치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가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역사섭리의 이치가 중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뜻과 그 방법으로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역사를 경영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위의 본문 말씀은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성도들을 뒤에서 보호하시며 그 앞길을 개척해주시는 은혜가 그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52:12);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시는데 그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생과 역사까지 창조하시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살이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창조물인 인간을 그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어 마치 자식과 같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인생살이에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피조물인 인간이 종이라고 하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주인의 허락과 하나님의 앞서 행하심이 늘 필요합니다.

(2)  그와 같은 이치를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24:7).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나아갑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사자를 먼저 보내셔서 그 앞길을 인도해주시는 은혜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3)  복음전파의 길에 옆이나 뒤에서 습격을 해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성도를 지켜주십니다. 그 약속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강력한 사법적인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12:3a).

2)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전쟁의 승리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말렉같이 기습하는 적들과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7:11),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17:16).

(4)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재물을 얻기 위하여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 아니해도 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일 때문에 너무 황급해하거나 그 속으로 도망을 칠 이유가 없습니다.

1)    그와 같은 이치를 출애굽기가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12:35-36).

2)    출애굽하는 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이 얼마나 당당한지 모르겠습니다. 도망치듯이 그렇게 빠져 나오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당당하게 그리고 여유 있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배려해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짧은 본문이지만 다음 네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첫째, 부정한 장소를 떠나고 다시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만 합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살이에 매몰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백성은 스스로 그 장소를 떠나고 청결한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준비입니다.

(2)  둘째,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말씀을 온 세상에 앞장서서 전해야만 합니다. 그 옛날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서 앞서 가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앞서 나아가야만 합니다. 창조주의 살아계심과 그 뜻을 전하며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야만 합니다.

(3)  셋째, 장차 이루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바라보고 이미 역사 가운데서 보여주신 그 섭리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4)  넷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성도들을 뒤에서 보호하시며 그 앞길을 개척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당당하게 복음을 생활화하고 온 세상에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구체적인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