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25강(사48:2-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1. 16:15

이사야 강해 제225(48: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121()

 

출애굽기에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 그러나 거룩한 백성 제사장나라가 되어야 할 선민들이 그 이마에 제사장의 거룩한 패가 없고 그 목이 바로처럼 완고해지고 말았다는 이사야의 지적(48:2-5)

 

이사야는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4절에 숨겨두고 있습니다;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頑固)하며, 은 쇠의 힘줄이요, 이마는 놋이라”(48:4).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뜻과 명령 앞에 완고하게 자신의 고집을 고수하고 있는 자가 애굽의 황제 바로이며 그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모세가완악’(頑惡)하다고 하는 용어를 출애굽기에서 바로에게 14(4:21, 7:3, 13, 22, 8:19, 9:12, 34, 35, 10:20, 27, 11:10, 13:15, 14:4, 8), 애굽 백성에게 1(14:17), 도합 15번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처음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32:9). 모세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34:9). 그 대목을 연상할 수 있도록 본문에서 이사야가 쇠의 심줄이요’(48:4)라고 언급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이 성막을 출입할 때에 이마에 하나의 패를 붙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역시 출애굽기의 기록입니다; “너는 또 순금으로 패(plate)를 만들어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위에 매되 곧 관 전면에 있게 하라. 이 패를 아론의 이마에 두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과 관련된 죄책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28:36-38).

풀이를 해보자면, 첫째, 대제사장인 아론의 이마에는 여호와께 성결’(Holy to the Lord)이라고 새겨진 패(plate)가 부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패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쁘게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아론의 이마의 그 패는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 들보와 양쪽 문 기둥에 뿌려져 있어야만 죽임을 면할 수 있듯이(12:23) 그 패가 이마에 있어야만 죄를 사해주고 죽임을 면할 수 있도록 해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정직하게 서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3:5, 34:8-9, 호렙 산과 시내 산에서 모세가 그러합니다). 그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 제사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제사장의 직분도 수행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설명해주고 있는 대목이 바로 네 이마는 놋’(48:4)이라고 하는 이사야의 지적입니다.

요약을 해보자면, 지난 번 강해에서 다룬 48:1’ 절에서는 이사야가 창세기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공의와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번 강해에서는 이사야가 출애굽기의 내용을 가지고 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도록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깊은 내용을 상세하게 알 수 있도록 본문의 각 구절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그들은 거룩한 성(예루살렘)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b)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c)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48:2); 선민들이 온 세상에 자랑하고 있는 것, 곧 유대인들의 포장용 신앙고백 세 가지를 여기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1)  그들은 거룩한 성(예루살렘)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48:2a);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절기 때마다 성전을 방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1010일에는 매년 모든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대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16:29-34). 그러므로 가장 거룩한 백성이 그들 유대인 선민들이라는 자랑입니다.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48:2b); 선민의 나라를 세우신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백성입니다(6:4-9). 세상의 열방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제멋대로 우상을 섬기며 또는 유물론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선민들은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보호하심이 각별합니다.

(3)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48:2c);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계속 어기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는 말씀으로만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진노와 재앙으로 징계하고 벌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계십니다. 필요하다면 천군천사까지 동원하시는 만군의 여호와’(Almighty God)이심을 선민들이 노래하고 있습니다(48:2c, 26:52-53).

둘째로, “(a) (여호와)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창세기의 내용)을 알게 하였고, (b) 내 입에서 (모세에게 준 율법)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선지자들을 보내어) 듣게 하였고, (c) 내가 홀연히(혼자서 전격적으로) 행하여 (이미 언약한)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48:3); 선민들의 신앙생활이 내실(內實, 내적인 열매)을 얻자면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지를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창세기의 내용)을 알게 하였고”(48:3a);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질서를 마련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역사를 섭리하시고 사람들에게 심판과 구원을 행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만 합니다. 그 사실이 창세기에서부터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인생과 역사의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 동일한 공의의 원칙을 가지고 말씀의 진리로 오늘도 일하시고 계십니다(46:9-10, 48:3a).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의 첫걸음입니다.

(2)  내 입에서 (모세에게 준 율법)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선지자들을 보내어) 듣게 하였고”(48:3b); 사람을 살리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그 생명의 말씀입니다(8:3, 4:4). 그 말씀을 생활화하고 공동체의 규약으로 삼도록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꾸만 이방 신을 섬기고 우상문화에 젖어 들고 있습니다. 그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계속 보내어주시고 있습니다(48:3b, 21:36, 7:52).  그러므로 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서 실천하는 자들이 사실은 올바른 신앙인이라고 하겠습니다(24:44-48). 반면에 혈통적인 의인의 족보만을 자랑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외형적인 신앙인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1:12-13).

(3)  내가 홀연히(혼자서 전격적으로) 행하여 (이미 언약한)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48:3c);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해야만 하는 이유가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1)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도 홀연히’(소리소문도 없이 갑자기 홀로) 말씀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개를 하지 아니하고 우물쭈물 지체를 하다가는 역사적인 심판과 종말심판을 급속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지적이 그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벧후3:8-9).

2)    살다가 보면, 너나없이 인생 백 년의 세월이 꿈과 같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면 메시아의 말씀 그대로 3일만에 부활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5:25-29, 17:24). 그 다음에는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 그것을 결정하는 심판대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25:46, 5:29). 자신의 종말이 바로 세상의 종말이므로 누구나 짧은 인생살이 가운데 더 이상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a) 내가 알거니와, (선민)완고하며, (b) 네 목쇠의 힘줄이요, (c) 이마이라”(48:4); 선민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없는 이유를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내가 알거니와, (선민)완고하며”(48:4a); 완고하다는 것은 고집이 세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고집이 센 것도 문제가 있지만 특별히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 자기 고집이 세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문제가 심각합니다;

1)    창조주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세상의 경영에 참여를 해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종의 신분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뜻이 아니라 종이 자신의 뜻대로 휘두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더 현실문제를 해결하는데 낫다고 하는 자신감 때문입니다.

2)    그러한 생각은 이기적이거나 집단이기적인 것이므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수도 없이 지적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이 요지부동입니다. 자신들의 의로움이 이미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넘어서고 있으며 더 옳다는 생각이 확고한 것입니다(10:3).

3)    한 마디로, 종이 주인의 생각을 물리치고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더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 그것이 불신앙의 핵심입니다.   

(2)  네 목쇠의 힘줄이요”(48:4b);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지키도록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주십니다(20:1-17). 선민들이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반드시 준행하겠다고 피의 맹세를 합니다(24:3-8);

1)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시내 산에 올라가고 십여 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백성들이 술렁이고 있습니다(32:1). 대제사장 아론에게 모세를 대신하여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 신의 형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론은 오랜 애굽의 생활에서 배운 그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주면서 출애굽의 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32:4).

2)    여기서 무엇이 목이 뻣뻣한 것인지(32:9), 또는 목이 쇠 힘줄과 같은 것’(48:4b)인지를 금방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이나 율법을 대할 때에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 그대로 생활에 적용을 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들이 경험한 그것을 가지고 쉽게 판단을 해버리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많은 신들과 분명히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그렇게나 모세를 통해서 여러 번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는데도 그 뜻을 깊이 헤아리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3)    열두 지파의 장로들이 회의를 하여 자신들의 세상경험에 비추어서 가장 좋은 방법을 다수결로 선택하여 시행을 하고자 합니다(32:1).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그러하지 못한 것이기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질책이 추상과 같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7:6-7).

4)    근본적으로 사람의 경험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신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창조주 하나님으로 섬길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상대적인 숫자 곧 양적인 다수결이 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밝히 드러내고 있는 방편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그러하듯이 하나님신앙도 우민화(愚民化)의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5)    자신들의 인간적인 합의로 인생과 역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참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를 한갓 상대적인 진리에 불과한 사람들의 지혜로 폄하하고 있는 신성모독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앞에서조차 피조물인 자신이 더 지혜롭고 더 옳다고 뻐기고 있는 모습(3:5-6) 목이 뻣뻣한 백성의 모습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48:4b).

(3)  이마이라”(48:4c); 대제사장인 아론이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와 성소에 출입을 할 때에는 그 이마에 하나의 패를 붙여야만 합니다. ‘여호와께 성결’(Holy to the Lord)이라고 하는 패입니다(28:36). 그 패가 이마에 부착이 되어 있어야만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가 받아들여집니다(28:38). 그러므로 여기서 그 패를 붙이지 아니하고 함부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들이 바로 그 이마가 놋과 같이 강퍅한 잘못된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뻔뻔스럽게도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먼저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러한 자가 어떻게 남의 잘못을 중보하고 대신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넷째로, “(a)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창세기, 출애굽기 등)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b)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18:17). (c)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우상)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48:5); 선민들은 회개하고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백성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그 점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상을 버리고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믿음의 열조들에게 준 그 복이 성도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창세기, 출애굽기 등)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48:5a); 하나님께서 믿음의 열조를 이방 땅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우시고(20:7) 선민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이유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땅에 하나님신앙을 전하고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고자 믿음의 조상과 선민을 세우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경험한 자들은 피조물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 하여야만 합니다.

(2)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18:17)”(48:5b);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찾아오시고 있습니다(18:1-2).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내년 이맘때에 틀림없이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는 재확인입니다(18:10). 둘째, 두 천사와 함께 소돔과 고모라 등을 정탐한 후에 희생자들이 부르짖는 모습 그대로이면 불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8:17, 20-21).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먼저 알리시고 그의 의견을 은근히 청취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중보의 기도와 믿음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15:6, 18:22-32).

(3)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우상)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48:5c);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이 만든 신상과 우상의 차이점을 이사야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창조주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공의의 정신에 입각한 만민구원과 만물구원이라는 진리를 가지고 사람의 인생과 역사를 섭리하시고 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1:2, 21:33, 4:24). 그러나 피조물이 만든 신상과 우상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조차 유한한 인생을 사는 하찮은 존재입니다(18:27). 인간은 시대정신을 초월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상황을 뛰어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적용시켜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2)    둘째,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보내셔서 본격적으로 만민을 구원하는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십니다. 그 뜻을 이사야를 통하여 미리 선민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께서 시행하신 일임을 사전에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므로 반드시 성취가 되는 줄 알고 있으라는 것입니다(55:11).

3)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일이므로 그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방해를 하게 된다면 영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행하시는 그 역사에 방해를 하게 된다면 용서함이 없습니다(12:31-32). 그러므로 빨리 이방신상과 우상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48:15c).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야곱처럼 하나님께 매어 달려서 다시 살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방신상과 우상을 모두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리고 청결한 마음과 몸으로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2)  유다가 다말의 재판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성도들도 이방인들의 생명까지 살리고자 자신의 희생을 무릅써야만 합니다. 자신들만 구원받고 현세적인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3)  갓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깊이 묵상하고 그 취지를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함부로 다수결의 합의로 상대적인 인간의 지혜와 방법론을 마치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인 것처럼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공의의 정신과 거룩한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종의 입장에서 성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4)  나아가서 그리스도처럼 복음전파와 만민구원을 위한 공생애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아무쪼록 공의의 정신을 구현하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