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24강(사48:1, 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1. 16:13

이사야 강해 제224(48:1, 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120()

 

자칭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는 진실과 공의를 그들의 조상인 야곱과 유다의 행적에서는 어떻게 엿볼 수가 있는가?(48:1, 5)

 

본문 제1절의 해석이 쉽지가 않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48:1). 그 이유는 용어와 개념의 정리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용어들은 서로 개념이 연결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 ‘유다의 허리라고 하는 용어는 쉽게 개념의 연결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목이 내용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에 대하여 갑자기 진실과 공의가 없다고 크게 질책을 하고 있는 대목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욱 풀이가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고맙게도 제1절 말씀을 풀이할 수 있도록 하나의 힌트로서 제5절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창세기)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유다의 허리 이야기를)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야곱의 집)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48:5).

과연 두 구절을 쪼개어서 그 의미를 파악해보면 어떠한 진리성을 발견할 수가 있을까요? 마치 넓은 밭에 숨겨져 있는 보화를 캐러 가는 심정으로(13:44) 본문의 구절을 분석하고 검토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48:1a); 야곱의 일대기를 알아야 해석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1)  야곱은 얍복 시냇가에서 숙적 에서를 만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겁이 납니다. 20년 전에 쌍둥이 형 에서를 속이고 아비 이삭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오고 있다고 하므로 야곱은 거의 초주검이 되고 있습니다(32:6-7). 그래서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에게 매어 달립니다(32:24-26).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자를 통하여 들려옵니다. 이제부터는 남의 발목이나 잡는 사기꾼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 족장답게 당당하게 이스라엘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32:28).

(2)  그러나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형제간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역사해주시자 야곱이 또 변심을 합니다. 애초에 서원한대로 벧엘로 가서 제단을 쌓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28:17-22). 반대로 화려한 도시 세겜으로 찾아가서 형식적인 신앙생활만 영위하고 있습니다(33:18-20). 따라서 수치스럽고도 참혹한 세겜 사건이 발생을 하게 됩니다(34:1-4, 25-29). 가나안 원주민들의 공동의 적이 된 야곱의 집안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34:30). 그때 하나님께서 살길을 열어주십니다. 애초의 약속대로 벧엘로 찾아가서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앞으로는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35:1, 10).

(3)  그때 야곱의 집안 사람들이 회개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기거나 보관하고 있던 모든 이방신상을 호화 장신구들과 함께 상수리나무 아래에 파묻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35:4-5). 진심으로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 곧 진실한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집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48:1a). 그런데 그 진심이 어디로 실종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이제는 거룩한 진실이 없다고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48:1c).

둘째로,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48:1b); 먼저 유다의 일대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야곱의 4남인 유다는 특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로 세겜과 도단 사이에서 목축을 하고 있는 형제들을(37:14-17) 떠나서 아버지 야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남쪽으로 이주를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38:1). 당시 가나안에는 하나님신앙을 가진 집안이 야곱의 집안뿐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헤브론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서 살게 된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를 생산하게 됩니다(38:2-5).  그리고 가축이 많은 유다는 현지인 아둘람 사람 히라를 자신의 청지기로 삼습니다. 그를 통하여 자신의 가축을 인근 여러 고을의 원주민들에게 맡겨서 위탁목축을 하고 있습니다(38:1, 12).

(2)  장남 엘이 장성하자 유다는 가나안 원주민 딤나 출신 다말을 며느리로 삼습니다(38:6). 그러나 엘이 악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일찍 죽고 다말은 청상과부가 되고 맙니다(38:7). ‘수혼제도’(嫂婚制度, 아들이 없이 과부가 된 형수와 합방하여 아들을 만들어주고 그 아들 앞으로 형의 재산을 상속받도록 하여 가문에서 과부에게 살길을 열어주는 고대 중동 유목민들의 제도임)를 통하여 아들을 얻도록 조치해주지만 시동생 오난이 과부가 된 형수에게 살길을 마련해주지 않습니다(38:8-9). 그래서 역시 악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38:10).

(3)  겁이 난 유다는 다말을 친정 딤나로 일단 돌려보냅니다. 명분은 막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면 다시 수혼제도를 실시하여 살길을 마련해주겠다는 것입니다(38:11).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시아버지 유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친정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장차 살길이 막막해진 다말이 큰 결심을 합니다. 이왕이면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는 시부(媤父, 시아버지) 유다의 씨를 얻어서 살길을 도모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모른 척하게 되면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위험한 도박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모든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해주고 있는 유다의 공의의 정신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몸을 파는 여인으로 분장을 하고서 시부 유다와 합방을 하게 됩니다(38:13-18). 그리고 임신을 하게 됩니다.

(4)  부자의 귀는 밝습니다. 대지주인 유다의 귀에 딤나 친정에 가있는 며느리 다말의 소식이 전해져 옵니다. 외간남자와 간통을 하여 배가 불러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대노하여 청지기에게 다말을 끌고 오도록 조치합니다(38:24). 그리고 재판을 시행합니다. 그런데 화형을 당하기 전에 다말이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38:25). 유다가 딤나에서 하룻밤 창녀를 살 때에 담보로 맡긴 물건들입니다. 유다는 확연하게 다말의 속셈을 알게 됩니다. 불쌍하게도 살 길이 없어서 유다 자신의 공의로운 판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는 다말입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서 모른 척해버리면 그녀는 뱃속의 아기와 함께 화형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자신은 품위의 손상을 예방할 수가 있습니다.

(5)  하지만 유다는 다말을 살려주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의 족장의 위신이 크게 손상이 될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비록 가나안 원주민 출신 이방인 여인이지만 그 생명을 구하고 살길을 열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로운 유다의 판결이 다음과 같다고 모세가 창세기에서 특별히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이방여인인 다말이) (선민인 유다)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38:26).

(6)  그 결과 하나님의 상급이 유다의 집안에 주어지게 됩니다. 다말이 낳은 아들이 쌍둥이이며 베레스와 세라입니다(38:27-30). 여기서 베레스가 다윗의 조상입니다(1:3). 그리고 세라의 세 아들은 역사적으로 솔로몬에 비견되는 지혜자들로 보입니다(대상2:6, 왕상4:31). 그러므로 유다의 허리에서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나왔다면 그들 선민들은 유다가 모범을 보이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따가운 지적이라고 하겠습니다(48:1b).

셋째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48:1c); 다음과 같이 풀이가 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1)  신정국가인 유다 왕국에서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이 가장 거룩하며 높습니다. 그 이름으로 맹세를 하게 되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어놓고 지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선민들이 곧잘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심으로 지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이 없는 것입니다(48:1c).

(2)  창조주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이 백성입니다. 따라서 창조주의 백성답게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일찍이 유다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48:1c).

넷째로,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창세기)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48:5a);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자면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가 가장 연대가 앞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로부터라는 표현은 창세기를 의미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미 제1절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야곱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동행을 바란다면 이방신상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일대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재판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와 진실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벌써 창세기에서부터 구체적으로 말씀해주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유다의 허리 이야기를)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48:5b);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벌써 해준 이야기를 70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다시 말씀하고 계십니다.

(1)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은 동일하시고 영원하시지만 백성들은 수 많은 세대를 거쳐서 각각 다른 이름과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계승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로잡아주지 아니하신다면 사람들의 신앙은 제 각각일 것입니다.

(2)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생활이란 그 기준이 반드시 하나님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이 변하게 되면 또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시공간을 초월하고 계시는 하나님만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 결정과 생각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뛰어넘어 동일한 공의와 진리에 대하여 다시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진리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창세기의 기록부터 선지서의 기록까지 어떻게 일치가 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3)  흔히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많은 저자들이 정경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은 내적인 통일성과 진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이 훗날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발생할 것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모든 역사섭리의 대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로, (야곱의 집)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48:5c);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상과 이데올르기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념이라고 부르면서 목숨까지 걸고 있습니다. 때로는 통계적인 분석의 결과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맹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열조들의 이야기를 되새겨 묵상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역사섭리의 진리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금도 역사가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잘못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우상인줄 알고 이제는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살이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의 용어사용과 개념의 연결이 실로 절묘합니다. ‘야곱의 집유다의 허리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창세기의 내용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대기 가운데서 가장 알기 쉽게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과 거룩함을 회복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엄청난 배려이며 은혜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동일하신 하나님의 원칙이 역사 가운데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성경말씀을 통하여 처음부터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열심히 묵상하고 그 깨달음을 실천하고자 결심한다면 누구나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의 능력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선지자 이사야에게 임하고 있는 그 말씀의 은혜가 여러 성도님들에게도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