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22강(사47:10-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1. 00:11

이사야 강해 제222(47:10-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118()

 

인간의 교만과 그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이사야의 언급(47:10-11, 4:7-12)

 

이사야는 본문에서 인간의 교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능력의 한계가 무엇인지 나아가서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는 인간들이 어째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역사적인 심판을 당하고 마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짧은 두 절 말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47:10-11).

본문말씀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 제4장에 실려 있는 카인의 이야기를 원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두 구절의 본문말씀에 대하여 의미의 분석이 용이하도록 다음과 같이 토막을 내어서 각각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47:10a); 사람의 악의 시작이 무엇인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사람의 악의 시작이라고 갈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7:10a). 하나님은 눈이 없으시다고 스스로 판단하고서 이기적으로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행입니다.

(1)  창세기 제4장에 수록이 되어 있는 카인의 경우를 참조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카인의 심중을 벌써 살펴보시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속을 통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카인에게 악의 소원이 들어 있는 너의 마음을 잘 다스리라. 그렇지 못하면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해주시고 있습니다(4:6-7).

(2)  그러나 어리석게도 카인은 완전범죄를 꿈꾸고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넓은 들판 한가운데로 불러내고 있습니다(4:8a).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는 눈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몰래 아벨의 머리를 쳐서 죽여버립니다(4:8b). 그 시신을 땅에 암매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보는 눈이 없으므로 완전범죄에 성공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네 지혜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47:10b); 사람의 지혜와 지식은 한 마디로,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오감을 통하여 수집이 된 자료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람의 지식입니다. 그 지식에 인간의 직관력과 예지력을 더하게 되면 일종의 지혜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오감이라고 하는 인식의 단계를 거쳐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으며 그렇게 수집이 되는 자료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진리라고 쉽게 단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나가고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인식론적 경험론이라는 실증주의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이름하여 신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눈부신 과학적인 성과에 그만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47:10b). 그것이 카인의 경우처럼 감히 하나님을 속이고자 하는 비극의 시작입니다;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4:9). 과연 영이신 하나님의 눈을 가리거나 속일 수가 있을까요?

셋째로,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47:10c);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만물의 영장(靈長, 영적인 어른)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가 된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1:26-27). 그러므로 보고 생각하고 지식을 체계화하여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지혜의 눈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1)  그런데 너무 보고 느끼는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현상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는 데에는 자꾸만 둔감해지고 있습니다(3:8). 역사의 흐름을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그 자료를 분석하면서도 그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섭리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이는 것만 가지고 증거위주로 논쟁을 하자고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인간의 교만함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도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2)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세상을 주체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인간 자신이 더 대견하고 중요하다는 관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임을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47:10c). 마음속으로 그렇게 단정한다고 하여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가 결코 지워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찾아오게 됩니다.

넷째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47:11a); 카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의 궁금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4:10-11).

(1)  인간은 피조물인 땅과 사람이 흘린 피가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거를 듣고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단을 하시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유추할 수가 있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천하만물이 모두 살아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종합하여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2)  그러한 시스템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인물이 창세기에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청년 요셉입니다. 그는 주인 보디발의 아름다운 아내가 유혹을 할 때에 그것을 뿌리치고 있습니다. 주위에 보는 눈이 없지만 단 하나 하나님의 눈을 피하거나 속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기가 싫다는 것입니다(39:9). 어떠한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하나님을 속이기가 싫다고 하는 것이 요셉의 하나님신앙의 핵심이며 그의 형통함의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39:2-3).

다섯째로,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47:11b); 카인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카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4:7). 그러하지 못할 경우에는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고 있는 땅 곧 세상적인 힘을 숭상하는 약육강식의 무서운 땅, 소위 동방의 지방으로 보내어버리는 것입니다(4:12, 16).

(2)  그러한 손해가 있다고 경고하더라도 카인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7:21-24). 그래서 모두가 죄인입니다(3:9-10). 다만, 창조주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그 능력을 얻을 수가 있을 뿐입니다.

(3)  하지만 카인은 하나님의 눈을 속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4:8-9).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얻을 수가 없는 자입니다.

여섯째로,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47:11c); 인간의 예지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아주 희미한 수준입니다;

(1) 예를 들면, 내일의 날씨를 정확하게 감지하는데 있어서 사람은 때로 개미보다도 못합니다. 기상예보가 왕왕 틀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미와 같은 미물은 정확합니다. 본능적으로 비가 올 것임을 알고서 부지런히 무리를 지어 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개미가 대피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큰 비가 올 것임을 눈치를 채고 있으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본능이나 육감이 아니라 과거 여러 가지 경험을 집대성하여 그것을 지식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능력을 사람이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사람들은 자료를 분석하여 이론을 개발합니다. 그 이론을 가지고 현실을 진단하고 설명합니다. 현실적인 타당성과 설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게 되면 이제는 그 이론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과학적인 학문을 발전시키고 있는 이유입니다.

(4) 인류는 끊임없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론을 개발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충분하게 미래를 예측해줄 수 있는 이론이 개발되어 있지를 못한 실정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미래는 창조주의 역사섭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피조물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미래를 투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5) 그래서 훗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6-8).

(6)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신다고 하더라도 미래를 온전히 가르쳐주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미래의 결정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맡겨두고 제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지상명령이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충실하게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7)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을 받았다고 강조하면서 점쟁이처럼 미래에 대하여 함부로 떠벌리는 것은 성령님이 오신 이유와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오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47:11c)는 본문의 말씀을 명심하고서 그리스도가 주신 지상명령에 진력함으로써 파멸이 아니라 영생의 구원을 확보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사명이며 가장 현명하게 미래에 대비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교만하게 되는 것은 창조주를 한갓 피조물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하나님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결코 사람들의 지혜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만스럽게도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면 당연히 하나님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버젓이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예를 들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인식과 그의 범죄가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전에 동생 아벨을 시기하는 카인의 마음을 아시고서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동생을 미워하여 죽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카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맙니다.

사면이 뻥 뚫려있는 들판에 동생 아벨을 불러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다른 사람들의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심을 하고 동생을 쳐죽이고 암매장을 하고 맙니다. 그는 사람의 눈을 피했으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눈도 피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신앙이며 심각한 범죄입니다. 창조주의 능력을 피조물 인간 정도로 격하한 것이므로 그 죄명은신성모독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며 성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악의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