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16강(사46:3-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1월 12일(화)
현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여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창조와 영생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다(사46:3-7).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들이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구원주 되심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통탄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동족들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디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불신앙을 청산하십시오. 얄팍한 현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야곱과 이스라엘 자손, 그리고 장차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게 되는 남은 자를 모두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실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만 합니다”(사46:3-7).
과연 그와 같은 내용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분석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b)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사46:3); 이사야는 선민의 역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창조와 인생의 보살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사46:3a);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믿음의 장자이며 약속의 아들로 선택한 자는 쌍둥이 동생인 야곱입니다;
1) 그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대 족장 이스라엘이 되어 세겜 성을 차지하고(창48:22) 열두 지파를 낳게 됩니다(창49:1-28).
2) 이스라엘의 자손은 출애굽을 하게 되고 시내 산에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을 받게 됩니다(출19:5-6). 하지만 열두 지파의 선민의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방인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3)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에서 유민으로 떠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유다 왕국의 미래입니다(사39:5-7).
4) 하지만 여기서는 이방 땅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언을 적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2)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사46:3b); 배에서 태어나는 것과 태에서 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같은 내용을 단순하게 두 번 반복하여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배에서부터 생명이 생성이 되는 것을 먼저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모태에서 열 달을 자라서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해석이 됩니다;
1) 배에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보고서 나는 그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 생명을 안아서 보호하였다. 나는 너의 생명을 창조하였으며 그것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라.
2) 열 달 동안 모태에서 잘 자라나도록 보호하여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그 아기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기뻐하였다. 그것을 업어서 기른 부모의 마음이 바로 나 여호와의 마음이다.
둘째로, “(a)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b)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c)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4); 여호와께서 자신이 창조한 사람과 백성을 보호하며 끝까지 구원하실 것임을 이사야가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사46:4a); 하나님의 사랑은 백성들의 유년기에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인생을 품어서 보호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인생만 그렇게 보호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히 계속이 될 것입니다.
(2)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사46:4b); 왜 여호와 하나님은 끝까지 야곱의 인생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유일하신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4c);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왜곡하여 적용하고 있습니다;
1) 이방인들과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가 되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선민인 자신들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만 용서를 구하는 대 속죄일 제사를 드리는데 그치고 있습니다(레16:29-34).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2)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선민들의 사회에서 발 붙일 곳이 없게 되고 맙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4c). 온 세상만민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품에 안으시고 반드시 구원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구원자 메시아를 보내시고 만민구원의 새 시대를 여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a)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b) 누구와 짝하며, (c)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사46:5);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 신과 우상에 비교하거나 짝하는 것 자체가 불경입니다;
(1)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사46:5a);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세상의 만물과 만민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가지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비긴다고 하는 셈법은 애초부터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누구와 짝하며”(사46:5b);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짝이 될 수 있는 신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1) 가나안 원주민들은 농사의 신 ‘바알’을 주신(主神, 으뜸 신, main god)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알의 짝으로서 아름다운 미의 신 ‘아스다롯’ 여신을 나무로 조각하여 그 옆에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들은 인간들의 관념이 빗어낸 신상이며 우상에 불과하기에 그러한 짝짓기가 가능합니다.
2) 그러나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감히 육체적인 사상으로 그 짝을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 피조물인 인간의 관념과 시공간을 모두 초월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4:24).
(3)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사46:5c);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를 침입하게 되면 반역의 무리가 됩니다. 히브리 전승에 따르면 미의 천사장 ‘루시엘’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고서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만큼 높이려고 하다가 땅으로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사14:11-15). 그것이 사탄인 ‘루시퍼’의 탄생의 배경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타락도 그러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은 지혜를 얻고자 하다가 그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맙니다(창3:6, 23).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하여 무엇이 같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피조물의 패역함이며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불경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a)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b) 그것으로 신(神, god)을 만들게 하고, (c)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사46:6); 사람들이 돈을 주고 도금장이에게 화려한 신을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합니다;
(1)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사46:6a); 이사야는 사람들이 이방 신과 우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쇠나 나무로 신상을 만들지라도 그 겉은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금과 은을 달아서 도금장이에게 주고 있습니다. 금박을 입히고 그 주위에 은박을 입혀서 아주 귀한 신상을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엄청난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풍조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삼상16:7)의 눈밖에 나고 있는 행위들입니다.
(2) “그것으로 신(神, god)을 만들게 하고”(사46:6b);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정성을 들여서 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사람들이 만든 인조 신과 우상들’(so called man-made gods and idols)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조각을 하고 금박을 입힌 것들입니다. 그렇게 비싸게 만들어야 그 신상과 우상이 영험이 있으며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사46:6c); 신상을 세우고 그 앞에 제사를 드리며 엎드려서 경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1) 사람들은 그 행위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들이 빌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행복과 성공 그리고 소원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현세적인 복을 받아서 마음껏 누리고자 하는 욕심이 깔려 있습니다.
2)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얄팍한 소원을 빌어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먼저 용서를 구하며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의 구원과 죄 사함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나라로 선택이 된 선민과 성도들의 거룩한 의무입니다(출19:5-6).
다섯째로, “(a)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b)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사46:7); 손발이 없는 무력한 우상들이기에 당연히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소원성취도 구원도 베풀 수가 없습니다;
(1)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사46:7a); 이사야가 절묘하게 우상의 무능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바알 신이나 아스다롯 여신상을 어깨에 메어다가 신전에 모셔두게 되면 신상들은 그 자리에 붙박이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쇠나 돌, 또는 나무로 빗어서 만들어 놓은 조각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살아 움직이며 손과 발을 놀릴 수가 있을 것입니까? 자기 자신도 꼼짝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남을 구원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2)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사46:7b); 그래서 이사야가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바알 신이나 바벨론의 벨 마르둑 신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만든 신상이며 우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무리 신탁을 받고 싶어도 그것들은 입이 없어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으며 손과 발이 없어서 남을 구원해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상은 무용지물이며 우상을 섬기는 것은 허망한 결과만을 자초할 따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라도록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부모와 같은 그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만민을 보호하시고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 사실을 야곱의 일생과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이 하나님의 눈밖에 나서 이방 땅에서 유민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는 남은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자 메시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적극적으로 만민구원의 시대가 장차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이사야이지만 동족들의 현실을 보게 되면 답답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을 두 차례나 경험하지만 현세적인 구원과 복에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사39:8). 그 아들 므낫세 왕은 우상을 심하게 섬김으로 말미암아 선민의 나라가 망하게 되는데 크게 기여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1:11-13).
따라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부디 허망하고 무익한 우상문화를 청산하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무용지물인 우상에게 이기적인 복을 빌지 말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만민구원을 위한 복음전파에 나서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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