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1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28. 12:12

이사야 강해 제215(46: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111()

 

벨과 느보를 섬기는 바벨론의 운명과 선민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46:1-2)

 

벨과 느보는 바벨론의 가장 중요한 신들의 이름입니다. 이사야가 본문에서 그 이름을 가지고 간단하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간단한 예언을 보다 심도 있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이슈들이 거의 그 속에 포함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영역에서 폭넓게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벨과 느보의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2)  왜 세상적인 왕들은 느보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고 있는가?

(3)  바벨론의 영광과 선민 이스라엘의 패망

(4)  바벨론의 패망과 그 신들의 운명

(5)  느보 산에서의 모세의 깨달음

(6)  모세가 말하고 있는 모리아산, 호렙산, 시내 산, 그리고 느보 산의 의미

(7)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그리심 산, 예루살렘성전, 그리고 지성소로 나아가는 신령과 진정의 의미

(8)  각 구절의 분석과 의미의 해석 등입니다. 이제 하나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Bel)느보’(Nebo)의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먼저 알아봅니다;

(1)  여기서 이사야는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아람어가 바벨론으로 넘어가서 달리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바벨론 제국을 건설하는 갈대아 인들이 아람 족속의 한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아람 족속의 한 갈래인 갈대아 인들이 유프라테스 강을 타고서 남하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심에서 왕조를 건설한 것이 갈대아 왕조입니다. 그들이 훗날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신바벨론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웅 왕 느부갓네살이 지상에 남은 마지막 제사장나라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게 됩니다(왕하25:1-7).

(2)  바벨론으로 넘어가게 되면 벨 마르둑’(Bel-Marduk)이 됩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으뜸신의 이름입니다. 아람어 은 히브리어로 바알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금방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주신(主神)으로 섬기고 있던 바로 그 바알 신입니다. 농사의 신이며 풍요의 신입니다. 척박한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도록 해준다는 바로 그 우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풍요는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상을 만들거나 신을 만들어서 섬길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 사람과 땅의 운명을 관장하는 주신(主神, main god)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3)  느보’(Nebo)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는 주신인 벨 다음으로 힘이 있는 신으로서 지혜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백성들로부터 주신 벨의 아들로 추앙 받기를 원하고 있는 바벨론의 황제들이 그 이름 느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약간씩 변형이 되고 있지만, ‘느부갓네살’, ‘나보니더스’, ‘나보폴라살등 황제의 이름이 그러합니다. 느보 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의 힘을 황제가 가지게 되면 그 지혜로써 치산치수(治山治水, 조림사업과 제방사업에 힘써 홍수를 잘 다스림으로써 풍년이 들게 하는 것)를 잘하게 되고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벨론의 영광과 선민 이스라엘의 패망이 서로 연계가 되어 있습니다;

(1)  선민 이스라엘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제멋대로 우상으로 여기고 이기적인 방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선민들의 현세적인 소원을 성취해주고 우월적인 이익을 얻게 해주는데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견해입니다. 자신들의 세상적인 소원성취와 성공을 얻게 해주지 못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은 필요가 없는 귀찮은 신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율법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은 이해타산으로 얼룩이 져있는 것입니다.

(2)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는 선민들의 신앙의 모습이 바알 신을 섬기고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현세적이고도 기복적인 신앙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선민으로서의 지위와 신분을 계속 부여해주고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실 이유가 사라지고 있습니다(왕하21:11-13).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나라와 똑같이 역사적인 섭리를 하시고 맙니다. 힘이 강한 신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하여 마침내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5:1-7).  

(3)  바벨론에서는 신년초에 아키투 축제’(Akitu Festival)가 매년 열립니다. 그때에는 주신 의 신상과 벨의 아들 신 느보의 신상이 짐승과 가축에 실려서 행진의 앞장을 서게 됩니다.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환호를 합니다. 그것이 바벨론의 영광입니다. 그 뒤를 패전을 한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종의 모습으로 끌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패망한 나라의 백성들이 섬기고 있던 이방 신과 우상들도 고꾸라지고 엎드러진 모습으로 짐승과 가축에 실려서 끌려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여호와의 모습이 바벨론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 결과 어떠한 역사가 전개될까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역사가 전개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로, 바벨론의 패망과 그 신들의 운명에 관하여 알아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사 왕 고레스’(Cyrus)를 불러서 바벨론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45:1-5).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키는 목자로 삼고 있습니다(44:28). 그 결과 전세는 완전히 역전이 되고 맙니다. 거꾸로 바벨론의 주신인 의 신상과 아들 신 느보의 신상이 거꾸러지고 엎드러진 모습으로 짐승과 가축에 실려서 끌려가게 됩니다(46:1). 그 신들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던 바벨론 백성들의 운명도 그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46:2). 반면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해방을 맞이하고 그 일부가 당당하게 고토(故土, 연고가 있는 땅)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제2성전을 건설하게 됩니다(1:1-4).   

넷째로,느보 산에서의 모세의 깨달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의 기록인 신명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모세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서 모압의 느보산봉우리에 오르게 됩니다(34:1-5). 그 장소는 요단 강을 비스듬히 흘러가고 있는 비스가 산맥의 높은 봉우리입니다. 그곳에서부터 모세는 그토록 동족들을 이끌고 함께 들어가고 싶어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멀리 내려다보게 됩니다. 북쪽 단에서부터 남쪽 끝 브엘세바에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네게브 지역을 모두 보게 됩니다.

(2)  그리고 나서 임종직전에 모세는 무엇이라고 부르짖었을까요?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과 유사했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3)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구약상의 믿음의 열조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천성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11:15-16).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 느보 산을 떠나서 영생의 진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다섯째로, 모세가 말하고 있는 모리아산, 호렙 산, 시내 산, 그리고 느보 산의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모리아 산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적장자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올라간 예루살렘의 산입니다(22:2).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人身祭祀, 사람의 몸을 희생제물을 삼는 제사)를 결코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상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22:13-14). 아브라함이 감격하면서 브엘세바에서처럼 영생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21:33, 22:12-19).

(2)  호렙 산은 미디안 변방에 있는 높은 산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치기로 살고 있던 모세가 그 산에서 타고 있는 불을 발견하게 됩니다(3:1-3). 그곳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호렙 산은 사명을 부여해주는 산입니다.

(3)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모세가 시나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시내 산으로 인도합니다(19:1-3).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내 산은 율법을 전수받은 산입니다.

(4)  느보 산에 올라서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을 내려다보게 됩니다(34:1-4). 그리고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자신이 돌아가야만 하는 고향은 결코 풍요로운 이 세상의 낙원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생의 기운이 흐르고 있는 천국임을 알게 됩니다(11:16). 따라서 모세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편안히 눈을 감게 됩니다. 훗날 구원자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면 그를 부활시켜서 천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8:56, 11:26).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지혜 느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영생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구원자 그리스도를 만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7:7-11).

여섯째로,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그리심 산, 예루살렘성전, 그리고 지성소로 나아가는 신령과 진정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그리심 산은 사마리아 수가 성 인근에 있는 산입니다. 그곳은 일명 축복의 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그 산에 올라 신명기에 적혀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11:29, 27:12, 8:33). 훗날 그 산에 성전을 짓고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하스모니안 왕조의 공격으로 파괴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다시 그리심 산에 올라 하나님을 예배해야만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4:20-21).

(2)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옛날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올라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로 대신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22:13-14, 12:5-14, 1:29). 헌신하는 자의 생명을 구해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치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곳에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대하3:1).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이란 선민의 영광과 그들의 시오니즘이 살아서 숨쉬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곳도 완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처소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4:21).

(3)  그렇다면 완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처소는 어디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3-24).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신 안에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과 진리로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인도하심을 받아 끝까지 예배인생을 살고 있다고 답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의 지성소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2:18-22, 6:4-5, 12:1-2, 고전6:19-20). 그러므로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만민구원사역에 나서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28:18-20, 24:48-49, 1:8). 그것이 완전한 예배이며 산 제사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생의 길입니다(1:12-13, 8:1-17, 12:1-2).

일곱째로, 본문 첫 구절입니다; “(a)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b) 그들의 우상들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c)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46:1); 하나씩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46:1a); 우상문화의 최후를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바벨론의 주신인 벨과 주신의 아들인 느보 신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패망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가 엎드러지고 구부러졌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들의 우상들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46:1b); 매년 신년 초에 바벨론 사람들은 아키투 축제’(Akitu Festival)를 벌입니다. 그때 제국의 수호신 벨과 느보의 신상은 맨 앞장을 서게 됩니다. 먼저 사람들이 극진한 예를 갖추어 그 신상들을 신전에서 어깨에 메고서 나와 큰 수레에 옮겨 싣습니다. 그러면 그 신상들은 짐승과 가축이 끄는 화려한 수레 높은 보좌에 앉은 자세로 거만하게 가두행진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때 제국의 영광을 부르짖는 백성들의 환호는 고스란히 벨 신과 느보 신에 대한 열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했던 그들의 영광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14:11-20). 바벨론이 망하게 되자 그들의 신상이 수레에 처박혀서 치워져 버리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이사야가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46:1c); 평소 바벨론 제국의 제사장들이 신전에서 섬기며 정성스럽게 떠메고 다니던 그것이 벨 신이며 느보 신입니다. 하지만 제국이 망하고 보니 그것들은 그저 무거운 쇳덩어리, 돌덩어리, 나무덩어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을 치우느라고 수레를 끄는 짐승들이 피곤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생의 구원을 주지 못하는 신상과 우상들은 결국 무거운 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덟째로, 둘째 구절입니다; “(a) 그들(우상을 섬기는 자들)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b) 그 짐(우상)구하여 내지 못하고, (c)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46:2); 역시 분설(分設, 나누어서 설명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들(우상을 섬기는 자들)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46:2a); 먼저 우상을 섬기는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특히 지상 마지막 제사장나라를 쳐부순 신바벨론 제국은 미구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군대가 순식간에 메대와 연합한 바사 고레스 황제의 군대에 의하여 박살이 나고 맙니다(13:17-19, 44:28). 수도를 지키며 내치를 담당하고 있던 벨사살 왕이 그날 밤 기습에 살해되고 맙니다(5:30). 아라비아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오랜 세월 원정에 나가있던 나부니더스 황제가 급보를 받고 정예병을 이끌고 회군을 합니다. 하지만 백전백승의 용맹한 고레스 황제에 의하여 참패를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45:1-3). 그 모든 바벨론 멸망의 시나리오는 이사야의 예언과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섭리입니다(45:4-5).

(2)  그 짐(우상)구하여 내지 못하고”(46:2b); 원정에 나가있던 나보니더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되돌아 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사의 젊은 황제 고레스의 전략을 당해내지를 못합니다. 허무하게 참패를 당하고 신바벨론 제국은 완전히 망하고 맙니다. 그들의 수호신 벨과 느보의 신상을 구해내지를 못합니다.

(3)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46:2c); 수호신이라고 하면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들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신상이 무슨 힘이 있어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원하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 앞에 그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세일 따름입니다. 뒤늦게 군사를 몰고 달려온 바벨론 마지막 황제 나보니더스가 애를 써보지만 헛수고입니다. 제국을 구하지도 못하고 신상을 되찾지도 못하고 그저 한갓 페르시아 제국의 포로신세가 되고 말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본문에서 주시고 있는 예언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명쾌한 내용입니다; “거대한 피조물의 형상이나 신령해 보이는 산 그리고 거룩해 보이는 성전이나 화려한 신전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것들은 쇠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신상이며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손과 발이 없어서 피곤한 짐승에게 실려가는 짐 덩어리에 불과한데 그것들이 어떻게 나라와 백성들을 구원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누구나 하루속히 신상과 우상의 허망함과 무용함을 깨닫고 신령과 진정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따라 영적인 삶을 살아가며 만민구원에 나서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성도의 길이며 영생의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복음적인 깨달음을 얻으시는 귀중한 성경공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