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17강(사46:8-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1월 13일(수)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장부’(壯夫, 늠름한 사나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깨달아야만 하는가?(사46:8-11)
이사야는 본문에서 동족들에게 부디 하나님 앞에 패역(悖逆)한 자로 서지 말고 떳떳하게 장부로 서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사46:8). 그리고 패역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고 그 은혜를 깨달아야만 한다고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사46:9-10). 만약 패역한 삶을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계속하게 되면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며,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구원의 손을 펼치실 것임을 아울러 알려주고 있습니다(사46:11). 그 상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각 구절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b) 이 일을 마음에 두라”(사46:8); 이사야는 패역한 자가 그 마음을 돌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그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을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훗날 그리스도 예수님의 비유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가 세파가운데 시달리다가 비로소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눅15:11-32). 먼저 여기서는 이사야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정의부터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사46:8a); ‘패역’(悖逆)이라고 하는 말은 ‘패륜과 반역’을 합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가 되어 있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아버지와 같습니다(창1:26-27).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패륜입니다.
2) 또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명심하고서 그 뜻을 따라 성실하게 종의 자세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뜻을 어기고 스스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나서는 경우 그것은 반역이 됩니다.
3) 그와 같은 반역의 마음은 주군이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보좌를 창조주의 자리에 두고자 했던 사탄과 같은 것입니다(사14:12-15). 그러므로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사탄적인 것이므로 처벌과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에서 발생했던 ‘원죄’의 의미이기도 합니다(창3:6).
4) 패역한 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이사야가 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탕자의 비유’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서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자를 대장부로 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참고로, ‘장부’(壯夫, 늠름한 사내)라고 하는 그 용어는 회개하는 욥을 올바른 신앙인으로 똑바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할 때에 다음과 같이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 앞에 똑바로 서라)”(욥38:3, 40:7).
5) 그와 같은 의미에서 바라보게 되면, ‘패역’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지를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고약한 자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게 되면 낭패를 당하는 자입니다.
(2) “이 일을 마음에 두라”(사46:8b);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이사야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이제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반드시 사람들이 생각해야 하며 또한 그 마음속에 명심해야만 하는 하나님에 관한 일은 무엇일까요?
둘째로, “(a)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b) 나는 (구원주)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9);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6:9a);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옛적 일과 창조의 일을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훗날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소개할 때에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1:15). 그리스도는 피조물보다 먼저 존재하신 창조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2) 그 의미를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창조에 관계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정확하게 증거해주시고 있으니 그것이 진리라는 말입니다.
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을 진리로 알아듣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생명의 창조주 앞에 정확하게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는 패역의 길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2) “나는 (구원주)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9b); 패역한 자는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 심판의 대상을 구원하자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1) 누가 그 일을 행할 수가 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이사야가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패역한 자의 마음을 돌릴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비책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2) 훗날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고 베드로를 통하여 그 역사를 일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36-41).
셋째로, “(a)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b)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그 목적이 있음을 이사야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을 미리 계시해주고 그 말씀 그대로 개인의 인생과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가신다고 이사야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각 구절을 살펴봅니다;
(1)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사46:10a); 먼저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근본적으로 살고 있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1) 인간은 시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간적인 3차원에 시간의 차원을 더하여 4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은 그 차원을 초월하고 있는 존재이십니다. 따라서 시간의 축을 뛰어넘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고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 통시적인 통찰력을 가지시고 언제나 현재를 살고 있는 인간과 교통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거나 예언의 말씀을 대할 때에 사람은 겸손해야만 합니다. 미래까지 이미 아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영이신 하나님께서 시간의 축을 그렇게 뛰어넘어버리시니 그 앞에서 공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칸막이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칸막이가 타당하지를 않습니다. 자국민과 외국인이라고 하는 구별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만민구원과 만물구원이라고 하는 개념만이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영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공간을 빨아들이고 다시 펼쳐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사65:17). 그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대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계21:1).
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에 그 미래를 바라보시고 인생의 목적을 부여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구체적으로, 선지자를 통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말씀의 기록을 보게 함으로써 그 사명을 깨닫도록 하십니다(눅24:44-45).
6) 훗날에는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눈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자신의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실현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 일생을 묵상해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 그 사명과 인생의 목적을 올바로 깨달을 수가 있게 됩니다.
7)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본문의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을 주시는 이유는 그 말씀 가운데 자신들의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닫고 실천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미래를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과 역사를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비근한 설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사48:12).
(2)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b); 하나님의 뜻은 틀림없이 성취가 됩니다.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섭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뜻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며 기뻐하십니다(롬12:1-2). 물론 메시아가 그 일을 먼저 행하실 것입니다. 칭찬받을 수 있는 선한 목자(요10:10-11) 곧 종의 모범을 먼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자 하는 악한 뜻은 이루어지지를 못합니다. 악한 세력들이 음모를 꾸미고 그 일을 행할지라도 결국은 그 함정에 스스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를 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문서 에스더의 ‘부림절’ 기록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에9:1-19).
넷째로, “(a)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b) 먼 나라(바사와 하늘)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c) 내가 말(의사결정과 공포)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실시사항을)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사46:11);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힘을 동원하시며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실까요? 징계하고자 하실 때에 동원하시는 힘과 구원하고자 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사람이 다를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사46:11a); 선민들이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를 않습니다;
1) 막상 죽을 운명이 되면 그때에 가서야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위적인 능력으로 앗수르의 말발굽에서부터 유다 왕국도 구해주시고 히스기야 왕의 죽을 운명도 다시 사는 운명으로 바꾸어주었지만(사37:35-38, 38:1-8) 그 결과가 대 실망입니다(사39:4-8, 왕하21:1-15).
2) 선민들은 제사장나라다운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제사장들은 선민들의 허물과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릴 뿐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도무지 드리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들이 독식하고 맙니다. 이방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의 대상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3) 유다 왕국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결정은 그들을 처벌하고 훗날 고쳐서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4) 먼저 역사적인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동방에서 사나운 날짐승과 같은 세력이 몰려오도록 역사를 섭리하실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신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를 동원하시는 것입니다(왕하25:1-7).
(2) “먼 나라(바사와 하늘)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사46:11b); 바벨론 땅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속히 임하고 있습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을 일으켜서 마침내 신바베론 제국을 정복하게 하실 것입니다(사44:28). 같은 맥락에서 먼 곳 하늘에서부터 온 세상의 구원자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게 됩니다(요3:13-17). 요컨대, 사람을 불러서 역사적인 구원을 성취하시고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온 인류와 온 세상의 구원을 실현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내가 말(의사결정과 공포)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실시사항을)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사46:11c);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사55:11). 마치 생명력이 있는 씨앗과 같아서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1)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창조주께서 결정하신 사항을 공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열매를 맺고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2) 그 사실을 알고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가 되는 과정을 추적해보면 세부계획이 구체적으로 다시 공포가 되고 그것이 면밀하게 시행이 되고 있는 현장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3) 그렇게 구체적인 증거를 많이 포착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믿음의 성숙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의 모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약한 표정을 지으며 감히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는 그 마음속이 패역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스스로 잘난체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제멋대로 이기적인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한 자는 인생가운데 낭패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떳떳하게 장부와 같이 설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는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태어나게 했으며 언제나 보살피시고 자신의 인생 가운데 사명을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면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소망 가운데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한한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의 삶을 살아내게 되면 반드시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니 그 열매가 확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틀림없이 성취가 되도록 역사를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능하신 손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자신의 인생을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참으로 인생 가운데 복을 받은 자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깨달음과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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