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18강(사46:12-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1월 14일(목)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가 어째서 그토록 힘이 드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사46:12-13)
본문에서 이사야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頑惡, 완고하고 악함)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기가 그토록 힘이 든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사46:12).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살이를 하면서 그렇게 완악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도록 역사 가운데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점에 관하여 이사야는 본문에서 어떠한 예언을 해주고 있는 것일까요?(사46:13) 이제부터 본문 두 구절의 말씀을 분석하면서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도출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b) 내게 들으라”(사46:12); 일찍이 모세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그 의미를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1)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사46:12a); ‘완악’(頑惡, 완고하고 악함, to harden, or to be hardened, NIV & KJV)이라고 하는 용어를 모세가 출애굽기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다고 표현할 때에 무려 14차례나 사용하고 있습니다(출4:21, 7:3, 13, 22, 8:19, etc.). 그리고 ‘출14:17’ 절에서는 애굽 사람들의 마음도 바로의 마음과 같이 완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모세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이나 애굽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완악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 가운데 그리고 환경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그 심성 가운데 이미 태생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2) 역시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제13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벧엘과 아이 지역에서 아브람과 그의 장조카 롯이 각각 목축을 하고 있습니다. 풀이 부족하여 자주 다툼이 발생합니다(창13:7). 따라서 아브람의 권유로 롯이 거처를 소돔 성으로 옮기고 있습니다(창13:12). 둘째, 하나님은 홀로 남은 아브람에게 그가 볼 수 있는 모든 땅을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창13:15). 그리고 그가 걸을 수 있는 만큼 당대에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창13:17).
3) 그것은 겉으로 보면, 엄청난 축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한없이 불편하고 제약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사고와 삶의 한계를 뚜렷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하여 땅을 차지하고자 서로 갈등과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둘째, 사람의 세계관이 고작 보이는 세계에 국한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 그나마 인간이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이란 자신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4) 그와 같이 인간은 태생적으로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세계관과 관리영역의 제한을 받고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창조주의 넓고도 넓은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구체적으로, ①모든 인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②인간의 힘으로써는 세상만민이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③서로가 영역싸움과 먹고 살기 위한 소유권과 지배권싸움에 뛰어 들어 있는데 어떻게 일방적으로 창조주의 생각대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다고 하여 남들을 살리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가 있겠습니까?
5) 그와 같은 입장에서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일방적으로 히브리 인을 노예신분에서 해방하여 출애굽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로가 처한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께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했다고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처벌하시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표현이 교묘하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완악하였더라”고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받아 들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생명을 살려주고 함께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형성이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함께 살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무릅쓸 수 있는 새로운 기풍이 조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을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예언의 핵심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여건상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시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새로운 시대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사11:1-9, 19:22-25).
(2) “내게 들으라”(사46:12b); 신명기 제6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시는 그것이 이름하여 ‘쉐마’입니다. 인간이 처한 환경과 제약성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설정이 된 것이므로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만민구원과 세상구원이 가능한 하나님의 비책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피조물인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 실천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가 놀랍게도 마지막 구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a)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b)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c)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46:13);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를 실천하는 자를 사람들 가까이 보내어 주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디에 보내어 주시는지 이사야가 상징적인 수법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모범을 보여주는 자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본문을 분석하면서 한번 따져보아야만 할 사항들입니다;
(1)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사46:13a);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시고 직접 인간 가까이 오시게 되면 그 진면목을 보게 되는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출33: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아니하도록 가장 비슷하고도 친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십니다;
1) 모세는 창세기 제18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 나타나셨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창18:1-2). 그것은 하나님의 현신(epiphany)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짧은 시간 인간 앞에 나타나셔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고 깨닫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자 메시아를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십니다(사7:14, 9:6, 11:1-9). 아기로 태어나서 평생을 사람들과 똑같이 자라나고 함께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메시아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직접 실천하게 됩니다. 그렇게 인류의 역사 가운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처음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인간의 모든 제약성을 똑같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서 공의의 정신을 자기 희생으로 실천하고 있는 자가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병기에 해당합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방법은 복음서를 참조하면 성공적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쫓아서 살아가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복음으로 무장하여 끊임없이 만민구원에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비책이 장차 새로운 시대를 열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의 시대이며 복음의 시대입니다. 이사야는 그와 같은 놀라운 시대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기쁜 마음으로 본문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46:13a).
(2)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사46:13b); 선지자 이사야가 이 예언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던 때는 주전 700년을 전후한 시대입니다. 그는 700년 정도가 지나면 메시아가 만민구원의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사실을 예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려 700년이나 후의 일에 대하여 그는 “나(여호와)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사46:13b)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700년의 시간적인 간격이 지체하지 아니할 정도로 빠른 조치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어폐(語弊, 말의 폐단)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여 홍수심판을 일으키십니다(창6:5-7). 그때가 노아 600년인 주전 2,458년경입니다(창7:11). 이듬해 홍수가 끝나고 땅이 마르자 방주에서 나온 노아 가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창8:20-22). 그때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하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2) 그리고 무지개 언약을 세우십니다(창9:11-17). 그것은 일종의 구원의 언약입니다. 그때가 주전 2,457년경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을 심판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계획이 성립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사야의 시대까지 1,700년 이상의 준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드디어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거의 준비가 끝나고 있다고 여기서 발표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이사야는 아직 그 기간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메시아가 오시는 시대가 거의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영원히 지속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가 아니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완악한 환경을 설정하셨기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완악하게 저부터 살고자 궁리를 하고 있지만 그 핑계와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아니하게 되는 시대가 바야흐로 지체하지 아니하고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을 실행하는 만민구원의 프로그램이 이제 작동을 앞두고 있다는 엄숙한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3)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46:13c); 메시아가 어디에 오시는 것일까요?
1) 이사야는 일찍이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나신다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사11:1). 그 예언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2) 그런데 메시아의 경우에는 태생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으로 만민구원을 실천하고자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바친 그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덤에서 그를 살리시고 승천시키신 그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성경은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며(마27:33, 60, 28:1, 7) 그 동쪽 오리(五里) 길에 있는 베다니라고(눅24:50, 요11:18) 기록하고 있습니다.
3) 그 사실을 여기서 이사야는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46:13c)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도성인 예루살렘 곧 시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자나깨나 선지자 이사야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그의 동족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소원이 떠나지 아니하고 자리를 잡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흔히 복음에는 국경이 없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므로 국경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성도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가정과 가족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와 민족 나아가서 국가의 거대한 영향 속에서 성장하고 또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국경이 있다고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사람들이 타고난 제약성과 한계 때문에 실천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성도들이 가까운 미래에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민구원의 새 시대를 이루어나가실 것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입니다. 그러면 장차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만민구원에 나서며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게 되는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옷 입게 되는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시대가 동족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시작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의 예언은 이사야의 개인적인 소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민구원의 시대,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숨쉬는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가 개인적으로는 국경을 초월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동족의 구원을 너무나도 애타게 바라고 있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21세기 지구촌시대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지만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나아가서 이사야의 마음을 닮아 하나님께 조국의 통일과 복음의 나라로 거듭나는 놀라운 역사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전개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를 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제부터 더욱 굳건하게 간구하여 동족과 더불어 그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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