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0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25. 04:06

이사야 강해 제205(44:18-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11()

 

선민들이 그만 우상문화에 깊숙이 빠져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차이점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버렸다는 이사야의 기록(44:18-20)

 

이사야는 주전 740년경 유다 왕국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여호와를 만나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6:1-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을 그의 동족들이 깨닫지를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6:9-10). 그때부터 이사야는 하나님의 그 예언을 염두에 두고서 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를 열심히 묵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이사야는 그 이유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이사야는 본문에서 자신이 발견한 그 이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동족인 선민들이 그만 우상문화에 깊숙이 빠져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차이점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버렸다는 것입니다”(44:18-20). 창조주에게 구해야 할 것들을 사람이 만든 우상에게 구하고 있으니 기가 찰 일입니다. 어째서 그토록 영적으로 그리고 지성적으로 우매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제부터 각 구절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b) 그들의 마음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44:18); 창조주와 피조물인 우상과의 차이를 왜 분별하지 못할까요? 무엇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44:18a); 성경상의 예화를 들어가면서 그 의미를 음미해보고자 합니다;

1)    훗날 메시아로 유대 땅에 오신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들리고 있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십니다; “너희(사마리아 사람)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예루살렘 사람)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4:22).

2)    풀이를 해보자면, 주전 930년경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제국이 둘로 갈라집니다; 북쪽에는 에브라임 출신 여로보암1세의 이스라엘 왕국이, 남쪽에는 다윗 왕조 르호보암 왕의 유다 왕국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1세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선전하면서 북방의 단과 남방의 벧엘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왕상12:28-29).

3)    그렇게 우상을 만들어 섬기라고 강제한 이유는 완전히 정치적인 것입니다. “북쪽 10지파의 백성들이 절기를 맞아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남쪽 유다 왕국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을 교묘하게 우상을 만들어 봉쇄하기 위함입니다”(왕상12:26-27). 그때부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은 영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창조주 여호와와 우상과의 차이를 간과하게 됩니다. 그 차이를 모르고서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섬긴 것입니다.

4)    그 비극은 사마리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 히스기야 왕의 유다 왕국이 또 그러합니다(왕하20:19, 39:8). 그 다음 므낫세 왕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왕하21:2-16).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시작은 정치적인 욕심입니다. 그 다음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하나님이 더 편리하고 더 힘이 있어 보인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5)    그들이 보이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사실은 금송아지처럼 피조된 형상이며 우상입니다. 십계명을 살펴보더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결코 피조물의 형상으로 자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20:3-11). 당연히 영이신 하나님을 그렇게 물질적인 관념으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6)    한 마디로, 사람들의 정치적인 욕심과 물질적인 욕심이 그들의 영적인 눈을 가려버릴 때에 비극이 발생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들이 형상화하여 섬기고 있는 우상과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44:18a). 그것이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비극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처벌에 해당합니다.

(2)  그들의 마음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44:18b); 물질적인 형상과 쉽게 이루고자 하는 욕심에 이끌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창조주가 제시하고 있는 신앙상의 절차 그리고 말씀의 뜻을 분별하고 청종해야만 하는 의무사항이 귀찮아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적인 소원성취를 얻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존재하는데 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 어기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립니다. 드디어 악한 세력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그 마음은 어두워지고 영적인 분별력은 제로가 되고 맙니다.

둘째로, “(a)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b)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c)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d) 내가 어찌 그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44:19); 이사야가 하나님과 우상과의 차이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안타깝게도 다음과 같이 그 차이를 고백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1)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44:19a); 이사야는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게 되면 생각과 지식과 총명 등 세 가지가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세 가지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1)    마음에 생각도 없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좋은 생각을 주십니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피조물들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청지기인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게 되면 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서 피조물을 돌보고 사랑하는 그 생각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2)    지식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주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14:26, 16:13, 17:8).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를 더 소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소원을 세상적으로 쉽게 이루어줄 수 있는 지식을 찾기에 열심입니다. 그렇게 성공신화에 목말라하며 성장의 노하우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어떻게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차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겠습니까?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사야는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드러내는 메시아적인 지식이 이 땅에 넘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11:9).

3)    총명도 없으므로”; 우상문화가 유대사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거짓선지자들이 백성들을 묘한 말로써 현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을 구별할 수 있는 총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절실한 그 총명이 유대사회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이사야가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2)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44:19b); 생명을 살리는 생각,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총명 등 그 어느 것도 사람들에게 주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우상이며 거짓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남을 해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생각, 세상적으로 소원성취를 할 수 있는 지식, 성공의 길을 포착하는 총명함 등을 추구하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 모두가 처벌의 대상이며 영원한 불 못 속에 던져질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영적인 능력이 없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관념을 심어주고 있는 나무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불태우고 취사용 연료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44:19b 의역).

(3)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44:19c); 우상은 나무조각일 뿐입니다. 그것에 영적인 관념을 불어넣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서 섬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심각한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20:3-11). 더구나 하나님의 세상창조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1)    창세기 제1장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에게만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허용했을 뿐입니다(1:26-27).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주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령해 보이는 나무나 큰 바위 그리고 천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는 영적인 능력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2)    그리고 제2장에서는 창조주가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사람에게만 불어넣어 주십니다(2:7). 따라서 사람만이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며(2:15)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경영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1:26-28).

(4)  내가 어찌 그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44:19d);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는 유일한 존재인 사람들은 다른 피조물보다 더 중요한 사명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른 피조물들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돌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청지기인 사람들이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무토막으로 만든 아름다운 우상을 신이라고 여기고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안타깝게 동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무토막으로 만든 이방 신이나 우상 따위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잘못된 처사입니다”(44:19d 의역).

셋째로, “(a) 그는 를 먹고, (b)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c) 자기의 영혼구원하지 못하며, (d) 나의 오른손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44:20); 우상문화에 빠져든 자들이 겪게 되는 네 가지 참상에 대하여 이사야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참상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1)  그는 를 먹고”(44:20a); 우상을 계속 섬기게 되면 하나님의 처벌을 받게 됩니다. 우상이 불타고 그 재를 백성들이 마시게 되는 참혹한 역사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례가 있는 일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을 한 후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1)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시내 산으로 올라간 후 몇 주 동안 소식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불안하여 대제사장 아론에게 요청합니다; “모세 대신에 우리를 인도한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32:1). 아론은 차제에 출애굽의 여호와를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주고자 합니다.

2)    아론은 애굽의 이방 신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조상들의 신 여호와를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잘 섬기라고 준 것입니다(3:6, 15-16, 32:4). 그의 생각으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훨씬 백성들이 쉽게 섬길 수 있도록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었으니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3)    감히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적인 하나님을 물질적인 형상으로 함부로 비하한 것입니다(20:4-5). 그것은 영생의 하나님을 생명력이 없는 피조물로 대체하고 있는 영적인 모독행위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을 태워 가루로 만들어 그 재를 백성들이 시냇물과 함께 나누어 마시도록 처벌을 하고 맙니다(32:20).

(2)  허탄(虛誕, 거짓되고 신뢰의 대상이 아님)한 마음에 미혹되어”(44:20b);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8:44). 거짓말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며 사람들을 속입니다. 결코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귀의 거짓말을 믿고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3:4-6). 자신의 탐욕을 이루고자 마귀의 말을 따르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그 마음을 이사야는 여기서 허탄한 마음’(44:20b)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부패한 마음’(17:9)입니다.

(3)  자기의 영혼구원하지 못하며”(44:20c); 창조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2:7). 그때부터 인간이 유일하게 피조물 가운데 영혼을 가진 육체의 소유자가 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더 이상 육체에 머물지 못하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합니다(3:21). 무덤에서 깨어난 영혼이 부활의 몸을 입고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어떠한 미래가 전개될까요?(20:6, 12-15)

2)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5:22),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9).

3)    사람은 스스로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상도 그러합니다. 오로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권한을 대행하는 자도 우상이 아니고 메시아입니다.  

(4)  나의 오른손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44:20d); 100년 안팎의 인생을 사는 동안에 사람이 끝까지 그 오른 손에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튼튼한 동아줄일까요? 아니면 영혼구원이 전혀 불가능한 썩은 새끼줄에 불과한 것일까요?

1)    이사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것은 거짓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44:20d). 그런데 우상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거짓선지자들이 주장을 했을 때에 그 말을 백성들이 쉽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    그 이유는 우상을 섬기는 방법은 쉽고 재미가 있는데 비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귀찮고 손해를 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의 달콤한 말에 현혹이 되고 나면 우상이야 말로 세상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만 같습니다. 한 마디로, 적게 투자했는데 큰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욕심을 충동질하고 또한 합리화를 해주고 있으니 그 꾀임에 넘어가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3)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거짓선지자에게 속았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4:20d). 그 이유는 창세기 제3장에서부터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우상을 섬기고 거짓선지자의 말을 청종했는데 나중에 어떻게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눈 밝으신 하나님 앞에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변명거리에 불과합니다”(3:11-19).

결론적으로,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유한한 삶만을 영위하고 있는 피조물과의 명백한 차이점을 사람들이 간과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우상문화에 크게 물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민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왜 그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고자 신앙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창조주 하나님은 만민과 만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올바른 청지기가 되기 위해서는 본인의 희생과 헌신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그 희생과 헌신이 싫은 것입니다. 다른 대안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말을 갈아타고 싶습니다. 그러한 그들 앞에 악한 영들이 거짓선지자들을 내세워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보장과 영혼의 구원까지 손쉽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뒤늦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거짓선지자들에게 속아서 우상을 섬기며 살아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받아들여질까요? 이사야는 전혀 변명거리가 되지를 못한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영생의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현세적인 이익을 보장한다는 거짓말과 우상을 따랐으니 그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먼저 동족들에게 외치고 그 다음에 그의 선지서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 뜻은 자신의 동족인 선민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당대에 관한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전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대인이거나 현대인이거나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적용은 당연히 시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에게 적용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도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현세적인 욕심을 이룰 것인가? 아니면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욕심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선지자 이사야의 심정으로 동족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쪼록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유일한 대안을 제시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