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02강(사44:5-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29일(화)
선지자 이사야가 영원한 왕이며 구원자로서 모든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다(사44:5-8).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 제44장 제5절에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세 가지 스타일의 사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는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 둘째, 자기는 야곱의 자손으로서 혈통적으로 이미 선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셋째,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자신의 인생의 기록으로 보여주며 그것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는 사람 등입니다.
그 가운데 이사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로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아간 사람은 제3의 유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3의 유형의 사람만이 말로써만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써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신분이나 혈통을 들먹이면서 남의 눈을 의식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자신의 인생살이 자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시고 그 인생살이를 모두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그 인생살이의 기록은 훗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대에 올려지게 됩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인생을 진실되이 살아가게 됩니다(창39:9). 그 결과 의미가 있는 인생이 되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수 있는 기록으로 재삼 증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상에 기록되고 있는 믿음의 열조들과 선지자들에 대한 기록이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창5:22-24, 6:9, 12:1-4, 22:12, 45:7-11, 50:20, 신34:10-12, 행13:2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도로 사람들의 행태를 일일이 점검하시면서 그들의 인생에 대한 최종평가를 신중하게 내리시고 계실까요? 훗날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의 말씀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의 주장이나 말에 속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적인 행동을 면밀하게 살피고 평가하신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리고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제18장의 기록을 참조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의사결정과정은 다음과 같이 신중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등지에서 무죄한 자들이 억울하게 피를 흘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소리를 평소에 모두 듣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18:20). 그리고 출애굽기를 보면, 애굽에서 억울하게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도 모두 듣고 계십니다(출2:23-25).
(2) 그러나 금방 심판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천사 둘을 소돔 성에 보내어 현지실태를 조사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창18:22, 19:1).
(3) 그들 천사들에게만 현장조사를 전적으로 맡겨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소돔과 고모라 뿐만 아니라 아드마와 스보임(신29:23) 그리고 소알 성까지 모조리 정탐을 하십니다(창18:21).
(4) 그렇게 입체적으로 조사를 하고 또한 선지자 아브라함의 의견까지 들으신 다음에(창18:23-33) 최종결론을 내리시고 계십니다(창19:23-25).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용의주도하시고 신중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중보기도의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창18:32, 20:7, 17-18).
이상과 같이 면밀하게 사람의 인생을 감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또한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 신중하신 태도를 생각하면서 이사야가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은 묵상해보면 한층 이해가 깊어집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그와 같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각 구절을 검토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음미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b)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c)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 선민 이스라엘의 왕, 그들의 구원자, 그리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그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이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1)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사44:6a); 사람들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 제국의 왕이 다윗 대왕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 다윗은 여호와의 종입니다(삼하3:18, 행13:22). 따라서 진정한 선민의 나라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2) 고대사회에서 왕국의 모든 백성과 재산은 전부 왕의 소유물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왕에게 속한 것입니다. 동일한 이치로 선민들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속한 백성들을 구원하여 영원히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3) 더구나 이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탈취해갈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애초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라는 명제는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명제는 지극히 영예스럽고 위엄이 있는 것입니다.
(2)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사44:6b);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선언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을 선민으로 세우시고 그 나라의 왕이며 주권자이기 때문에 그 백성을 완전히 탈취해갈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1) 마지막까지 선민을 지키시고 구원해내실 것이므로 그것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의문이 생기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방인들의 제국인 바벨론에 의하여 선민의 나라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그들의 사회에 오시는 메시아를 배척하고 죽이게 됩니다. 그 결과 선민의 사회가 다시금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2) 사도 바울이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해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11:25-2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3) 풀이를 해보자면, 하나님의 구원을 앙망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순서를 인내로써 기다릴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여 우둔하게도 다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신앙에서 실족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 세상적인 방법이 속히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자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3)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c); 여호와 하나님은 한 마디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방법과 우상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은 불신앙의 전형입니다. 그것은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우상이 망할 때에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유혹을 견디는 자, 또는 잠시 실족을 하더라도 곧 회개하고 돌아서는 백성들만이 다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a)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b)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사44:7); 창조주께서는 자신이 영원하듯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요3:16). 그 방법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대대로 신실하게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신실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장래가 비극적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 가감 없이 진실되게 전해주시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특징이 창조주 하나님의 것임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사44:7a); 하나님은 속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감추고 있지도 않습니다;
1) 다만 그것이 너무나 정직한 것이기에 부정직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기에 세상적으로 바라보면, 멍청하며 미련스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메시아를 보내셔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으로 믿는 자를 구원한다는 시나리오가 그러합니다.
2) 이미 이사야 제53장에서 소상하게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 우직한 대속의 방법을 사용하겠느냐고 똑똑한 세상사람들과 영악스러운 악한 영들이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의 지혜가 패배를 하고 하나님의 미련스러워 보이는 십자가의 대속의 방법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1:18, 27, 3:18-21).
3)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으로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언약의 상대방은 대를 이어가고 있지만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은 불변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대대로 그 언약 안에 머물기만 하면 구원을 따놓은 당상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대대로 선지자를 계속 보내어 동일하게 확인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신실하게 자명한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가르치고 설명을 해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소위 히브리어로 ‘헤세드’ 하나님이십니다.
(2)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사44:7b); 이사야는 이제 우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 우상은 불변의 진리와 자명한 진리를 전달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창조주가 아니며 역사를 섭리하는 주권자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또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2) 나아가서 역사적인 사례의 통계수치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그럴 듯하게 현재와 미래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통계적인 방법으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처방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확한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3)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창조에 결코 만족하시는 창조주가 아니십니다. 역사를 섭리하시면서 계속 새로운 창조를 하십니다.
4) 하나님은 진리가 진리로서 증명이 되고 또한 구원의 언약이 반드시 실효성을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그리고 장애가 있으면 새로운 창조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피조물이나 우상이 결코 흉내를 낼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두려우신 능력입니다.
셋째로, “(a)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b)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c)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44:8); 성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마침내 구원하시는 은총을 베풀고 계십니다. 비록 부족하고 미흡하며 넘어질지라도 다시 믿음의 사람으로 일으켜 세워서 재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견인(堅忍, 오래 참고 인내하심)이며 전능하심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사44:8a); 세상의 풍파를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이사야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세상의 환난과 핍박이라고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보호함을 받고 있는 성도의 영혼을 해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롬8:37-39). 조금 설명을 더해봅니다;
1) 물론 성도들이 이 세상에 속한 유한한 육체와 목숨을 잃어버릴 수는 있습니다(마10:28). 하지만 그 기간은 잠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을 영원히 담을 수 있는 영생하는 부활의 몸을 다시 입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5:20-24). 그와 같은 사실을 이미 듣게 하고 알려주었다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사44:8a).
2) 그 증거를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19:25-27). 고대 족장시대 동방의 제사장 욥이 이미 대속자의 오심과 그 앞에 부활하여 자신이 서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을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5-7). 메시아가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영원히 군림한다는 예언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으로 다시 서는 자들이 부활한 성도들입니다.
(2)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사44:8b); 이사야는 이미 구원자 메시아의 오심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시작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 동안 불완전했던 선민의 나라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은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대신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누가 선택이 될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의 관심은 온통 그 이슈에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단 하나입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사44:8b). 창조주, 구원주, 영원한 나라의 왕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이 천국백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2) 그런데 이사야가 이미 메시아가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7:14, 9:6-7, 11:1-9). 따라서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증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언급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6-48).
(3)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44:8c);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기댈 언덕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구원의 반석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반석일까요?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 세상에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고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구출해주는 정도의 문제라고 한다면 구태여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일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시면 도저히 그와 같은 구원을 베풀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위와 같이 선언하시는 명제가(사44:8c) 지극히 논리적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은 어느 수준의 것입니까? 그저 한 세상 살아가는데 부딪히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소원성취와 무병장수를 얻게 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한 구원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를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구태여 창조주 하나님을 섬긴다고 부산을 떨 이유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활과 영생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유한한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영적인 충만함을 얻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목숨보다는 천국에서의 영생을 누리고자 합니다. 100년 안팎의 육신적인 장수함보다는 부활의 몸을 입고 영적인 장수함을 영원히 누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운명을 창조 받아야만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훗날 메시아가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는 예언을 이미 한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메시아의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는 증인들이 장차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마28:18-20).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또한 철저하게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영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따라서 아무쪼록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도 영적인 생명력을 충만하게 느끼고 전파하는 놀라운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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