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0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22. 10:39

이사야 강해 제200(43:25-2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227(주일)

 

창조주의 전능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이에 따라 이사야는 전통적인 선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의 시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선민과 새 성전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예언을 하다(43:25-28).

 

창세기 제17장을 보면, 가나안 헤브론 땅에 안주’(安住, 평안하게 거주함)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다시 선교의 일꾼으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가나안 지역을 메소포타미아의 침략군으로부터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며(14:14-16) 그 지역 헤브론에서 힘이 있는 성주입니다(14:24). 더구나 그는 노년에 아들 이스마엘까지 얻어(16:15-16) 바야흐로 만족스러운 여생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일찍이 그를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으로 보내신 애초의 목적과 사명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서는 매사를 하나님과 상의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도우심을 입어서 실천하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17:1).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론입니다.

오늘의 말씀 본문을 보면, 그 옛날 헤브론 땅에 안주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선민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에서 그대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자랑거리 6가지를 내세우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 자신들의 의로움, (2) 믿음의 열조, (3) 율법교사들, (4) 제사장들, (5) 야곱의 믿음, (6)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앙생활 등이 그들의 자랑거리입니다(43:26-2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6가지는 자랑거리가 아니고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있는 요소들이라는 것입니다(43:27-28). 따라서 전혀 새로운 선민을 창조하시고 또한 새로운 성전을 만드시겠다고 하는 뜻으로 제25-26절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과연 그와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면밀하게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나 곧 나는 (창조주의 명예)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43:25); 사람들의 죄악상을 보면 도저히 용서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모두 심판의 대상들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자신들의 이익과 번영만을 추구하고 있는 이방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 이스라엘조차 이방인들에게 물이 들어 형편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고 그 속내는 현세구복적이고 선민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29:13). 게다가 이방인들의 나라를 모두 멸망시키고 자신들의 종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으니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 무서운 선민사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결단을 내리시고 계십니다. 사람을 잘못 만든 모든 책임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시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43:25). 사람들의 허물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 속죄하는 절차를 밟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대속의 제물로 이 땅에 보내시는 이유가 됩니다(1:29). 메시아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희생제물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도말하고 기억조차 아니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43:25).

그렇게만 될 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명예를 회복하실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훗날의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가 처형이 되고 있는 골고다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며 뜻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게 되는 창조주의 능력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2:32-33, 1:17).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시대에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지 여부는 사람들의 결단과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적인 도우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도우심은 제대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아예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성전입니다(고전6:19). 이에 따라 전통적인 선민의 개념과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둘째로, “(a) 너는 나에게 (무지개와 같이) 기억이 나게 하라. (b) 우리가 함께 (메시아의 공로를) 변론하자. (c)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43:26); 성도들은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억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들이 의롭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을까요?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1)  너는 나에게 (무지개와 같이) 기억이 나게 하라”(43:26a); 노아의 홍수가 끝나자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들이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8:20).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심판과 같은 전면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8:21-22). 그 약속의 증거로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설치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9:11-17);

1)    비가 땅으로 많이 쏟아지게 되면 무지개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 무지개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진노의 마음을 거두시고 비를 그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범죄한 인류를 심판하시고자 할 때에 무엇이 무지개와 같은 기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이끌어낼 수가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2)    물론 십자가만으로써는 별로 효력이 없습니다. 핵심은 그 십자가를 의지하여 범죄한 자신을 부디 용서해달라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이제부터는 범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갈 것이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하는 그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2)  우리가 함께 (메시아의 공로를) 변론하자”(43:26b);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변론의 순서가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메시아의 대속의 제사가 자신에게 죄 사함의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 유력한 변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기 때문에 변론은 계속이 됩니다. 그 다음에 변론해야만 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함을 받은 그 다음의 자신의 인생입니다. 끝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갔느냐? 아니면 다시 제멋대로 살아갔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그 근거를 말해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8:11).

(3)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43:26c);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보라는 지적입니다;

1)    선민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의롭다고 하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만천하에 외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8:11-12),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3).

2)    선민사상과 외식적인 율법생활에 의존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의로움으로써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만약 만족시켰다고 한다면 선민들의 나라가 망하고 그들이 세상의 유민으로 떠돌지 아니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답은 사람들의 자신의 이기적인 판단과 의로움이 아닙니다. 곧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그러한 성공적인 사례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의로움입니다.

셋째로, “(a) 시조(始祖, 처음 조상)가 범죄하였고, (b) 너의 교사들이 나를 배반하였나니”(43:27);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와 교사들이 이미 하나님의 눈밖에 나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1)  시조가 범죄하였고”(43:27a); 선민들의 처음 조상은 누구일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입니다. 그들 믿음의 열조들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있을까요? 그렇지가 못하기에 이사야는 그들도 범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물론 그들은 시행착오를 많이 거친 다음에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헤브론 막벨라 굴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49:30-33, 11:13-16).

2)    참고로, 그와 같은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5-29).

(2)  너의 교사들이 나를 배반하였나니”(43:27b); 전통적인 유대교는 장로들의 유전을 율법의 세칙으로 삼아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1)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15:1-3).

2)    풀이를 해보자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선생입니다. 그들이 유대교의 교사들입니다. 그리고 선민들의 장로들이 율법의 세칙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계명을 배반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3)    그와 같은 지적은 선지자 이사야의 다음 글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29:13-14).

넷째로, “(a)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을 욕되게 하며, (b) 야곱이 진멸 당하도록 내어주며, (c) 이스라엘이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43:28); 선민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이방인들처럼 타락하게 되자 그 처벌이 엄청납니다. 역사적으로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지에 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을 욕되게 하며”(43:28a); 성소의 어른들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이 욕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주전 586년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 제국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왕하25:1-7). 그리고 몇 년 후에 바벨론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불사르고 성전까지 태워버리고 맙니다(왕하25:9). 그 후 일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제2성전을 건축하지만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24:2) 주후 70년 로마군대의 진격으로 다시 완전붕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야곱이 진멸 당하도록 내어주며”(43:28b); 여기서 야곱이 진멸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자손들의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망하게 되면 그 다음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요? 새로운 선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들은 혈통적인 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나는 새로운 선민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메시아)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3)  이스라엘이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43:28c);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이 망하고 나면 그 백성들이 신바벨론 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끌려가게 됩니다. 그 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방 땅에서 유민으로 떠돌게 됩니다. 훗날 그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제2성전을 건축하고 선민의 삶을 영위하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3:6). 그들 유대인들이 훗날 중근동과 유럽 땅에서 그렇게 환영을 받고 있지를 못합니다. 특히 메시아를 처형한 이후부터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사야가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비방거리가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작지가 않습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어느 민족이나 종교적인 집단이 구태의연하게 선민우월사상에 젖어 있다고 한다면, 전세계적으로 똑 같은 비방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민우월사상과 현세구복적인 신앙에 물드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선민의 나라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멸망하게 되고 그 백성들이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하나님의 섭리로 다시 고토로 돌아와서 제2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신앙을 새롭게 하지만 완전한 개혁이 아닙니다. 따라서 훗날 만민구원을 위하여 그들의 땅에 오신 메시아를 배척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완전히 망하고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온 세상에 흩어지고 맙니다.

이사야는 그와 같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혈통적인 선민을 대신하게 될 새로운 선민들이 장차 나타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성도들입니다. 선민 이방인 구분이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성도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그 삶을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도로 만민구원의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며 하나님의 의를 얻는 구원의 방법론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만민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쫓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그 옛날 선민들의 정의를 따를 것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양자간 선택의 기회만이 모든 사람들에게 남게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깊숙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 일생일대의 위대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쫓아서 남은 인생을 그 제자로 살아가시는 귀하신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