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99강(사43:21-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26일(토)
만민구원을 위하여 선택이 된 제사장나라 선민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다(사43:21-24)
이사야가 기록하고 있는 선지서 제43장 제21절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 이 백성은, (b)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c)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 문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관념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1) “이 백성은”(사43:21a); ‘백성’이라고 하는 용어는 집단적인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구성원들이 모두 동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백성’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2)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사43:21b); ‘이 백성’은 하나님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피조물입니다. 그 특정한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을 위하여 맡겨진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3)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c).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집단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찬송을 돌려드리는 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그 뜻이 바로 하나님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만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막12:30-31).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표본으로 선정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을 선택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출19:5-6) 하나님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전혀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행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 선민만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종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축소지향적인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사장나라’ 대신에 ‘제사장계급’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의 잘못을 속죄하는 일을 제사장계급이 행하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인과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 자손만 구원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의 개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창조주는 선민의 찬송만 받으면 되지 이방인들의 찬송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일개 ‘민족적인 신’에 불과합니다.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선민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a)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b)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사43:22);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있어서 야곱은 하나님의 의견을 묻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차를 거친 다음에 큰 일을 행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예를 들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사43:22a); 하나님의 예언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때에 야곱이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그 의견을 묻지를 않습니다. 상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리브가는 결혼한지 20년 동안 불임입니다(창25:20, 26). 그래서 남편 이삭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열심히 기도합니다. 부디 불임을 치료하시고 자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창25:21). 이삭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역시 불임여성이었던 어머니 사라가 90세에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낳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창11:30, 21:1-7). 그 결과 리브가가 쌍둥이 아들을 임신하게 됩니다.
2) 쌍둥이가 뱃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예언이 임합니다; “첫째가 둘째를 섬기게 될 것이다”(창25:23)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자상속이 원칙인 고대족장사회에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언의 실현은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의 축복을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가로채는 일에 있어서(창27:7-14) 하나님께 간구를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만약 간구를 했더라면 그와 같은 사기행각이 이루어지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어머니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은 잘못이 그들 개인의 차원에서 끝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도 그러하다는 이사야의 지적입니다(사43:22a).
(2)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사43:22b);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큰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그 허락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전투를 치르게 되는 것과 같이 급박한 경우에 있어서는 준수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약식으로 대충 제사를 드리고 전투에 임하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초대 왕 사울 때입니다(삼상13:5-10);
1) 블레셋과의 전투는 급한데 대제사장 사무엘의 행차가 늦습니다(삼상13:8). 어쩔 수 없이 사울 왕이 대신 약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전투에 임하고자 합니다(삼상13:9-10). 사울 왕의 판단으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절차가 심히 괴롭고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근본적으로 전투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출17: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그 전투를 맡겨드리는 정식 제사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괴로운 것이 아니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승리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출17:15-16).
둘째로, “(a)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b)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c)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사43:23);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잘 순수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그렇지가 않다고 여기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사43:23a); 아브라함이 ‘하나님 경외자’로 역사 가운데 우뚝 서게 되는 곳은 모리아 산입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가 참 이상하지만 순종을 합니다(창22:3).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명령이지만 따르고자 합니다(창22:2). 그 이유에 대해서는 훗날 히브리서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히11:17-19)
2) 그러나 막상 칼로 이삭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급히 나타나서 가로 막습니다(창22:10-1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장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릴 수 있는 신앙심을 지니고 있는지 그것을 보고자 한 것이지 실제로 ‘인신제사’(人身祭祀)를 원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그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외자’로 선언하시고(창22:12)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게 됩니다(롬4:16).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와 같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본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 마디로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43:23a).
(2)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사43:23b);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누구의 것일까요? 창세기는 그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믿음의 열조들에게 준 것 가운데 일부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재물을 크게 얻게 되는 장소는 애굽입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사라의 연고로 아브라함에게 많은 가축과 재물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창12:16). 그는 그 재물을 가지고 출애굽을 한 후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있습니다(창13:3-4, 15:9-10).
2) 또한 메소포타미아 다국적군을 추격하여 대파를 합니다. 많은 전리품을 되찾아서 개선을 하고 있습니다(창14:14-16). 그때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승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창14:19-20). 아브라함은 그가 얻은 전리품 가운데 십일조를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바치고 있습니다(창14:20).
3)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 급히 가로막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하나님 스스로 마련하십니다. 그곳 수풀 속에 걸려 있는 어린양입니다(창22:13). ‘여호와 이레’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준비하신 어린양 그 영원한 제물이 바로 훗날 ‘그리스도’이십니다(요1:29).
4) 야곱의 재물도 모두 하나님께서 라반의 것을 빼앗아 주신 것입니다(창30:36-43, 31:9, 42).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도 애굽에서 가축과 재물을 얻어서 나옵니다(창47:6, 출12:35-38). 야곱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그 가축 가운데서 단지 일부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드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제물로 말미암아 사람을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사43:23b) 진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3)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사43:23c); 기도생활 또는 영적인 신앙생활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그렇지가 않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대목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1) 100년 안팎을 살게 되는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유한한 생을 살면서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 허무함을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2)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창조주께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감당하다가 천국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는 기업을 얻고 영생을 누리라고 하십니다(롬8:1-18).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삶에 매몰되지를 않습니다. 영적인 삶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만민구원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3) 따라서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부디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영적인 능력을 달라고 기도생활을 하게 됩니다(엡6:12-20). 그와 같은 영적인 삶이 향기로운 유향과 같다고 하겠습니다(사43:23c, 계5:8).
셋째로, “(a)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b)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c)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사43:24); 이사야는 율법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선민들에게 그들의 죄와 악이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가슴이 서늘한 대목입니다;
(1)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사43:24a); 향기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에서 향을 피워 그 연기가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지성소로 흘러 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출30:6-8, 36).
1) 마찬가지로 기도생활로 상징이 되고 있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하여 성도들은 영과 육이 강건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추진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현세구복적이며 도구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전혀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돈으로 성의표시를 크게 하고자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데 백성들은 돈으로 그 시간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3)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돈을 버는데 시간을 모두 할애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황금만능주의에 매몰이 되고 있는 현대판 하나님신앙의 비극입니다. 그 원형이 여기 본문에서 이사야의 시대에 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43:24a).
(2)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사43:24b);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첫째, 향을 태우는 향기가 지성소에 들어갑니다(출30:7-8, 레16:13). 둘째, 제물의 기름을 태우면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갑니다(레3:9-11). 셋째,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 있습니다(출2:23-25).
2) 그 의미를 합하여 보면, 기도와 간구 그리고 희생적인 헌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3) 그런데 이사야가 보기에 선민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그와 같은 희생적이고도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대목의 뜻입니다(사43:24b).
(3)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사43:24c); 하나님께서 세상 수 많은 백성들 가운데 특정한 백성을 선택한 것은 맡겨야 될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제사장나라’는 다른 나라와 이방인들이 범하고 있는 죄를 하나님 앞에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선민들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마28:18-20).
2) 하나님의 뜻은 만민을 구원하고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여 새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요3:16, 롬8:15-22) 그러므로 그 일을 수행하지 아니하거나 방해를 하는 것은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성도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마7:21). 그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지 아니하는 그것입니다”(사43:24c). 예를 들면, 선민구원사상을 고집하면서 만민구원을 위한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처형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행위가 그러한 것입니다(마27:20-26).
3) ‘거룩한 백성’은 세상적인 가치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와 간구로써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 성공지상주의에 매몰이 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눈을 외면하고 또한 어두운 데서 엉뚱한 짓을 하게 되면 그것이 죄짐을 무겁게 합니다.
5) 훗날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사43:24c), 메시아가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얼마나 수고롭게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마23:2-33). 특히 그들 유대교지도자들은 자신들도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생활의 무거운 짐을 백성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있다고 부르짖고 계시는 것입니다(마23:4).
결론적으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 좋은 대로 한 평생을 살도록 창조가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러므로 모세가 일찍이 기록한 그대로, 선민이나 성도들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출19:6).
‘제사장나라’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특히 만민들의 구원을 위하여 선민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한 평생을 살게 되는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그 일을 게을리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훗날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사명완수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은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이고도 육신적인 삶에 매몰이 되지를 아니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체계를 이루고 있는 황금만능주의, 육신적인 향락문화, 성공지상주의에 물들지 아니하고 영생을 바라보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동족인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만민구원에 나서지 아니하고 선민구원에만 만족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나라로서의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곧잘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있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입니다(사1:11-15). 그 때문에 메시아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스도 예수님이 유대교지도자들의 외식적인 신앙행태에 대하여 얼마나 꾸지람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성도라고 한다면,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1)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파악하고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구해야만 합니다.
(2) 그리고 주님께서 가시면 함께 가고, 서시면 그 자리에 함께 서야만 합니다. 언제나 만민구원과 영생의 구원만을 바라보고서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3) 한 마디로, 이 세상의 유한한 가치에 사로잡히지 아니하는 그것이 성도의 영적인 삶인 것입니다. 그 은혜가 아무쪼록 간구하는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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