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9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21. 06:26

이사야 강해 제197(43:13-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224()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출바벨론의 역사를 다시 이루실 것이다(43:13-17)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출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요? 그 목적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19:6)이라는 말속에 들어 있습니다. 온 세상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제사장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의 삶입니다. 그와 같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선택이 된 민족이 사실은 선민’(選民, chosen people)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사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신들만 하나님의 구원을 독차지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침입하며 약탈하고 있는 이방나라들을 모두 적으로 삼고서 하나님께 그 멸망을 소원하며 제사를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평소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수호신과 우상을 섬기면서 국가적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의 태평함과 백성들의 평안함)과 개인적으로 현세적인 복을 빌고 있는 종교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부디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고 선지자 요나처럼 이방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강조하십니다(1:2, 3:1-2, 12:39-41, 16:4). 하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 말귀에 부는 바람처럼 효과가 없음)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나라가 망하고 세상나라의 압제를 다시 받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멀지 아니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고 포로생활을 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39:6-7, 43:14a). 그러나 다시 한번 회개의 기회를 주실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주고 있습니다(43:14b). 여기서 출바벨론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려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와 같은 뜻이 담겨 있는지 지금부터 각 구절을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43:13); 여기서 이사야가 태초를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1:1)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능력으로 다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능력으로써는 창조주의 일을 저지하거나 방해할 수가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논리가 맞고 동시에 현실적인 타당성이 충분한 설명입니다.

둘째로, “(a) 너희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b)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43:14); 이사야는 장차 바벨론에 의하여 조국 유다 왕국이 망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39:6-7). 그리고 여기서는 그 다음의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망하게 하시고 유다의 백성들을 구출해내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1)  너희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43:14a); 여기서 이사야가 구속자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애굽 제국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출해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그 대가를 치르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1)    그 대가는 바로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재앙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애굽 사람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이 전부 죽임을 당하는 슬픔을 맛보게 됩니다(12:29-30). 선민들 생각으로는 그것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대가이며 하나님의 보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하지만 사람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2:5). 슬프고 아픈 것입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1). 그 마음을 알고서 거룩한 백성들은 달리 살아가야만 합니다.

3)    어떻게 살아가면 될까요? 그 정답이 하나님의 산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5-6). 선택된 민족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나라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쫓아 그 일을 행하는 민족이 바로 거룩한 백성입니다.

4)    만약 그 일을 행하지 아니하면 거룩한 백성이 아니고 타락한 백성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선민의 위세를 자랑하면서도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애굽이 아니라 세상나라 바벨론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2)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43:14b);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이켜서 다시 제사장나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의도이며 역사섭리의 방향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섭리를 통하여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구출해내실 것입니다. 신 바벨론 제국은 본래 갈대아 사람들이 세운 왕조입니다. 그들은 유프라데스 강을 타고서 남하한 아람의 한 갈래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제국이 망하게 되자 다시 고토(故土)로 돌아가고 만다는 예언입니다.

셋째로, “(a)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 (b) 이스라엘의 창조자, (c) 너희의 이니라”(43:15); 이사야는 짧은 본문이지만 다음 세 가지 개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43:15a); ‘여호와는 피조물이 어찌할 수 없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3:14)라는 의미입니다. 창조주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창조주는 피조물과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거룩함입니다(6:3). 거룩하다고 하는 개념은 피조물의 생각과 뜻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55:8-9). 예를 들면, 피조물은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지만 창조주는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5:44-45). 그 이유는 그 원수가 바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2)    물론 창조주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것은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이 아니라 악한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사탄과 그 하수인이 되고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6:12). 그들만이 하나님의 용서함을 얻지 못하고 완전한 멸망으로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14:12-20, 20:10).

(2)  이스라엘의 창조자”(43:15b);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든 것은 그 타고난 운명을 바꾸어주는 것입니다(32:28, 35:10). 그것은 새로운 운명의 창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나라 애굽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는 것도 새로운 운명의 창조입니다(43:15b). 더구나 이스라엘의 해방과 구원 그리고 번영만을 희구하고 있는 선민들의 생각을 바꾸어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든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65:17-18).

(3)  너희의 이니라”(43:15c); 이사야는 다윗 왕조의 왕 히스기야의 신앙행태를 보고서 절망합니다;

1)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 사신들에게 나라의 보물창고와 무기창고를 전부 보여주고서도 자신이 잘못한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39:2-4). 세상적인 자랑이 엄청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겨우 구원을 받았으면 자신의 평소의 부족한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고 반성을 해야만 할 터인데 전혀 아닙니다. 특히 그 때문에 멀지 아니하여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망하고 왕족들이 적국 황제의 환관이 되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 앞에서도 그는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39:5-7).

2)    히스기야 왕은 그저 자신의 당대에 나라가 태평하고 개인적으로 영화를 계속 누릴 수가 있다고 하니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39:8). 그것이 현세구복적인 신앙입니다. 영생의 하나님을 만나 영원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생전에 영화를 누리게 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다윗 왕조의 왕이 아니라 제사장나라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43:15c).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실 새로운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넷째로,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43:16-17); 출바벨론의 역사는 출애굽의 역사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만약 출애굽의 이유와 목적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명심을 했더라면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고 노예와 같은 삶을 다시 살게 되는 비극이 찾아오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하지를 못했기에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만민구원의 사역에 나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묘사하고 있는 출애굽의 역사를 조금 살펴봅니다;

(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43:16);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 가에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 막고 있으며 뒤에서는 애굽 바로의 군대가 추격을 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14:9). 한 마디로, ‘사면초가’(四面楚歌, 한나라 유방과 천하의 패권을 두고 싸우고 있던 초나라 항우가 마지막 전투에서 패전하자 적군들이 사면을 둘러싸고서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면서 항우의 사기를 꺾고 있는 장면임)이며 진퇴양난’(進退兩難,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으며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어려운 형국을 말함)입니다. 세상적으로는 구원의 방법이 없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십니다(14:21-22).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을 건너고 있습니다.

(2)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43:17); 그렇지만 그 홍해 바다 사이에 난 길로 애굽의 군대 역시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들을 완전히 따돌려야만 이스라엘의 구원이 확실해집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군대를 바닷물로 덮어서 수장을 시키고 맙니다(14:26-28). 그것이 완전한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를 다시 한번 바벨론 땅에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 이사야를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선민임을 자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제국 애굽을 강하게 징계하시고 그 땅에서 오랜 세월 압제를 받고 있던 자신들을 해방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세상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을 괴롭히는 이방인들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렇지만 선민들의 주장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신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고 다시 이방인들의 노예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출애굽의 목적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여 제사장나라로 삼아주셨는데 그들은 이방인들의 죄 사함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려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선민들만 하나님의 복을 받고 현세적으로 영광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호와를 마치 우상처럼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민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할까요? 훗날 만민구원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의 시대에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의 정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옥석이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만민구원의 깨달음을 얻어서 그리스도처럼 실천하는 제자로서의 삶이 풍성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