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9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20. 12:09

이사야 강해 제195(43:8-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222()

 

누가 하나님을 직접 보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서 만민들에게 전해줄 수가 있을 것인가?(43:8-11)

 

하나님말씀의 진의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그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말씀으로 전해진 것들을 모두 검토하면서 그 논리적 일관성과 현실적 타당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 말씀대로 세상이 창조되어 있으며 지금도 운행이 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선지자 이사야는 본문에서 첫째 방법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상세한 내용이 어떠한지 지금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각 구절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a) 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b) 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 (c) 이끌어 (하나님 앞에 세워) 내라”(43:8);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1)  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43:8a); 사실 눈이 있어도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33:20). 그렇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34:10). 어떻게 모세가 죽지 아니하였을까요?

1)    그 의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밝혀주시고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네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33:20-23).

2)    풀이를 해보자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향하실 때에는 그 얼굴을 바로 볼 수 없도록 그 손으로 가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가 하나님의 뒤를 보고 있을 때에는 그 손을 치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은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과 죽음을 영원히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 바로 심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8).

3)    그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접하도록 되어 있을 때에 그들은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모세에게 부탁을 합니다. 모세 혼자만 시내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달라는 것입니다(5:5, 25-27). 지도자 모세를 대신 하나님 앞에 올려 보내고 자신들은 목숨을 보전하겠다는 생각입니다.

4)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주시지만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이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5:28-29). 하지만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을 받아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영생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까지나 모세나 선지자가 전해주는 말씀에 의존하여 간접적인 신앙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자기처럼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는 선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

5)    훗날 창조주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셔서 백성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2)  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43:8b); 사람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해주시기 때문입니다(19:19, 왕상19:12). 그렇게 인격을 가지시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접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그 음성 듣기를 백성들이 원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귀가 있어도 하나님 말씀의 정확한 뜻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    참고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발견하고 있습니다;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19:19).

2)    그것은 위협적인 음성이 아니라 위안을 주는 세미한 음성입니다. 그 사실을 엘리야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2).

(3)  이끌어 (하나님 앞에 세워) 내라”(43:8c); 하나님은 백성들이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로 계속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1)    본래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을 경영하도록 창조가 된 피조물이 사람입니다(1:26-27). 그러므로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자면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말씀을 직접 듣고 그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2)    그런데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소경이며 귀머거리입니다. 그들을 이제는 하나님 앞에 다시 세워야만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둘째로, “(a)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b)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c)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43:9);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어 선지자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그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깨달아 이 세상에서 실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은혜를 복음으로 이 세상 모든 나라와 그 백성들에게 전해줄 자가 누구일까요?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43:9a); 본래 그 일을 담당하도록 선택이 된 민족이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선민만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결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지 아니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이야기를(43:9a) 전혀 한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40일 후에 하나님의 진노로 니느웨 성이 무너진다는 예언입니다(3:4).

2)    니느웨 왕과 백성들이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고 그 성이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발생합니다(3:5-10). 선민의 선지자인 요나는 그 일이 무척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니느웨 근교에 머물면서 다시 악을 행하고 망하는 꼴을 지켜보고자 합니다(4:15). 그것이 소위 선민들의 행태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누구를 선택하여 진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 대상이 바로 메시아를 영접하는 성도들입니다(1:12-13).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메시아처럼 만민구원사역에 매진할 것입니다.

(2)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43:9b); 창조주 하나님은 선민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선민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이방인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1)    히브리 정경을 들여다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본뜻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그들의 역사를 섭리하신 기록이 생생합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만민구원의 메시지입니다(66:18-21, 2:28). 그러므로 이전 일들을 세상사람들에게 말해줄 필요성이 있습니다(43:9b).

2)    그리고 메시아가 오신 이후의 기록을 살펴보면 또한 만민구원의 드라마가 역동적으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선민출신이거나 이방인출신이거나 상관이 없이 누구나 메시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만민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주고 있습니다(1:8).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그 일을 대대적으로 준비하시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수없이 보내어서 미리 예언을 했다는 사실을 함께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43:9b, 4:22, 7:51-52, 3:2).

(3)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43:9c);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의 잘못을 이사야가 꼭 집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세상사람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우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증거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첫째, 하나님말씀과 율법에 대한 그들의 해석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생활규칙과 전통적인 주석입니다. 아전인수격이며 선민들의 집단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규정들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7:9),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2)    둘째, 유대교권의 확립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준수하도록 가르치고 그것을 최고기관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감독하며 규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두려워하고 또 산헤드린 대 공회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 마음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남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외식적인 종교생활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셋째로, “(a) 여호와가 말하노라. (b)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c)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d) 나의 (, , before)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43:10); 이사야는 하나님신앙을 온 세상에 전하는 성도들이 명심해야만 하는 사실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가 말하노라”(43:10a);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냥 자연발생적으로 생성이 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만든 주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이 바로 창조주이며 지금도 역사를 섭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성도는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자연과 환경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창조주는 피조물인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전능자라는 사실도 말해주어야 합니다.  

(2)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43:10b); 증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증거하고 있는 증인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증거하게 되는 증인입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증인을 하나님이 메시아의 시대를 준비하면서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하는 예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온 세상에 만민구원의 뜻을 전하는 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라고 하겠습니다(43:10b).

(3)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43:10c);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조금씩 다른 의미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선민사상에 의거하여 답변할 것입니다. 이방나라 애굽에는 재앙을 내리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의 자손인 자신들에게는 출애굽의 영광과 하나님 백성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에게는 참으로 좋으신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2)    그러나 이방세계를 대표하고 있는 애굽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여호와는 결코 구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진노와 재앙으로 이방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일 따름입니다.

3)    만약 선지자 이사야에게 묻는다면 어떠한 대답이 나타날까요? 만민구원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모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그 종으로 그 주인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공의의 원칙을 적용하여 만민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백성과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는 성도라고 하면 그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4)  나의 (, , before)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43:10d);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물론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가 다른 신을 만든 사례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다고 한다면 여호와 때에는 지음을 받은 신이 있다고 해석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가 지음을 받은 신이라고 한다면 그 누가 여호와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대하여 이사야는 다음 구절에서 친절하게도 답변을 해주고 있습니다.

넷째로, “(a) 나 곧 나는 여호와. (b)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43:11);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사실을 재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1)  나 곧 나는 여호와”(43:11a);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에 시간이나 공간에 억매이지 아니하고 항상 먼저 존재하고 있는 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여호와보다 먼저 존재하거나 여호와를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것은 유일한 창조주가 여호와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2)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43:11b); 만민과 만물을 창조하신 당사자이시기에 그들을 심판하고 구원할 수 있는 자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지 아니한 자가 구원자가 된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은 효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창조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라고 하는 구원을 베풀어줄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방 신이나 우상에 의하여 구원을 쟁취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처음부터 원인무효의 발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개념과 문장의 의미를 세밀하게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평소 알고 있던 그 훨씬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쏟아져 나오기를 시작합니다;

(1)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만민구원의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모르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선민구원의 하나님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있는 동족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맹인이며 귀머거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소경과 귀머거리 신세를 면할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는 일찍이 모세가 말한 그대로 모두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그 말씀을 직접 듣고 깨달음을 얻으라고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2)  그것이 어렵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장차 만민구원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가운데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그 뜻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은혜가 숨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도 자신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고 증거해주고 있습니다(14:9).

(3)  여호와는 만민구원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 메시아를 선민사회에 보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선민들이 자신들만 구원받겠다고 하는 이기적인 선민사상을 버리고 메시아를 영접해야만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며 구원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이사야가 경고하고 있습니다.

(4)  본문 이사야의 예언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이방인인 우리들도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만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끼리 구원받고 우리끼리 세상적인 영광을 누리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사야 시대 선민 유대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만민구원의 길을 먼저 걸어가신 메시아의 행적을 따라가는 신앙인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의 종이며 증거자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