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9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19. 14:14

이사야 강해 제193(43: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220(주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하여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이사야가 설명하다(43:1-4).

 

본문에서 이사야는 동족 이스라엘 자손을 구속’(救贖, 속전 곧 몸값을 치르고 노예에서 해방시켜주는 것)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치르시고 계시는 그 엄청난 희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43:1-4). 그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굉장한 희생을 치른 사실과 함께 앞으로 치르게 되는 막대한 희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과연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풀이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b) 이스라엘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c)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d)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하고 있는 계시는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표명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선민들이 무엇을 잘 모르고 있으며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지적해주시는 말씀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그러합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43:1a); ‘야곱의 개념은 이스라엘의 개념과 다릅니다. 물론 야곱의 운명이 바뀌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대한 족장 이스라엘로 변화하고 있지만(32:28, 35:10) 여기서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야곱은 개인적인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이스라엘은 민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라고 하는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야곱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한 가지 말씀을 하시겠다는 언질입니다.

2)    그 한 가지 말씀을 특별히 지금 이 시간에 말씀하시는 이유는 지금부터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깊이 관련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내용을 대변하고자 합니다.

 

(2)  이스라엘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43:1b); 언뜻 보면, 야곱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미가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1)    야곱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같은 개인의 인생을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을 형성하시고 특별한 사명을 맡기셨다는 의미입니다.

2)    그러므로 지금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또 민족적으로 한꺼번에 상대하시면서 꼭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은밀하고도 비밀스럽게 추진이 된 내용이지만 앞으로는 공개적으로 추진이 되어나갈 역사적인 사실입니다(48:6-11). 성도들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서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3)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43:1c); 사람의 영혼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는 소멸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섰을 때입니다. 심판주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앞에 나타나시게 되면 그렇게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벌벌 떨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속해주기로 이미 결정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복음을 전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구속이라고 하는 의미는 죄와 사망에 지배를 받고 있는 그 인생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께서 대가를 대신 치르시고 해방을 시켜주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를 하자면, 영벌의 대상에서 영생의 대상으로 옮겨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5:24).

(4)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d); 수 많은 인류 가운데 나를 특정하여 구속해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특별히 구속해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가를 대신 치른 것이므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1)    그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그 소속이 바뀌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종 노릇하던 처지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그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8:1-2). 신분이 달라졌기에 이제부터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달리 살아가야만 합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히 알아 듣고서 그대로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말씀을 지금 여기서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렇게 특별히 선택된 이유와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싼 대가를 치르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과 선민국가의 지위를 부여해주셨는데 그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3)    쉽게 말하자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했는데(19:6) 그렇게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와 이민족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중보기도하고 대신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몸소 본보기를 보여주는 이른 바 선지자다운 거룩한 인생으로 살아가지 아니한 것입니다(28:19-20). 참고로, 그러한 하나님의 탄식과 지적 사항이 선지서 요나에 가득 실려 있습니다(12:39-41, 16:4).

둘째로, “(a)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b)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43:2); 이미 경험한 역사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미래에 경험하게 될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구속의 의미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소속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하나님의 강력하신 보호하심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 보호하심이 과연 어느 정도로 강력한 것일까요?

(1)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43:2a); 세상의 모든 풍파가 밀물같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한 평생 살아가고 싶지만 그 성난 파도를 바라볼 때에 두렵기 그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종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43:2a). 그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믿게 해주실까요?

1)    출애굽을 한 백성들을 홍해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의 바닷물을 갈라지게 하십니다. 그 사이 마른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가게 하십니다. 추격해서 홍해 속으로 들어온 애굽의 군대를 일시에 수몰시켜버리십니다(14:23-31).

2)    갈릴리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타고 있는 작은 배를 전복시킬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시자 곧 조용하게 되고 맙니다(14:32-33, 8:24). 그러므로 세상보다도, 적군보다도, 풍랑보다도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2)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43:2b);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불 가운데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 불 속에서 보호하여 구해내시는 것입니다(3:23-29). 또한 불꽃은 음부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16:23-24). 그 불꽃이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을 상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을 하시기 때문입니다(28:1-10).

셋째로, “(a) 대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구원자임이라. (b) 내가 애굽을 너희 속량물, 구스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43:3);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하여 무엇을 대신 희생했는지 그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지불한 것과 앞으로 지불할 내용을 함께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1)  대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구원자임이라”(43:3a);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정체에 대하여 세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조주, 거룩하신 분, 구원자입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입니다(3:14). 구체적으로, 언제나 변함없이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결정하시고 스스로 행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시공간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고 모든 피조물 앞에 현재의 모습 그대로 현현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2)    거룩함’(holiness)은 피조물의 특성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의 것입니다(3:5, 4:8). 그러므로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거룩하신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때에 거룩한 선민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거룩한 사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림돌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3)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구원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 옛날 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많은 희생을 치르신 일을 또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2)  내가 애굽을 너희 속량물, 구스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43:3b); 출애굽의 분기점은 애굽에 내린 열 번째의 재앙입니다. 소위 장자(長子, 맏아들) 죽음과 초태생(初胎生, 처음 태어난 가축의 새끼)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 양의 피를 문인방(문 위의 들보)과 좌우 설주(문 기둥)에 뿌린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렇게 조치하지 아니한 애굽 사람들은 모두 줄초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깊은 의미가 무엇일까요?

1)    모두가 하나같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지 아니하며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있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땅을 경작하며 세상을 경영하는 것입니다(1:28, 2:15). 그런데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지를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군림을 하려고 합니다(6:2-7). 따라서 모두가 멸망의 대상들입니다.

2)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모세를 통하여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12:7-14). 어린 양의 피를 대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지 아니한 애굽 사람들은 장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3)    그 사실을 여기서 하나님께서 다른 측면에서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 사람들이 대신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세주나 구원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속량의 제물이 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뜻은 종말심판이 있기 전에 역사적인 심판을 당하게 되는 슬픔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유월절 밤이 노예해방의 기쁨의 밤이며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하는 밤이지만 애굽 인들에게는 엄청난 슬픔의 밤입니다(12:29-30).

4)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바라보고 기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수 많은 애굽의 장자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는 그 현장을 보시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4:11). 그들도 모두 구속과 구원의 대상인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만 구출하는데 그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므로 그날 밤에 구원함을 입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특별한 사명을 부여 받게 됩니다. 다시는 애굽의 곡성과 같은 재앙 곧 역사적인 심판이 없도록 모든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는데 앞장을 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19:5-6).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제사장나라가 감당해야만 하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저버리고 선민들이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애굽에서의 속량함이 허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6)    구스와 스바는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 성을 구하기 위하여 출전했던 구스 왕 디르하가의 원군과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37:9). 구스는 오늘날의 이디오피아입니다. 그 당시 곧 애굽 제25왕조 때 구스의 왕은 전체 애굽 제국의 패주입니다. 그들은 바다 건너 아라비아의 형제국가인 스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는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치기 위하여 원정을 했습니다(왕하19:8-10). 그러나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전술을 당하지 못하고 많은 군사를 잃고서 패주하고 말았습니다.

7)    그 사건 후에 세상적인 소망이 끊어진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서 눈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왕하19:14-19). 진작에 히스기야 왕이 회개를 했더라면 구스와 스바의 군사들이 처참하게 전사를 하지 아니해도 되었을 것입니다(43:3b).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주고 또한 히스기야 왕을 죽음의 병에서 낫게 해주지만(37:36, 38:5-6) 선민들이 너무나 빨리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다(39:8, 왕하21:11, 16).

8)    언제나 세상적인 낙을 누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께 눈물로 매어 달리면 그냥 구원이 주어지는 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대접하며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선민들만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인줄 착각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하여(3:16, 8:21) 선민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애굽과 구스와 스바의 사람들을 구원하지 아니하고 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했는지 이제는 그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9)    장차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다시 한번 대속의 피를 흘리고 그들을 모두 구원해준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사야는 부디 선민들에게 회개를 하라고 종용을 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메시아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철저하게 만민구원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서 구원해주신 은혜에 보답을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a) 내 눈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b)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3:4);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대신 내어준 사람들은 누구이며 앞으로 그들을 대신할 자는 누구인지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그 점을 따져보고자 합니다;

(1)  내 눈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43:4a); 선민들은 스스로 이방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선민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들은 멸망의 대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지키며 속죄의 제사를 제 때에 드린다면 선민들은 항상 구원과 번영을 누릴 수가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심판이 오히려 선민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1)    이사야는 백 년 후를 예지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있습니다(39:6).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갑니다(39:7). 훗날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에 의하여(45:1-5) 자유민이 되고 소수만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2)    그들 유대인들의 사회에 장차 메시아가 오시게 됩니다. 만민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십니다. 그러나 선민구원만을 고집하는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에 따라 유대인 사회가 붕괴되고 다시 한번 온 세상에 나그네가 되고 말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세상 끝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유대인들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여호와 하나님) (보시기)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43:4a).

(2)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3:4b);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는 종이 어느 정도로 소중한 존재일까요? 그 종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로 두텁게 보호하시는지를 보면 그 해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1)    그 옛날 가나안 땅 원주민들에게 하나님신앙을 전해주기 위하여 선지자로 떠나고 있는 아브라함을 다음과 같이 보호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 하나님신앙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있는 떠돌이 선지자 아브라함입니다. 그를 원주민들이 어떻게 대접하고 있을까요? 얼마나 그들이 아브라함을 배척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2)    예를 들면, 당시 가나안의 중심도시 세겜에 도착했을 때의 일입니다(12:6). 하나님께서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선언하시자 아브라함은 신이 났습니다. 곧바로 그곳에 제단을 쌓고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12:7). 하지만 이웃 원주민들의 방해로 철수를 하고 맙니다. 남쪽으로 옮겨가서 인적이 드문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12:8).

3)    가나안 땅의 가뭄을 피하여 두 차례 피난살이를 합니다. 애굽과 블레셋의 그랄 지역입니다. 두 차례 모두 미인인 아내 사라를 황제의 후궁으로 빼앗기게 됩니다(12:15, 20:2). 하나님께서 적극 개입하시어 도로 찾게는 되지만 그 고생이 보통이 아닙니다. 또한 그랄 땅에서는 우물을 파지만 전부 원주민들에게 빼앗기고 있습니다(21:30, 26:15, 18).

4)    그렇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십니다(12:17, 20:7, 18). 그래서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셔서 그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버리시기까지 하십니다(1:12-13, 29, 3:14-15).

5)    그러한 의미를 당시의 사람들이 알아듣기 편하게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3:4b). 그러나 직역을 하게 되면, 결코 이해하기가 쉽지 아니한 문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가 지나고 700년이 흐르게 되면 메시아 예수님의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 사이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이 망하고 선민들의 피가 가나안 땅을 적시게 됩니다(왕하25:2-7). 그리고 메시아를 배척한 유다 사람들이 40년이 지나지 못하여 로마 군대에 의하여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대인 사회에서 무려 110만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피의 역사와 선민들의 희생의 의미를 본문에서 달리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내 눈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3:4). 하나님 보시기에 그 인생이 진실로 보배로운 자를 얻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시겠다는 언급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만민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선민의 지위와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땅끝까지 갈 수가 있을까요? 누가 현세적인 이익과 축복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영생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축복만을 바라보면서 그 인생을 올인’(all in)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한 성도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아들을 메시아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3:16-17). 그와 같이 엄청난 희생으로 탄생시킨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사도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새로운 이스라엘로 불리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쪼록 하나님 보시기에 천하보다도 귀한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