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92강(사42:23-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2월 19일(토)
동족인 선민들에게 외치는 이사야의 절규; “너희 중에 누가 이 일(만민구원에 나서시는 여호와의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뒤에 올 일(불응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을 삼가 듣겠느냐?”의 의미에 대하여(사42:23-25)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하였도다!”(사42:24c)고 개탄하면서 본문에서 그 범죄내용의 핵심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사42:24de). 그리고 그 때문에 선민들의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42:24ab, 25a).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나라를 잃어버린 선민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를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사42:25b).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예견하면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절규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만민구원에 나서시는 여호와의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뒤에 올 일(불응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을 삼가 듣겠느냐?”(사42:23). 과연 그와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검토하면서 그 의미를 자세하게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너희 중에 누가 이 일(만민구원에 나서시는 여호와의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b) 누가 뒤에 올 일(불응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을 삼가 듣겠느냐?”(사42:23);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누가 나서겠느냐? 는 질문입니다. 후자는 훗날에 발생하는 일, 특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부디 관심을 가져달라고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강조용법인 질문형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너희 중에 누가 이 일(만민구원에 나서시는 여호와의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사42:23a); 여기서의 질문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일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자 하는 자가 아직까지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자원하여 경청을 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사야가 질문형식으로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그 일이 너무나 중차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때의 경우를 참조하여 그 의미를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사야를 만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사6:8a)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b).
2) 그때 이사야가 즉시 긍정적으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c). 그 결과, 이사야가 동족인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전하게 되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으며 파송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사6:9).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동족인 선민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민구원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방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선지자를 모집할 때에 부디 귀를 기울여 듣고서 자원을 하십시오(사42:23). 그것이 선민의 사회가 망하지 아니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사42:25)”.
(2) “누가 뒤에 올 일(불응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을 삼가 듣겠느냐?”(사42:23b); 이사야는 대부분의 선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히스기야 왕 시대의 동족들의 신앙의 태도가 그러하며 그가 예지하고 있는 메시아의 시대에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부르짖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역사에 동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진노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이사야는 한 사람의 동족이라도 더 살리고 싶어합니다. 요컨대, 그것이 동족을 사랑하는 선지자의 마음입니다.
둘째로, “(a)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나? (b)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c) 우리(선민)가 그(여호와)에게 범죄하였도다. (d) 그들(선민들)이 그(여호와)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e)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사42:24); 이사야는 지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그와 같은 역사가 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나?”(사42:24a); 조상인 야곱의 일생을 먼저 생각해봅니다. 77세의 중늙은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게 됩니다. 쌍둥이 형 에서에게 돌아갈 차기 족장의 축복을 가로챈 결과 그 보복이 두려워서 집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창27:41-45). 그 결과 북부 시리아 하란 땅 나홀의 성으로 찾아가서 외삼촌 라반의 머슴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창24:10, 29:1-20). 그때부터 20년 동안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에게 억울하게 착취를 당하게 됩니다(창31:38-42).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야곱을 20년 세월 동안 라반에게 맡겨서 탈취를 당하게 했을까요? 택한 자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가 훗날 드러나게 됩니다. 요컨대, 야곱을 하나님신앙으로 이방 땅에 우뚝 서는 하나님의 족장 이스라엘로 만들기 위함입니다(창35:9-13).
(2)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사42:24b); 현세적인 축복과 선민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제사장으로 사용하여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도록 만들 수가 있을까요? 또한 선지자로 사용하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동일합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야곱을 하나님의 족장 이스라엘로 만드신 하나님의 방법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임하고 있습니다. 라반과 같은 약탈자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연이어 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왕하16:5, 18:13-17).
(3) “우리(선민)가 그(여호와)에게 범죄하였도다”(사42:24c); 역사 가운데 선민의 영광이 아니라 약소국의 비참함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가 한 마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제 마음대로 선민들의 욕심을 쫓아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들(선민들)이 그(여호와)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사42:24d);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길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고 있는 인생길입니다. 선민들의 선택은 후자라고 하는 이사야의 지적입니다. 그것이 선민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5)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사42:24e);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수 많은 의사결정을 하게 됩니다. 특히 어려운 난관이나 난제를 만났을 때에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 방법론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세상적인 경험과 힘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할 것인가? 선민들의 선택이 전자였다고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a)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b)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c)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도다”(사42:25); 잘못 선택하여 제 욕심껏 살아온 결과 절망적인 미래가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선지자인 이사야의 눈에는 이미 훤히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미래가 사람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 섭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사42:25a);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있는 동족들입니다. 그저 선민으로서 자신들의 위세를 높이고 세상적인 번영이라는 소원성취나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민과 만물을 돌보고 사랑하며 모두 구원하고자 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마음가짐은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선민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엄청납니다. 재앙이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상 마지막 선민의 나라가 사라질 판국입니다.
(2)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사42:25b);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유민으로 이방세계를 떠돌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환영을 받지를 못합니다. 선민의 영광이 전혀 드러나지를 못하고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고토로 돌아와서 약속의 땅에서 다시 살고 있는 선민들에게도 위기가 임하게 됩니다(스1:1-6, 느13:7-29, 마27:22-26). 하나님의 뜻을 메시아가 그 사회에 와서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그것을 배척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선민의 구원과 영광만을 갈구하고 있는 그들의 말로가 이사야는 가장 큰 걱정입니다. 그래서 부디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3)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도다”(사42:25c);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될까요? 영벌에 처해지며 불꽃 가운데 그 몸이 타게 될 것입니다(마25:41-46). 그러한 위기가 눈앞에 보이고 있는데도 자신의 인간적인 의로움을 내세우고 있으니 그것이 걱정입니다(롬10:3).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난 욥의 기록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동방의 제사장이며 의인인 욥은 죽기 전에 꼭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욥13:3, 22-28, 35:14). 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평생 제사장으로 살아온 자신에게 그토록 처참한 말년이 닥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을 창조주로부터 얻을 수만 있다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막상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창조의 질서와 모든 피조물을 살리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듣게 되자 욥은 회개를 합니다(욥42:6).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롭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욥의 친구들이 속죄의 제사를 드려달라고 그에게 요청하자 욥은 그들을 위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합니다(욥42:8-9). 아울러 욥은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합니다. 바로 그때에 새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욥42:10). 욥의 신원이 회복이 되고 친구들이 용서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칭 의인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생각했던 욥의 과거의 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욥은 자기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서만 속죄의 제사를 드린 이른 바 ‘집안의 제사장’에 불과했습니다(욥1:5). 친구와 이웃을 위하여 제사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특히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친구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며 속죄의 제사를 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신앙생활이 전혀 아닙니다. 요컨대,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행태가 하나님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기 전의 욥의 행동과 똑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선민들만 그러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오늘 날의 성도들도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정확하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인 성도들의 삶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깨달음과 실천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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